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섬진강일기

매천 황현 선생 100주기를 추모하며...

찰라777 2010. 9. 10. 10:02

 

정말 우연치 않게도 내가 두 달 전에 이사를 온 구례 간전면 수평리는 100년 매천 황현 선생이 17년간이나 거주 했던 만수동 마을과 인접해 있는 곳이다. 만수동 마을은 우리 집에서 걸어서 10분 정도에 있는 백운산 자락에 위치한다. 매천은 32세 때 광양에서 이곳 만수동 마을로 이사를 하여 "구안실(苟安室)"이란 편액을 내걸고 17년간이나 기거를 했다.

 

 ▲만수동 마을이 위치한 백운산의 아침 운해

 

 

오늘 2010년 9월 10일은 우리나라가 일제 강압에 의하여 경술국치를 당한지 꼭 100년이 되는 날이다. 아울러 일제의 한일합방 소식을 듣고 매천 황현 선생이 절명시(絶命詩) 네 수를 남기고 자결을 하여 목숨을 끊은 지 100년이 되는 날이기도 하다. 매천 선생의 향기가 묻어나는 곳에 살고 있는 귀농자로서 황현 선생 순국 100주기를 맞이하여 그의 삶과 생애를 조명하여 본다.

 

 

매천은 1855년(철종6년) 광양 땅 서석촌(지금 광양군 봉강면 석사리)에서 태어나, 28세 때인 1882년 과거시험 초시에 1등으로 뽑혔으나, 변방출신이라는 이유 때문에 합격 취소가 되었다. 그 후 매천은 32세 때 구례군 간전면 수평리 만수동 마을에 칩거를 한다.

 

만수동 마을은 백운산 자락에 위치하여 지리산과 계족산을 마주하고 있는 궁벽한 고장이었다. 매천은 바로 이 궁벽한 고장에서 '구안실(苟安室)'이란 서실을 세우고 학문을 닦으며 제자들을 가르쳤다. '구안실(苟安室)'이란 뜻은 '그런대로 완벽하다', '그런대로 훌륭하다'고 만족할 줄 알았던 공자의 형(荊)에 온 것이다. 공자는 맹목적인 부의 추구를 경계하고, 부족한 상태에서도 항상 만족하며 감사할 줄 아는 태도를 가르쳐 주었는데, 매천 자신이 그 가르침을 취하여 서재 이름을 '구안실(苟安室)'로 한 것이다.

 

만수동 마을에서 왕성하게 저술활동을 하던 매천은 부모의 소원을 풀어주기 위해 34세 때인 1888년에는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당시 시대의 정치상황이 '도깨비 세상에 미치광이'꼴로 돌아가자 관직을 맡지 않고 다시 만수동 산골로 돌아와 학문을 폈다. 어떤 친구가 다시 서울로 올라오지 않는다고 탓하자, "그대는 어찌 나를 도깨비 세상에 미치광이들 사이로 들어가서 도깨비 미친 짓을 하게하고 싶은가"라고 쏘아주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매천은 '구안실(苟安室)'이란 편액을 내걸고 스스로 구안의 자긍의식을 천명하고 올곧은 선비정신을 추수렷다. 이때의 생활을 표현한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빈 땅을 가려 띠와 대로 엉성하게 얽었지만

사랑스런 내 집이니 편액을 달아야지

마당 질러 마을로 가는 길 막지 않았고

방문을 열면 앞산이 죄다 바라보인다

형제들은 밥 먹은 뒤 서로 따라 모이고

아이들은 꽃밭에서 장난치며 노는구나

동물이나 새 말고는 찾아오는 사람이 없다

사립문을 달았지만 잠그지 않고 내버려 둔다.

 

나는 선비정신이 없는 사람이다. 40년간 서울 도심에서 탐진치에 탐닉을 하며 살아온 한 갓 중생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매천이 살아갔던 집이나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집이나 살아가는 형식은 우연히 일치한다. 편액은 달지 않았지만, 히말라야 정기를 이어 받았다는 네팔의 유명한 화가 고빈다가 그린 코끼리신 가네시 그림을 문간에 부적처럼 걸어 두었다. 가네시은 시바의 아들로 액운을 막아주고 행운을 가져다 준다는 힌두의 신이다. 하여간 나는 액움이나 막아달라고 부적처럼 가네시 신을 문간에 달아 놓은 그렇게 어리석은 중생이다.

 

그러나 우립 집은 마당을 질러 마을로 가는 길이 막혀 있지 않고, 방문을 열면 계족산과 백운산, 지리산이 바라보인다. 청개구리와 들고양이, 새, 지네와 사내기, 모기들이 찾아들고, 사립문은 달려 있지만 잠그지 않았다. 아내와 단 둘이서 때 다치면 밥 지어먹고, 텃밭 가꾸고, 들판길을 산책을 하며 살아가는 삶은 매천이 말한 '구안(苟安)'의 삶-그런대로 만족한 삶이다. 진수성찬은 아니지만 텃밭에서 일군 채소와 마을사람들이 오며가며 준 야채로 반찬을 삼아 세끼의 밥을 먹는데 부족함을 모르고 살고 있다. 가구는 내가 이사를 간다고 하니 서울 친구들이 하나 둘 준 헌 가구로 채워져 있다. 아마 헌 가구를 이것저것 준 친구들이 족히 몇 십명은 될 듯 시피다. 바람불면 농촌의 향기(칙간냄새)가 나는 누추한 집이지만 그런대로 견딜만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매천을 알고 나서부터 매천의향기를 맡고 살아가고자 노력을 하고 있다.

 

 

▲매천이 살았던 만수마을에서 바라본 지리산 노고단 운해

 

 

마을 사람들은 아픈 아내를 동정해서인지 오며 가며 고추, 오이, 야채, 호박 등 자신들이 땀을 흘려 손수 농사를 지은 보배를 우리 집 사립문 앞에 시도 때도 없이 놓고 간다. 지난번 태풍 때에는 잠시 서울에 일을 보러 집을 비었더니 마을 이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창문에 방충망이 떨어져 나갔는데도 그대로 방치가 되어있고 사람은 없어 내게 혹여 무슨 일이 있지 않은가 걱정이 되어 전화를 했다고 한다.  가슴이 어찌나 찡~ 하던지.... 벽 하나 사이를 두고 사람이 죽어 나가는지, 싸움을 하는지 모른 채 하고 살아가는 서울과는 영 딴판의 세계이다. 진정으로 사람들의 향기를 맡아가며 살아가는 지족의 삶이 아니겠는가. 100년 매천도 궁벽하나 인심좋은 이곳에서 그렇게 살아 갔을 것이다.

 

바로 이 마을에 매천 선생의 발자국이 17년 동안이나 밟고 다닌 곳이 아닌가! 또한 간전면은 그의 스승이었던 조선의 대학자 왕석보(王錫輔)가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우연히 매천 선생이 기거했던 마을에 살게 된 나는 그동안 매천의 향기와 족적을 찾아 여기저기 헤집고 다녔다. 만수동 구안실이 있던 곳은 물론, 월곡마을의 매천사, 광양 등지를 드나들었다. 구례읍의 매천 도서관에서 여러 저자들이 역주를 한 <매천야록>를 빌려다 보고 최근 소설가 황승연이 소설화한 <매천야록> 상권과 하권도 읽었다.

 

이 세상에 매천은 없다. 그러나 매천의 정신은 우주공간에 살아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100년 전 스스로 목숨을 끊어 선비정신을 지킨 매천정신을 한 번 정도는 살펴볼 필요가 있다.

 

경술국치 후 100년 째 되는 날인 바로 오늘, 일본은 각료회의를 열어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방위 백서를 발표를 한다고 한다. 참으로 각성읗 하지 못하고 날뛰는 후한무치의 소행이 아닐 수 없다.

 

 

▲만수마을에 고개를 숙이며 익어가는 벼이삭 

 

뭉쳐야 한다. 진보와 보수는 나라를 위하여 뭉쳐야 한다. 조선말기 조정의 위정자들은 개화파와 보수파로 나누어 분열과 대결을 일삼아 나라를 망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조선말기의 정치적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도 매천 황현 선생의 가르침을 받들어 한 데 뭉쳐 힘을 키워야 한다. 국력이 강성하면 어느 누구도 함부로 하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세계 어느 나라를 보더라도 정치적 성향은 진보와 보수로 양분되기 마련이다. 예를 들면 미국의 민주당과 공화당, 영국의 보수당과 노동당, 프랑스의 사회당과 보수당, 일본의 자민당과 사회당이 그것이다. 진보와 보수, 그 어느 것이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기 때문에 선진국 정치는 일정기간 정권을 교체하여 집권을 하기마련이다. 진보와 보수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두 노선은 변증법적 타협으로 건강한 정치문화를 이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한 가지 사물에 대하여 서로 대립된 두 가지 규정의 통일로 파악을 하여 대타협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서로 경쟁관계에 있는 정명제와 반명제의 전제를 부정하여 제3의 길인 합명제에 도달하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의 꽃이 아니겠는가. 인류의 역사는 이렇게 진보의 개혁, 보수의 안정과 끊임없이 타협을 하며 발전해 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조선 말기의 정세는 진보적 개화파와 보수파가 서로 다른 노선으로 치달아 마침내 극명하게 분열하여 나라를 잃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문제는 오늘날 우리 정치사에도 진보와 보수로 양단되어 건강하게 타협을 하지 못하고 분열과 경쟁을 일삼고 있다는 것이다. 즉, 경제는 선진국으로 진입을 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정치는 영원히 후진국을 면치 못하고 있는 것이다. 반대를 위한 반대, 정권 찬탈과 재창조를 위한 권모술수가 여전히 횡행하고 있다. 이것이 우리의 부끄러운 역사이다. 그래서 우리는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라는 오명을 아직도 씻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옳은 것은 서로 갈채를 보내며 공존을 할 수 없는가? 진보와 보수가 아무리 양극을 치닫는 의견이라 할지라도 변증법적 타협, 즉 '공존의 미학'으로 승화시켜 제3의 합일점을 도출해 낼 수가 있지 않은가?

 

조선말기 대학자인 매천 황현선생은 개화파와 보수파가 참담하게 반목과 분열을 일삼는 경쟁을 매우 안타깝게 보아오며 고뇌하였다. 매천은 국운이 기울어져 가는 1908년, 국민의 무지와 어리석음을 깨우치기 위하여 가난한 선비의 사재를 털어 구례 광의면에 호양학교를 세우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는 제자들을 향해 일갈했다. "그대는 나라를 사랑하는가? 그러면 먼저 건전한 인격이 되라!"고. 사람은 먼저 건건한 인격이 되어야 한다. 정치인이든, 기업가든, 지식인이든, 예술가이든… 건전한 인격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정치계에서도, 기업계에서도, 예술세계에서도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 몫은 사람을 선택하는 권리를 가진 국민의 몫이다. 조선말기 혼돈의 시대에 살고 있었던 매천의 뇌리에는 항상 진정으로 애국 애족하는 것이 무엇인지 떠나지 않았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더욱 빛나고, 시련이 클수록 별은 오히려 밤하늘에 빛나게 되리라" 그는 이른바 군자의 처신행도(處身行道)를 후학들에게 가르쳤다.

 

 

亂離滾到白頭年 난리곤도백두년

幾合捐生却末然 기합연생각말연

今日眞成無可奈 금일진성무가내

輝輝風燭照蒼天 휘휘풍촉조창천

 

어지러운 세상에 떠밀려 백두의 나이에 이르도록

목숨 버리려다 그만둔 것이 몇 번이던고.

오늘에야 참으로 어쩔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바람 앞에 촛불 번쩍번쩍 창천에 비추누나.

-황현, 매천야록/임형택 옮김

 

 ▲매천이 절명을 한 매천사 입구

 

 

매천이 100년 전에 자결을 하기 직전 남긴 절명시(絶命詩)의 첫 소절이다. 2010년 9월 9일, 매천 선생이 자결을 한 전남 구례군 광의면 매천사에서는 매천 황현 선생 100주기 추모식이 서기동 구례군수를 비롯하여 구례군 유림회 소속 많은 유림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녹음이 우거진 매천사에 선비들의 옷차림을 하고 형형한 눈빛으로 서 있는 유림들을 보는 순간, 나라 잃은 슬픔에 스스로 목숨을 끊어 순국하신 매천 선생이 다시 살아 돌아온 듯한 착각에 빠진다.

 

 

▲매천이 절명수를 남기고 자결을 한 대월헌 

 

 

조선의 마지막 선비이자 시인인 매천 황현 선생은 1910년 9월 10일, 일제의 강제병합 소식을 듣고 이곳 구례군 광의면 월곡마을 대월헌(大月軒)에서 절명시(絶命詩) 4수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매천사는 그가 48세 때인 1902년에 만수동 생활을 청산하고, 자결을 할 때까지 매천이 살아간 곳이다. 매천사 입구에는 옳은 뜻을 훤하게 가지라는 창의문(彰義門)이 있고, 창의문을 지나면 좌측에 매천이 자결을 했다는 대월헌(待月獻)이 있다. 그는 달을 보고 죽음을 선택하는 기다림의 세월을 살았을까? 대월헌에는 구례 향교의 유림들이 선비의 복장을 하고 매천 선생 추모제를 지내기 위해 대기하고 있다. 대월헌 앞 옆에는 대문처럼 생긴 화장실이 우뚝 서 있다.

 

대월헌을 지나가면 성인문(成仁問)이 나온다. 성인문 옆에는 매천선생을 추모하는 비와 매화나무 한그루가 나란히 서 있다. 성인문 앞에서 대기를 하고 있던 초헌과 구례군수와 제관, 집사, 유림들이 제례를 집도하는 제관의 진행에 따라 매천사 안마당으로 들어간다. 매천사는 황현 선생의 영정과 위패를 모셔 놓은 사당이다. 추모식에는 구례읍에서 학생들이 동원되어 때거질 몰려와 있다. 그러나 그들은 어서 빨리 식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제관이 읊어대는 어려운 한문을 그들은 알 턱이 없다. 따라서 이런 제례절차도 시대와 조류에 다라 알기 쉽게 변화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이 미래의 나라를 걸머지고 갈 건양들인데 단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하는 소리로 매천의 고귀한 정신을 알아듣지 못하게 한다면 되겠는가?

  

 

▲구례 매천사에서 황현 선생 100주기 추모식을 지내는 구례 유림들

 

 

鳥獸哀鳴海岳嚬 조수애명해악빈

槿花世界易沈淪 근화세계이침륜

秋燈奄券懷千古 추등엄권회천고

難作人間識字人 난작인간식자인

 

조수도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오.

무궁화 이 세계는 망하고 말았구려.

가을 등불 아래 책을 덮고 지난 역사 헤아리니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되기 어렵기도 합니다.

-황현, 매천야록/임형택 옮김

 

매천은 1910년 음력 8월 5일, 한일 합병령이 군아(구례군청)에서 민간에 반포되자, 바로 그 날 밤에 아편을 먹고 이튿날 숨을 거두었다. 국가와 운명을 같이하여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 매천은 죽기 전에 따로 유언을 남겼다.

 

"나는 죽어야 할 의리는 없다. 다만 국가가 선비를 기른 지 5백년인데 나라가 망하는 날 몸을 바친 자가 한 명도 없다면 어찌 통석한 일이 아니랴! 나는 위로 하늘의 병이(秉彛)의 아름다움과 아래로 평소 읽은 책의 의미를 저버릴 수 없다. 눈을 감고 영영 잠들면 참으로 쾌할 것이다."

 

그가 결행한 살신성인은 관념적 충(忠)이 아니라, '글을 아는 사람', 즉 선비의 양심과 자각이며, 근대적 지식인의 뼈아픈 각성이었다. 지식인으로서 자세를 지키는 것이 그가 자결을 선택한 이유였다. 지금처럼 나라가 어지럽고 시끄러울 때 매천이 남긴 정신을 우리는 뼈아픈 교훈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2010.9.10 매천 선생이 기거했던 구례 간전면 만수마을에서 )

 

 

 매천추모비

 사당으로 들어가는 성인문

 성인문에 서 있는 유림들

 

  철모르게 동원된 학생들

 초헌관 서기동 구례군수(좌 2번째), 아헌관 강춘석 순천보은지청장(좌3번째)

 추모제에 갓쓰고 도포를 입은 구례향교 유림들

 추모제를 지내는 구례군수 등

 헌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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