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일기장과 10년 블로그
지리산에 살면서 내게 한 가지 확실하게 변화가 온 것이 있다. 그것은 새벽에 일직 일어나는 것이다. 일직 잠을 자나 늦게 잠을 자나 새벽 3시에서 4시 사이에 저절로 눈이 떠진다.
처음 지리산에 이사를 해서는 안 해보던 육체노동을 하게 되니 저녁을 먹고 나면 금방 졸음이 왔다. 일직 잠을 자니 일직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 또한 늦게까지 잠을 잘 수도 없다. 아침 6시만 되면 이장님이 마이크에 대고 "주민 여러분 안녕히 무주셨습니까? 오늘은……"로 시작하는 공지사항을 귀 창이 떨어져 나가도록 방송을 해대기 때문이다.
더구나 수평리 우리 집은 바로 마을회관 옆에 있어 확성기 소리가 엄청 크게 들린다. 우리 집에 와서 잠을 자본 사람은 다들 한 마디씩 한다. "찰라님 늦잠자기는 다 틀렸군요." 또 언젠가는 캐나다에서 온 줄리안과 사만타가 우리 집에서 하루 밤을 묵은 적이 있었는데 이장님의 마이크 소리가 하도 크게 들려서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고는 "Mr Choi, What's the matter with this village?" 하고 물은 적도 있다.
어쨌든 수평리에 살면서부터는 새벽에 일직 일어나는 새벽 형 인간으로 습관이 몸에 배어 버렸다. 하기야 부지런한 시골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새벽 형이다. 새벽에 일어나면 잠시 명상을 하고 동이 틀 때까지 책을 읽거나 블로그에 글을 쓴다. 새벽에 1시간은 낮의 몇 시간보다 길게 느껴지고 집중이 잘된다. 말하자면 <시간의 부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날이 밝아지면 수평리 들로 산책을 나가곤 했다.
내가 아침에 글을 쓰는 것은 블로그를 시작하면서부터 거의 습관처럼 되어 있다. 블로그에 글을 쓰는 특별한 목적은 없다. 그냥 취미로 글을 쓸 뿐이다. 컴퓨터가 있기 전에는 노트나 일기장에 글을 썼다. 초등학교 때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한 나는 일기를 쓰는 것이 거의 습관처럼 되어 버렸다.
1991년도에는 어떤 지인이 나에게 <10년 일기장>이란 노트를 한권 선물을 한 적이 있었다. 그 때는 "뭐 이런 선물도 다 있나? 나보다 10년 동안 일기를 쓰란 말인가?"란 생각을 했었는데 덕분에 나는 10년 동안 일기를 쓰게 되었다. 안 쓰는 날도 많았지만 메모 식으로 쓰는 10년 일기장은 나에게 많은 기억과 추억을 되살리게 하였다.
육필로 쓰는 일기장은 <DAUM>에 칼럼을 개설했던 1998년부터 중단이 되었다. 일기장 대신 인터넷에 <아내와 함께 떠난 세계일주>란 타이틀로 글을 올리기 시작했다. 다음 칼럼은 대부분 아내가 난치병을 앓기 시작하면서 함께 배낭여행을 다녔던 여행기를 기록한 것이다.
2003년부터 <칼럼>이 <블로그>로 변경되면서 그 블로그를 지금까지 쓰고 있다. 그래서 지금도 블로그를 돌아보면 10년이 넘은 오래된 내용들이 나온다. 블로그는 사진을 생생하게 업로드를 할 수가 있어 손으로 쓴 일기장보다는 기능면에서 뛰어나다. 글과 사진을 보게 되니 시각적인 효과가 큰 것이다.
그러나 손으로 쓰는 일기장은 여전히 매력이 있다. 법정스님께서는 열반에 드시기 전까지 펜으로 원고를 썼으며, 조정래 작가나, 고은 시인, 최인호 작가도 여전히 펜으로 글을 쓰고 있다.
펜으로 글을 쓰는 것은 자판으로 타자를 찍어 쓸 때보다 생각을 더 많이 하게 되다. 비록 일기장에 사진을 올릴 수는 없지만 내용이 더 충실하다는 것이다. 사진을 올리게 되면 글을 쓰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이나 아무래도 사진만 한 번 쓱 보고 글을 읽지않는 버릇이 생기게 되고 내용에 충실을 기하기 보다는 전시적인 효과에 치중을 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내년부터는 10년 일기장을 한권 사서 다시 육필로 일기를 써볼까 하는 생각도 있다. 우리 큰 형님은 6.25 한국전쟁 당시 16세에 군대에 끌려가 5년 동안 최전방 전선에서 군대 생활을 하면서 <전선일기>를 쓰기도 했다. 전투 중에 잠시 짬을 내어 메모지에 쓴 일기장을 읽다 보면 지금도 눈물이 얼룩진다. 아무튼 일기를 쓰는 것은 그날 한 일을 참회하는 의미에서 아주 좋은 습관이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