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즈키 지프차를 하루에 45달러를 주고 렌트를 했다. 물론 오래된 진한 남색 고물차다. 라디오도 없고 스틱기어다. 9시에 오기로 한 차가 9시30분이 되어서야 왔다. 차주는 라파누이의 여인 바이오키 Bioky. 그녀는 라파누이 말로 미안하다고 하며 키를 넘겨준다. 기름은 가득 차 있다. 시동이 걸고 엑셀을 밟아보니 자동차는 슬슬 앞으로 나간다. 마르타와 로저, 미히노아가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한다.
"올라!"
"요란나!"
우리는 마치 장도에 오른 탐험대처럼 마르타 가족의 환송을 받으며 모아이 탐사 길에 나섰다. 우리는 로저가 준 이상한 지도를 따라 가기로 했다. 이상한 새 그림과 모아이 석상들이 수없이 그려진 지도다. 그리고 슈퍼마켓에서 뻥과 우유, 물을 사 싣고 마타베리 공항을 지나 섬의 남쪽으로 향했다. 스즈키 지프차는 덜덜 거리면서도 4륜구동이라 힘이 있었다. 이스터 섬을 탐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항가로아 마을에서 충분한 물과 비상식량을 준비해야 한다. 섬의 어느 곳도 항가로아 마을 외에는 먹을거리를 팔지 않기 때문이다.
△쿠스코의 잉카문명 석벽처럼 생긴 아후 비나푸 석조물
우리는 마치 이 섬을 최초의 탐험자 로베겐이나 혹은 20세기에 노르웨이 모험가였던 토르 헤예르달이나 된 것처럼 의기양양하게 자동차의 엑셀을 밟으며 탐사에 나섰다. 오늘의 주목적 탐사 지는 라노 라라쿠 모아이 채석장이다. 마타베리 공항을 지나 섬의 남쪽으로 차를 몰았다.
이스터 섬의 남쪽 부분, 마타베리 공항 활주로의 동쪽 끝을 따라가니 해안가에 항공유를 저장한 큰 유류탱크들이 나오고, 그 유류탱크 부근에 축대를 쌓듯이 큰 돌을 쌓아올린 세 개의 석조물이 보였다. 지도를 보니 이것이 바로 ‘아후 비나푸(Ahu Vinapu)’라고 불리는 곳이다. 빈틈없이 완벽하게 맞물린 돌덩어리들이 마치 쿠스코의 잉카문명 석벽과 비슷하게 생겼다.
토르 헤예르달의 콘 티키호 표류여행
△토르 헤예르달과 뗏목 보트 발사
토르 헤예르달Thor Heyerdahl은 잉카문명을 닮은 이 석벽과 잉카문명 이전에 존재했던 볼리비아 티아후아나코 태양숭배소에 있는 무릎 꿇는 석상과 비슷한 '투쿠투리' 석상과의 유사성, 티티카카호수에서 자라나는 토토라 갈대가 이 섬에 자라는 것 등을 보고 이스터 섬에 최초로 정착한 사람들이 남아메리카 대륙에서 왔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주장을 증명하기 위하여 남동 무역풍이 거의 일 년 내내 분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1947년 유명한 콘 티키 탐험대를 이끌고 다섯 명의 탐험대원과 함께 페루 카야호 항을 떠났다.
그가 탄 배는 가볍고 단단한 열대산 간목 발사balsa로 만든 뗏목이었다. 간단한 뗏목을 타고도 폴리네시아 동쪽으로 떠내려간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였다. 뗏목에 실은 물품은 통조림식품과 바닷물을 태양열에 증류시켜 식수를 만드는 태양열증류기가 들어 있었다. 터무니없는 비교라고 하겠지만 그것은 마치 우리가 고물 자동차에 물과 비상식량을 싣는 것과 흡사했다.
△노르웨이 콘티키 박물관에 보관된 토르 헤예르달이 항해했던 발사 뗏목과 모아이.
우리는 이번 세계일주중 노르웨이에서 그의 항해 궤적을 이미 보고 왔었다.
탐험대 여섯 명, 그리고 앵무새 한 마리를 포함하여 그들은 대나무로 된 비좁은 통나무집에 끼어 지푸라기를 매트리스로, 갈대를 깔개로 삼아 잠을 청해야 했다. 그들은 거대한 고래상어가 나타나면 고래 잡는 작살하나로 물리쳐야 했고, 가끔씩 몰아오는 폭풍우 때문에 탐험대원 한명이 배 밖으로 떨어지기도 했다. 이 대원은 구출되기는 했지만 사나운 비바람에 날려 바다 속으로 떨어진 앵무새는 영영 다시는 볼 수가 없었다.
바다물을 증류해 먹기는 했지만 소금끼가 완전히 빠지지 않아 고통스럽기도 했지만, 때때로 쏟아지는 소나기로 갈증을 풀었다. 가다랑어와 날치들이 갑판위로 뛰어오르기도 했고, 프라이팬 속으로 뛰어든 적도 있었다. 이 물고기들은 그들의 멋진 먹을거리로 제공되었다. 그렇게 101일 동안 서쪽으로 떠내려 와서 그들은 타히티 동쪽 모래톱에 부딪쳤다. 그러나 이 영웅적인 탐험대는 서쪽으로 떠내려가는 항해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증명하기는 했지만 남아메리카 인들이 이스터 섬으로 왔다는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스터 섬에 대한 헤예르달의 저작과 업적은 이스터 섬 연구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많은 연구들이 남아메리카 보다는 폴리네시안 인들이 이 섬에 최초 보트피플 일 것이라고 반증을 했으며 또 섬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도 대부분 폴리네시안 혈통의 사람들이다. 그 중에서도 구비문학으로 전해 내려오는 전설적인 왕 호투 마투아가 이 섬 의 최초의 보트피플일 것이라는 설이 훨씬 더 많은 설득력을 얻고 있다.
전설적인 호투 마투아 왕
이스터 섬의 전설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호투 마투아 Hotu Matu'a, 즉 이 섬의 초대왕이다. 그는 서쪽으로부터 와서 해가 솟아오르는 곳으로 향해 갔다. 그의 고향은 히바Hiva라고 부른 섬이었다. 히바 섬은 이스터 섬으로부터 북서쪽으로 3,641km 떨어진 마르케사스 제도에 속한 섬이다.
전설에 따르면 호투 마투아 왕은 두 척의 대형 이중선체 카누를 타고 300명의 부하를 이끌고 아나케나 해변에 당도했다. 그는 아나케나에 정박을 하기 전에 섬을 한 바퀴 돌고 나서 아나케나 해변에 정박을 했다고 한다.
호투 마투아 왕에게는 여섯 아들이 있었는데, 그가 죽기 전에 그의 여섯 아들에게 섬을 분할해 주었다고 한다. 분할 된 구역을 '마타 mata'라고 하는데, 유럽인들이 도착을 했을 때에는 열 개의 마타가 크게 두 개의 적대적인 집단으로 양분되어 있었다.
각 마타는 같은 조상을 가진 수많은 혈연, 또는 넓은 의미의 가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각 혈연 집단은 가족의 의식을 치르고 매장을 하기 위한 장소로 쓰이는 '아후ahu'를 가지고 있었다. 아후에는 신들과 신성시하는 선조들의 석상인 '모아이moai'를 세워놓았다.
호투마투아는 자신의 죽음이 임박한 걸 느끼고 성지인 오롱고로 가서 떠나온 고향땅을 바라보며 크게 고함을 질렀다고 한다. 폴리네시아 전통에서는 맨 서쪽 끝의 땅을 영혼이 떠나는 지점으로 본다. 이스터 섬에서는 오롱가 가장 서쪽에 있어 섬 사람들은 영혼이 떠나는 성소로 여기고 있다.
이러한 전설과 언어학적, 생물인류학적, 고고학적 자료들을 분석한 결과 이스터 섬의 최초의 보트피플은 폴리네시안 인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이 섬에서 17개월 동안이나 파란만장한 시간을 보내며 이스터 섬 연구에 몰두했던 영국 여인 캐서린 스코스비 루틀지 여사는 활용 가능한 모든 증거들을 충분히, 그리고 공정하게 검토, 평가한 후에 이스터 섬 사람들은 남아메리카가 아니라 폴리네시아에서 왔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스터 섬의 최초의 보트피플은 결국 폴리네시안이란 결론이 내려진 것이다. 나 같은 여행자가 보기에도 이 섬의 성향은 사람들 모양이나 풍토, 언어들이 폴리네시안 스타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여간 그 부분은 앞으로도 연구대상이 되겠지만 그것은 고고학자나 인류학자들의 몫이다.
△이스터 섬 남쪽 해변에 넘어진 모아이 상. 그는 왜 코를 땅에 박고 있을까?
라노 라라쿠로 스즈키 고물차를 슬슬 몰고 가는데 해변 군데군데 모이들이 넘어져 있거나 외로이 서 있다. 항가포우쿠라 Hanga Poukura, 바이후Vaihu, 아카항가 Akahanga… 모아이 석상은 저마다 전설을 담은 듯 태고의 모습으로 널브러져 있다. 어떤 것은 코를 땅에 박고 있고, 어떤 것은 눈알이 없는 애꾸눈의 모습을 하고 있다. 도대체 저 거인들은 누가 무엇 때문에 만들었을까? 모이들은 누구를 닮았을까? 전설의 왕 호투 마투아를 닮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