드디어 산티아고다!
'스무편의 사랑의 시와 한편의 절망의 노래'를 쓴
시인 바블로 네루다에게 영감을 준 도시
▲마포초 강이 흘러가는 산티아고. 멀리 산크리스토발 언덕과 안데스의 만년설이 보인다.
칠레의 수도인 산티아고는 동쪽으로는 아메리카 최고봉인 아콩카과를 비롯하여 안데스의 만년설이 솟아있고, 서쪽으로는 태평양이, 북쪽으로는 아타카마 해안 사막지대가 끝없이 펼쳐져 있다. 또한 남쪽으로는 빙하가 대지를 덮고 있다. 때문에 산티아고는 어느 쪽을 이용해 가더라도 가혹한 자연을 넘어야 한다.
남북으로 길게 뻗은 표고 520미터의 분지위에 위치한 산티아고는 황금을 찾아 남미로 왔던 스페인의 침략자 페드로 데 발디비아에 의해 1541년에 건설 된 이후, 영광과 비극이 함께하며 칠레 최대 도시로 발전하고 있다. 칠레 인구의 3분의 1이 넘는 600만명 바글거리는 산티아고는 지중해성 기후로 일년 내내 비교적 온난한 날씨이나 안개가 자주끼고 밤과 낮의 기온차가 심하다.
산티아고는 칠레 민중의 불꽃으로 추앙을 받았던 영원한 청춘 시인 파블로 네루다에게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편의 절망의 노래'를 짓게 한 영감을 주어 그에게 노벨문학상을 안겨주기도 한 도시이기도 하지만, 칠레 최초의 민선 대통령인 살바도르 아옌데가 피노체트의 쿠데타에 의해 쓰러지고 피노체트의 독재정치가 17년간 계속되었던 암흑의 도시이기도 하다.
도심으로 접어들자 산크리스토발 언덕이 보이고, 시내를 가로지르는 마포초 강에는 여름철이어서 인지 안데스의 눈 녹은 물이 거세게 흘러가고 있다. 멀리 만년설을 인 안데스의 봉우리가 그림처럼 도시를 감싸며 신비하게 보인다.
▲여행자들로 붐비는 버스터미널
▲Tur버스 터미널에 진열된 오래된 자동차들
그러나 북쪽에 위치한 터미널에 도착을 하니 숨이 턱턱 막힌다. 버스, 승합차, 중고차 등 자동차에서 내뿜는 매연이 푸른 초원의 분위기를 180도로 바꾸고 만다. 산티아고는 도시가 주는 느낌과는 달리 매연으로 악명이 높은 도시다. 공해의 주범은 도시가 분지에 건설된 탓도 있지만 정제되지 않는 연료를 쓰는 자동차들이다.
Tur버스 터미널에는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다. 바로 옆에는 Pullman 버스터미널이 연달아 있다. 우리는 한국을 떠날 때 강영숙 작가가 소개를 해준 산티아고 ‘지구촌여행사’ 김봉중 사장한테 전화를 걸었다. 삭막한 남미여행에서 김치냄새도 맡고 싶고 말이 통하는 한국인을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김 사장은 생면부지의 여행자에게 아주 반갑게 전화를 받는다. 터미널에서 북쪽으로 오면 교회가 하나 있는데, 그 교회 앞에서 기다리라고 한다. 자동차로 사람을 보내겠단다. 당근! 지친 나그네에게 얼마나 반가운 소리인가!
아내와 나는 긴 여행의 피로도 잊은 채, 터미널 밖으로 나와 교회건물 앞에서 그가 일러준 자동차를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그는 오지 않는다. 버스에서 내뿜는 매연과 소음으로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다.
▲매연과 소음으로 숨쉬기조차 힘든 산티아고의 거리
1시간여를 기다리다가 사무실로 그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으나 받지 않는다. 그렇다면 문을 닫고 그가 우리한테 오고 있는 중이 아닐까?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하얀색 봉고차는 보이지 않는다. 아마 길이 엇갈린 게 아닐까?
긴 여정으로 녹초가 된 우리는 일단 산티아고 유스호스텔로 가기로 했다. 버스터미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호스텔에 무사히 도착을 하여 프론트로 들어가니 이곳엔 독방도 없고 도미토리도 남녀가 따로 구분되어 있다고 한다.
긴 여정으로 조난당한 사람처럼 지쳐버린 우린 다른 숙소로 갈 엄두도 내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16,000페소를 지불하고 따로따로 헤어져 아내는 2층에, 나는 3층에 숙소를 배정 받았다. 여정을 풀고 누에고추처럼 네모진 상자 안에 웅크리고 누워 잠을 청했지만 잠이 잘 안 온다.
아내는 낯선 여행자들 사이에서 잘 자고 있을까? 김봉중 사장이 지금도 터미널에서 우릴 찾으려고 헤매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매연과 소음이 난무하는 터미널이 가물거린다. 파블로는 스무 편의 사랑의 시를 짓다가 왜 한편의 절망의 시를 썼을까? 갑자기 머리가 아프다. 나는 동틀 녘 부두에 버려진 사내처럼 몸부림치다가 새벽녘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
동틀 녘의 부두처럼 버려진 사내.
떨리는 그림자만이 내 손아귀에서 몸부림치고 있다.
아 모든 것의 피안으로! 아아 모든 것의 피안으로!
떠나야 할 시간이다, 오 버림받은 이여!
......................................................
(파블로 네루다의 '절망의 노래'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