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방랑/108일간의세계일주

[러시아11] 돌아온 탕아

찰라777 2005. 3. 22. 06:32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아'
 


-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아'. 러시아 에르미타주 국립미술관

 

나는 지금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아’ 앞에 서 있습니다.
이 그림 앞에 서 있는 나는 세상에서 가장 몹쓸 ‘돌아온 탕아’입니다. 전생과 금생을 살아오면서 얼마나 많은 과업을 지어온 ‘나’입니까? 북방의 은신처 에르미타주에 걸려 있는 이 명작 앞에서 나는 과거 생에 지어 온 수많은 내 과보를 참회하고 있습니다. 렘브란트의 그림 한 장이 이처럼 비수가 되어 참회의 화살을 던져 줄줄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나는 이미 이 여행의 시발점인 암스테르담의 국립미술관에서 ‘빛의 화가’인 렘브란트의 ‘야경’을 감상한바 있습니다(칼럼번호 14번). 빛과 어둠을 절묘하게 조화시킨 야경은 아시다시피 암스테르담 시민군들의 주문에 의하여 그려진 명작입니다.

그런데 북방의 동토, 러시아에서 다시 렘브란트의 명작 ‘돌아온 탕아’ 앞에 서 있으니 그 감회가 새롭군요. 또한 그의 명작을 그의 고향인 네덜란드나 활동무대였던 파리에서가 아니고 동토의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황제들의 ‘은신처’라고 불리는 에르미타주에서 대하고 있자니 묘한 생각도 듭니다.

구름이 잔뜩 끼어 회색빛으로 빛이 바랜 하늘, 그 하늘 아래 우우 불어대는 바람의 성화에 못 이겨 출렁거리는 네바 강의 물결, 그 네바 강 변에 황홀한 자태로 서 있는 황제들의 은신처 에르미타주 박물관에서 바라보는 ‘돌아온 탕아’… 이 그림은 두고두고 내가 이번 여행 중에서 만난 것 중에서도 나만의 보석 상자에 담아온 가장 귀한 존재입니다.

 

렘브란트는 말년에 고독과 곤궁 속의 세월을 보내며 이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의 사랑하는 첫 아내 사스키아가 죽고 난후, 그의 생활을 돌봐주던 아들 티투스마저 세상을 떠나자 그는 결정적인 파산에 직면하게 됩니다. 젊은 시절의 명성과 재산은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리고 그에게 남은 것은 가난과 고독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인간에 대한 깊은 성찰과 더불어 예술세계의 영혼은 한없이 깊어져만 갔습니다. 그는 깊은 고뇌 속에 성서를 부제로 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빛과 어둠의 화답게 어둠 속에서 등장인물이 서서히 그리고 부드럽게 부각 되어 나오게 합니다.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아'는 아버지 앞에 조용히 무릎을 꿇고 머리는 아버지의 가슴에 안기고 있습니다. 집을 나설 때는 화려했을 옷은 걸레처럼 낡아 빛이 바래져 있고, 신발은 헤지다 못해 뒤창이 떨어져 나가 있습니다.

그러나 돌아온 아들을 맞이하는 아버지의 표정은 담담하기만 합니다. 아들을 기다리다 눈이 멀어버린 듯 더듬더듬 아들의 어깨를 어루만지고 있을 뿐. 아버지의 품에 안긴 아들은 참회의 눈물이라도 흘리는 듯 어깨가 들썩거리는 느낌을 받습니다.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아’는 아버지에게서 받은 유산을 가지고 집을 나가 객지의 사창가로 떠돌며 몽땅 탕진하고, 일약 알거지 신세가 되어 돼지먹이로 끼니를 연명하며 고향으로 돌아와 아버지의 용서와 환대를 받는다는 ‘누가복음 15장’의 이야기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렘브란트는 성서의 장면처럼 좋은 옷을 입히고, 손 가락지를 끼워주고, 새 신을 신겨주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춤과 풍류를 즐기는 요란한 모습을 가미 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거지같은 옷, 죄수처럼 박박 깍은 머리, 헤진 신발로 돌아와 무릎을 꿇고 사죄하는 아들을 조용히 포옹해주는 극적인 순간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가 말년에 인간의 심리적인 통찰과 고통에 대한 깊은 이해, 그리고 한없는 애정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는 성서의 의미를 통해 돌아온 탕아가 되기도 하고, 그 탕아를 용서로 포옹해주는 아버지가 되고도 싶었을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 ‘용서’와 ‘화해’ 속의 한 장면이 드라마틱하게 펼쳐져 있는 극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참회, 참회, 참회… 누구나 일생에 한번쯤은 진한 참회의 눈물을 흘려보고 싶겠지요?

지나 온 삶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죄업을 무한대로 받아주는 넓은 가슴속에 안겨 진하게 눈물을 흘려보고 싶겠지요? 아들이, 딸이 흘리는 참회의 눈물을 한 마디의 물음도 없이 조용히 용서의 포옹으로 받아주는 아버지가 되고 싶어지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아버지에 비해 그 옆에 서서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는 형은 방탕한 동생을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절대적인 용서에 비해 한 개의 촌수가 벌어진 형은 보다 비평적인 시선으로 동생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겠지요. 이것이 또한 부모와 형제의 차이가 아니겠습니까?

내가 앞으로 살아갈 날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지만, 이 한 장의 그림을 통해서 보다 더 많은 용서와 화해, 그리고 참회하면서 보내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만 다가옵니다. 내 지나온 과거를 참회하고 많은 사람들과 사랑과 자비로 재회의 기쁨을 나누고 싶은 그런 마음 말입니다.

이 순간에도 나는 나에게 주어진 세상의 소중한 시간과 에너지를 탕진하고,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생명들을 소홀히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닌지…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아’를 회상할 때마다 반성의 화살이 내 마음을 향해 날아오고 있습니다. -chall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