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강변으로 산책을 하러 나가는데 아랫집 이 선생님 부부가 텃밭에서 일을 하다가 어디를 가느냐고 불렀습니다. 임진강에 산책을 하러 간다고 했더니 산책 다녀오는 길에 들러서 야채 좀 뜯어가라고 했습니다.
“아, 그래요. 산책 갔다가 오는 길에 들리겠습니다.”
이 선생님 댁에는 비닐하우스가 꽤 넓은 게 있어서 그 하우스에 여러 가지 채소를 재배하고 있습니다. 하우스가 없는 우리 집 텃밭은 로지에만 야채를 기르기 때문에 채소가 자라나는 속도가 매우 느릴 수밖에 없지요. 이틀 전에 한 번 상추를 뜯어 먹긴 했는데, 다시 뜯어먹으려면 며칠을 기다려야만 합니다.
▲임진강 산책길
지난주에도 열무, 시금치, 아욱 등을 잔뜩 뜯어와 무쳐 먹었는데 또 뜯어가라고 하니 다소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그래도 마음만은 매우 훈훈하군요. 이렇게 38선 이북 오지에 좋은 이웃을 두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줄 모르겠습니다.
민통선 가까이에 위치한 이곳은 이웃이라고 해 보아야 윗집 장 선생님과 아랫집 이 선생님, 그리고 1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이장님 댁과 현이 할머니 집이 있을 뿐 사람구경하기가 매우 힘든 곳입니다. 더구나 윗집과 아래 집은 주말에나 한 번씩 들리므로 주중에는 우리 집에 저와 아내만 있을 뿐이어서 일주일 내내 자동차나 사람구경하기가 힘든 적막강산입니다.
▲매일 조우를 하는 유일한 친구 노랑 길고양이
그래도 때로는 들고양이가 어슬렁어슬렁 다녀가고, 까치와 박새, 꿩들이 노래를 들려주곤 합니다. 고라니부부도 가끔 내려와 이장님 밭을 질주하며 뛰어놀다가 가기도 합니다.
오늘도 노랑 길고양이 친구가 슬금슬금 내려와 내가 준 생선 머리를 맛있게 먹어치우고 있습니다. 저 녀석은 내가 이곳 오지에서 매일 만나는 유일한 친구이기도 하지요. 녀석은 나를 심심치 않게 해주는 친구입니다.
▲지천에 피어있는 애기똥풀의 미소
임진강변 산책길로 접어드니 노란 애기똥풀 꽃이 지천에 피어 있습니다. 바람에 일렁이는 노란꽃잎들이 귀엽기만 합니다. 아무도 없는 강변엔 새들이 날고 야생화들이 미소를 짓습니다.
임진강변 산책길은 내 마음의 유일한 휴식처이기도 하지요. 산책길에서 돌아와 아내에게 아랫집에서 야채를 뜯어가라 한다고 했더니, 아내가 미안한 표정을 짓네요.
“여보, 만날 얻어먹기만 해서 어떻게 해요.”
“글쎄, 허지만 우린 딱히 줄 것이 없질 않소?”
“부추전이나 좀 붙여서 줄까요?”
“그것 참 좋은 생각이요.”
텃밭에 나가 부추를 잘라오자 아내는 부추를 정성스럽게 다듬고, 거기에다 버섯, 파, 새우 등을 밀가루에 반죽을 해서 부추전을 붙이기 시작했습니다. 드디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부추전이 완성되자 아내는 부추전을 접시에 넣고 은박지로 포장을 해서 날더러 전해주라고 내밀었습니다.
▲부추전
아내는 무릎이 좋질 않아 잘 걷지를 못합니다. 그러니 내가 전해줄 수밖에 없지요. 아내 말을 잘 듣는 팔불출 남편이기도 하지만... 뜨끈뜨끈한 부추전 접시를 들고 아랫집으로 가는데 어쩐지 기분이 훈훈해지는군요. 대문을 두들기니 사모님이 문을 열고 나왔습니다.
“이거 부추전인데 좀 드셔 보세요. 아직 뜨끈뜨끈합니다.”
“아니, 뭘 이렇게 가져오셨어요. 들어와서 차 한 잔 하고 가세요.”
“아닙니다. 저 지금 고구마 순 사러가야 합니다. 다음에 또 들리지요.”
“아, 그러세요. 잘 먹을 게요.”
저희 집에서 진상면 종묘상까지는 승용차로 10여분 정도 걸립니다. 부추전을 전해주고 진상면에 가서 고구마 순을 사왔습니다. 뿌리를 내리기 위해 고구마 순을 땅에 묻고 있는데 현이 할머니가 손에 뭘 들고 잰걸음으로 오셨습니다.
“순두부 좀 만들었는데요. 따끈따끈해요. 식기 전에 드세요.”
“아니, 웬 순두부를 가져오셨어요? 좀 들어오셔서 차 한 잔 하고 가세요?”
“아니요. 지금 바빠요. 저녁 준비해야 하거든요.”
“아이고, 바쁘신데… 잘 먹을 게요.”
▲현이 할머니가 가져온 따끈따끈한 순두부
현이 할머니는 다시 잰 걸음으로 내려가셨습니다. 정말 농사철에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데 언덕길을 100여 미터나 걸어서 순두부 한 모를 가져오신 현이 할머님의 정성이 참으로 고맙기만 합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두부를 숟가락으로 떠서 한 잎 먹어보니 맛이 그만입니다.
현이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조금 있으니 아랫 집에서 이 선생 사모님이 부추전 접시를 가져오면서 상추와 얼갈이, 아욱, 시금치 등을 잔뜩 가져왔군요.
"아니, 내일 아침에 뜯으러 갈려고 했는데..."
"네, 야채를 솎아내면서 좀 가져왔어요. 내일 아침에 일직 서울로 떠나거든요."
"아이고, 이거 미안해서 어떡하지요?"
"별 말씀을요. 우리가 먹고도 남는 것이니 나누어 먹어야지요."
"감사합니다. 잘 먹을 게요."
▲아랫집에 가져온 얼갈이와 상추
이웃끼리 정을 나누며 사는 것이야말로 오롯한 행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은 따끈따끈한 부추전과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순두부 한 모, 이것으로 충분한 하루입니다.몇 해 전 지구상에서 국가 행복지수가 가장 높다는 부탄에 갔을 때 가이드 쉐리의 말이 떠오릅니다.
"우리 부탄 사람들은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고 점점 더 많은 것을 바라기보다는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만족해 하며 살아갑니다. 이웃을 서로 신뢰하기 때문에 만일 내가 도움이 필요하다면 이웃에서 반드시 누군가가 도와 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지요."
부탄 사람들은 오랫동안 서로 돕고 사랑하는 공동체 정신이 있기 때문에 어려울 때 서로가 의지가 되어 외롭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슬플 때 같이 울어주고, 기쁨 때 함께 기쁨을 나누는 이웃간의 나눔 정신이 있기 때문에 가난하지만 행복하게 살아 갈 수 있다고 합니다.
자신의 생활에 '좀더, 좀더'하고 욕심을 내면 차츰 주위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게 되고, 자신만의 만족을 추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를 부탄 사람들은 고독으로 향하는 지름길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이웃과 교류하며 원만한 인간관계를 유지하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요즈음처럼 나라 전체가 슬픔에 빠져 있을 때는 함께 울어주고 따뜻한 말 한마디로 위로해주는 마음이 절실히 필요 한 것 같습니다. 슬플 때 함께 울어주며 슬픔으 강을 건너고, 기쁠 때 함께 기뻐해주는 이웃이 있는 것이야말로 외롭지 않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