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우리강산/경상도

[봉정사]엘리자베스 여왕이 다녀간 절

찰라777 2009. 11. 19. 21:34

 

엘리자베스 여왕도 고개를 숙이고 들어간 천년고찰 

  

 국화향기그윽한 봉정사

 

▲국화향기 그윽한 천년고찰 봉정사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국화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국화향기는 천년고찰과 잘 어울린다. "신의 품으로"란 의미가 담긴 국화는 신에게 바치는 꽃 중의 꽃이다. 때마침 "국화꽃 대향연"축제가 벌어지고 있는 봉정사 입구에는 노란 국화가 진한 향기를 내뿜고 있다.

 

노란 산국의 향기는 국화 중에서도 가장 향기가 진하다. 국화향기를 맡으며 숲길을 걷다보니 일주문이 나온다. 천등산봉정사(天燈山鳳停寺)란 현판이 무척 오래되어 보인다. 일주문 기와지붕에는 낙엽이 쌓여있고, 나무기둥은 칠이 벗겨져 허름하게 보인다. 한 마디로 오래된 절이라는 것을 직감케 한다. 오래된 것을 보면 어쩐지 마음이 편해진다.

 

▲일주문에 걸린 현판. 오래된 현판과 닳아진 글씨가 오히려 마음을 편하게 한다.

 

천등산(天燈山). 글자 그대로 하늘에서 등이 내려왔다는 의미가 아닌가. 천등산은 안동의 진산(鎭山)으로 옛적부터 대망산이라 불렀다. 절 뒷산에는 거무스름한 바위가 산정을 누르고 있는데, 그 바위 밑에 천등굴이 있다. 이 천등굴은 봉정사의 창건주인 능인(能仁)의 수행 처다. 봉정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천등굴에 얽힌 이야기 한 토막을 듣고 넘어가야한다.

 

신라시대 능인(能仁)은 소년시절부터 불문에 들어와 하루에 한 끼 생식을 하며 도를 닦았다. 그렇게 10년을 줄곧 도를 닦기에 여념이 없던 어느 날 밤 홀연히 아리따운 한 여인이 나타났다.

 

"소녀는 낭군님의 지고하신 덕을 사모하여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낭군님과 함께 살아간다면 여한이 없을 것 같사옵니다. 부디 낭군님을 모시게 하여 주옵소서."

 

여인의 음성은 능인의 가슴을 흔드는 이상한 힘이 있었다. 옥을 굴리는 듯 낭랑한 목소리였다. 능인이 미처 고개를 들기도 전에 부드러운 여인의 손길이 능인의 손을 슬며시 잡질 않는가! 능인이 눈을 들어 바라보니 반듯한 이마와 까만 눈동자, 오뚝한 콧날, 그리고 지혜와 정열이 샘솟는 여인의 아름다운 자태는 능인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 했다. 그러나 능인은 10년 동안 애써 쌓아온 수행을 허물 수 없어 준엄하게 여인을 꾸짖으며 유혹을 물리쳤다. 도를 닦은 능인은 이미 평범한 중생이 아니었다.

 

▲봉황이 날아와 터를 잡았다는 봉정사. 꾸미지 않는 모습이 오히려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스님은 참으로 훌륭하십니다. 나는 옥황상제의 명으로 당신의 뜻을 시험코자 하였습니다. 이제 스님의 깊은 뜻을 알았으니 부디 깨달음을 이루시길 빕니다. 굴이 너무 어두워 보이니 스님의 수행에 도움이 되도록 옥황상제의 등불을 남기고 떠납니다. 그 불빛으로 더욱 깊은 도를 닦으시길 바랍니다."

 

선녀가 말을 마치자 곧 바위 위에 커다란 등이 놓여졌고, 굴 안이 대낮처럼 환하게 밝아졌다. 그 후부터 동굴 이름을 천등굴, 산 이름은 천등산으로 바꿔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능인은 천등굴에서 수행을 마친 뒤 법등을 밝힐 절을 짓기로 했다.

 

능인스님이 종이로 봉황을 접어 날려 보냈더니 봉황은 학가산을 거쳐 지금의 봉정사 절터로 날아가 앉았다. 스님은 그 자리가 명당 터임을 알고 마침내 가람을 세우고(672년), 봉황이 머물렀다 하여 봉정사(鳳停寺)라 명명하였다.

 

설화는 하나의 허구다. 그러나 모든 설화는 그럴듯한 내용을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 절에는 첫머리에 "봉(鳳)"자를 붙인 절이 많다. 봉황이 머무른 곳도 어찌 그리 많은가? 문경 봉암사(鳳巖寺)가 그렇고, 설악산 봉정암(鳳停寺)이 그렇다.

 

결과부좌를 하고 있는 오래된 소나무

 

(▲사진: 만세루로 올라가는 입구에 결과부좌를 하고 있는 듯한 소나무. 중생의 고통을 모두 안고 있는 듯 얼기설기 헝클어진 나뭇가지가 복잡하게 얽혀있다.)

 

일주문을 지나면 산길 좌우로 해묵은 고목들이 하늘높이 치솟아 있다. 대부분 참나무 들이다. 나무 중에서도 참나무는 단단하고 탄력이 있어 철도 침목으로 쓰이고, 숯 중에서도 참나무 숯을 최고로 친다. 그래서 참나무는 진목(眞木)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참나무 숲길을 벗어나니 하늘이 열리고 제법 넓은 분지가 나온다. 과연 봉황이 머물렀을 법한 아담한 자리다. 경내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소나무 한 그루가 45도로 기우러진 채 받침대를 받고 서있다. 받침대 아래서 올려다보니 중간에 야무지게 결과부좌(結跏趺坐)를 한 듯 마름모꼴로 뒤틀려 있다.

  

그 마름모꼴 위로는 잔가지가 여러 갈래로 뒤엉키며 헝클어진 여인의 산발한 머리처럼 하늘로 산발한 채 뻗어 있다. 봉정사로 들어오는 중생들의 고통을 모두 떠안고 있기라도 하겠다는 것일까? 번뇌무진서원단(煩惱無盡誓願斷)! 중생이여, 번뇌가 있거든 결과부좌를 하고 묵언(默言)하시오. 그러면 그대의 마음이 공(空)이 되고 번뇌가 사라지리라. 소나무는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절제된 검소함이 돋보이는 천년고찰

  

▲엘리자베스여왕도 고개를 숙이고 들어갔던 만세루. 우물마루 바닥이 정감을 더해주고 있다.

 

결과부좌 소나무를 지나면 곧바로 가파른 계단이 이어진다. 자연석으로 쌓은 천연 돌계단은 질서가 없는 것 같으면서도 무언가 가닥이 잡혀있다. 제법 긴 돌계단에 올라서면 만세루가 나온다. 만세루를 지나가려면 누구나 좁고 낮은 누마루 아래로 고개를 숙여야 대웅전 안마당으로 들어갈 수 있다. 낮은 문과 돌계단은 중생에게 겸수익(謙受益)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성역으로 들어가는 자들이여, 겸손 하라.  

 

▲만세루의 현판과 고색창연한 나무 서까래가 리듬감을 준다  

 

만세루는 1999년 4월, 이곳을 방문한 영국의 여왕 엘리자베스 2세도 고개를 숙이고 들어갔던 문이다. 여왕은 어찌하여 이 산골의 해묵은 고찰을 찾았을까? 10년 전의 일이지만 우리는 그 의미를 깊이 되새겨 보아야 한다. 만세루의 좁고 낮은 문을 지나면 깔끔한 마당이 나오고 국보 제311호의 대웅전을 중심으로 화엄강당과 고금당이 "▣"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단정하고 고풍스러운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가람이다.

 

검소하면서도 절제된 아름다움을 주는 대웅전

 

대웅전 앞마당에는 일체의 석탑이나 석등도 보이지 않는다. 잡초 하나 없는 마당과 반듯한 돌계단, 창호지 문틀 등이 더욱 단순해 보인다. 검소하고 절제된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절집이다. 평면의 안정감은 사람의 마음을 한층 편하게 해준다. 그러면서도 감히 범접을 할 수 없는 위엄을 갖추고 있다.

 

   ▲여왕이 "참 아름다운 사찰"이라고 극찬했던 봉정사 대웅전. 웅장한 기와지붕 밑에 하얀

      문창살이 특이하다. 검소하면서도 절제된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엄숙한 절집이다.

 

봉정사에 도착한 여왕은 당시 봉정사 주지 문인스님과 총무 성묵스님의 영접을 받으며 만세루를 지나 대웅전 경내로 들어섰다. 그리고 대웅전 앞에서 두 손을 다소곳이 모은 채 불상과 탱화 등을 살펴 본 뒤 "참 아름다운 사찰'이라며 감탄했다. 무엇이 여왕을 그토록 감탄하게 만들었을까? 그것은 오래된 아름다움일 것이다.

 

두 손을 모아 부처님 전에 합장을 했을 여왕의 마음을 상상해 본다. 꾸미지 않는 아름다움을 보고 마음이 편안했으리라. 여왕은 종교를 초월하여 옛 것을 귀하게 여기고 숭상하는 겸손한 아름다움을 가진 여인이다. 대웅전에 툇마루가 있는 것도 특이하다. 때마침 스님이 사시 예불을 드리기 위해 툇마루를 걸어가고 있다.

  

▲대웅전에 툇마루가 있는 것도 특이하다. 스님이 단정한 옷차림으로 사시 예불을

드리기 위해 툇마루를 걸어가고 있다.

 

대웅전의 삼면에는 네모로 각 지게 만든 문창살이 한층 단정한 맛을 나타내고 있다. 하얀 창호지를 바른 문틀이 웅장한 대웅전의 지붕을 받치고 있는 모습은 뭐라 표현할 수없는 고풍스러운 아름다움을 풍겨주고 있다. 문지방을 조용히 열고 들어가 삼배의 예를 올린다. 오래된 향기를 풍겨주는 마룻바닥에 엎디어 절을 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진다.

 

"절"은 불상에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 즉 자신의 "불성"에 대고 절을 하는 것이다. 불상은 상징일 뿐, 부처는 자신의 마음 안에 있다. 자신의 마음에 절을 하면서 세속에서 낀 마음의 때를 벗겨내어 공(空)의 상태로 가고자 하는 것이 절이다.

 

"오래된 하나의 나무 조각 같다"고 극란전을 평한 여왕은

기와 장을 사인을 하여 봉정사에 시주를 했다

 

대웅전 좌측으로 발길을 옮기면 곧 바로 극락전으로 이어진다. 극락전은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목조 건물 중 가장 오래된 집이다. 건물은 대웅전보다 더 단순하게 보인다. 곡선으로 배흘림을 한 기둥으로 받쳐진 극락전은 단순하면서도 단단한 아름다움을 풍겨준다. 낮은 지붕은 안정감을 더해준다. 문이 많은 대웅전과는 달리 극락전은 작은 문창살 두 개가 간단하게 양 옆에 나 있어 매우 야무지게 보인다.

 

 

 ▲간결한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극락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이다.

 

여왕은 대웅전에서 극락전으로 천천히 발길을 옮겼다. 여왕은 성묵스님으로부터 극락전에 대한 설명을 듣고는 "오래된 하나의 거대한 나무 조각 같다"며 큰 관심을 보였다. 그리고 여왕은 돌멩이 하나를 주워 근처에 있는 돌탑에 올려 놀은 뒤 "돌탑을 쌓았으니 복을 많이 받겠다."고 말해 주위사람들을 웃기기도 하였다. 참으로 겸손한 여왕의 자세다.

  

여왕은 봉정사에서 마련한 방명록에 "조용한 산사 봉정사에서 한국의 봄을 맞다"라고 쓰고 서명을 했다. 그리고 이어서 기와 한 장에 자신의 영문 서명을 하여 시주를 했다. 여왕이 "기와 한 장"을 천년고찰에 시주를 한 것은 아마 전 세계에서 전무후무 할 것이다.

 

그리고 여왕은 문인스님으로부터 "일념만년거(一念萬年去:좋은 생각 한번이 만년을 간다)"라고 쓰인 족자를 선물 받았다. 족자를 받은 여왕은 한 번 더 절 앞으로 펼쳐진 산보우리를 감상하며, 족자의 글귀처럼 좋은 생각, 좋은 느낌을 가지고 봉정사를 떠났다.(▲사진:기와 한 장을 들어 서명을 하고 봉정사에 시주를 하는 여왕. 사진제공-부다피아)

 

여왕 방문의 흔적과 효과

  

삼층석탑 앞에서 고색창연한 극락전을 바라보며 나는 여왕의 그림자를 다시 느껴본다. 여왕은 자신의 73회 생신을 안동 땅에서 맞이했다. 왜 안동을 선택했을까? 안동은 우리의 전통문화가 숨 쉬는 곳이다. 혹자는 안동을 한국정신문화의 수도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에서 전통문화를 고집스럽게 끝까지 고수한 가장 한국적인 풍경을 지닌 곳이 안동 땅이다.  

(▲사진 : 봉정사를 방문한 엘리자베스 여왕이 법고를 치는 모습을 보고 있다. 사진제공-부다피아)

 

안동은 유교문화의 원형을 고스란히 간직한 추로지향(鄒魯之鄕)의 고장이다. 이는 공자가 태어난 노(魯) 나라, 맹자가 태어난 추(鄒)나라와 같은 정신적인 고장이란 뜻이다. 일제 강점기에도 뿌리 채 흔들리는 전통문화를 온 몸으로 지켜온 고장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 맥은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이런 무너지지 않는 전통문화를 체험하고자 여왕은 안동까지 왔을 것이다.

 

 

▲극란전에서 바라본 3층 석탑과 간결한 마당. 수수하면서도 고풍스런 멋을 풍긴다.

 

여왕은 하회마을을 방문하여 서예 류성룡의 종가인 충효당에서 갓을 쓰고 도포를 차려입은 종손 류영하 씨의 영접을 받았다. 거릿마당에 우리나라 고유의 구상나무 한 그루를 기념식수하고, 안마당에서 종부 최소희(70) 씨가 김치와 고추장을 담그는 것을 구경한 후, 종부 박필순(83) 할머니로부터 전통 다과상을 받았다. 여왕은 모두가 인간문화재와 같은 노인들로부터 한국 고유 전통에 따라 영접을 받았다.

 

여기서 여왕이 방으로 들어가면서 한 가지 해프닝이 일어났다. 여왕은 영국식으로 신발을 신은 채 방으로 들어가려다가 주위에서 한국에서는 신발을 벗고 방에 들어간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 말을 들은 여왕은 다시 신발을 벗고 웃으며 방으로 들어갔다. 멋진 장면이다. 문화가 다르면 누구나 실수를 하는 법이다. 그러나 곧 이를 인정하고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여왕의 겸손함은 참 아름다운 장면이다.

  

충효당에서 나온 여왕은 텃밭에서 소로 밭을 가는 모습을 잠시 구경하고 담연재에서 하회별신굿탈놀이 중 선비마당을 시종 미소를 띤 채 관람했다. 탈놀이가 끝난 뒤 여왕은 안동 소주 기능 보유자인 조옥화(78, 인간문화재 12호) 씨가 장만한 생일상을 자신과 생일이 같은 주민 5명과 함께 받고 함께 축배를 들었다.

 

푸짐한 생일상에 놀란 여왕은 "베리 굿!"과 "원더풀!"을 연발했다. 담연재에서 생일잔치를 마친 여왕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이 있는 이곳 봉정사를 방문했다. (▲사진:푸짐한 한국전통 생일상을 받은 여왕의 축배. 사진제공-부다피아)

 

한국 전통문화에 따라 치러지는 여왕의 73회 생일잔치는 매체의 힘을 통해 전 세계에 타전되었다. 세상 사람들은 한국의 시골 안동 땅에서 치러진 여왕의 생일잔치를 보고 모두가 행복한 미소를 지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있다. 바로 여왕의 생일잔치를 통해 "한국의 미와 전통"이 전 세계에 알려진 것이다. 사람들은 그 멋진 장면을 보고 기회가 주어진다면 누구나 그런 멋진 곳에 한번 가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여왕의 방문이후 실제로 안동 땅에는 외국인 관광객이 3~4배 정도 늘어나고 있다. 안동 땅을 방문한 사람들은 마치 자신이 여왕이라도 된 듯 행복한 마음이 될 것이다. 여행자가 봉정사를 둘러보고 있을 때에도 마침 프랑스에서 왔다는 두 젊은 커플이 봉정사를 둘러보고 있었다. 그들은 여왕이 방문한 곳을 보고 싶어 멀리서 여기까지 왔다고 했다. 새삼 지나간 여왕의 스토리를 상기 시킨 것은 여행자 스스로가 이 기사를 쓰면서 행복하기 때문이다.

 

"여왕 특수"를 톡톡히 누리고 있는 안동 

 

▲서까래를 받치고 있는 공포(拱包). 단청을 하지 않는 모습이 오히려 순수하고 아름답다.

 

안동은 1999년 여왕이 다녀간 지 10년을 맞이하고 있다. 이제 여왕은 83세의 고령이 되었다. 그리고 여왕을 영접했던 사람들도 모두가 10년이란 나이를 더 먹었을 것이다. 그러나 천년고찰 봉정사는 그 때 그대로 있다. 추억은 영원하다. 방문을 했던 여왕도 영접을 했던 사람들도 가슴 한켠에는 아름다운 추억이 고이 간직되어 있을 것이다. 또한 영국여왕의 안동방문 10년의 경제효과는 놀랍다. 이른바 '여왕 특수'를 톡톡히 누리고 있는 것이다.

 

우선 하회마을을 보자. 1994년부터 1998년까지 하회마을을 찾는 관광객은 한 해 30만 명 수준에 외국인은 고작 4천명 안팎이었다. 그러나 여왕이 다녀간 1999년에는 평년보다 무려 3배가 넘는 110만 명이 넘어섰고, 외국인 관광객도 1만 5천명으로 늘어났다. 이후 하회마을은 매년 국내외 관광객 100만 명 시대를 구가하고 있다. 인근 도산서원과 봉정사 등 안동의 다른 지역도 덩달아 몇 배의 관광객이 늘고 있다.

  

 하회마을 별신굿탈놀이의 한 장면. 여왕방문의 경제효과는 크다. 하회마을은 매년 100명의 관광객이 찾아오고, 외국인 관광객도 전보다 3~4배로 늘어났다. 모두가 한국 전통문화를 고수해온 안동지방 사람들의 힘이다.

 

오래된 우리의 전통문화 유적은 목숨 걸고 사수해야

 

이는 모두 전통문화를 고수하고 지켜온 안동지방 사람들의 힘이다. 세계 어디를 가 보아도 현대식 거리에는 관광객이 별로 없다. 도시 전체가 고대박물관을 유지하고 있는 로마, 5천년이 역사를 간직한 기자 피라미드, 잉카문명의 메카 페루의 마추픽추, 중국이 만리장성 등 오래된 유적과 전통문화를 간직한 관광지에는 발 딛을 틈이 없을 정도로 관광객들이 북새통을 이룬다.

 

문화재는 뜯어 고치는 것이 아니고 원형을 그대로 유지할 때에 가치가 있다. 로마의 유적이나 그리스의 유적을 보수하는 사람들은 모두 고고학이나, 고고학 건축을 전공한 박사나 교수, 혹은 그 방면의 장인들이다. 여행자가 두 나라를 방문했을 때 그들은 문화유적의 한 부분을 보수 하는데도 수년간의 고증과 검토를 거쳐 원형 그대로 보존하기 위해 온 힘을 쏟고 있다.

 

▲측면에서 바라본 봉정사. 여왕이 다녀긴 뒤 10년이 지났지만 봉정사는 그 때 그모습 그대로 있다. 

 

우리는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이 왜 산골 오지의 봉정사를 방문했는지를 다시 한 번 곰곰이 되새겨 보아야 한다. 그곳에 현대식 건물이 들어 서 있다면 여왕이 방문을 했겠는가? 여왕은 오래되면서도 천연의 멋을 간직한 한국의 사찰을 방문하기 위해 먼 곳까지 온 것이다. 문화유적이 손실되거나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사라져 버릴 때 그 나라의 관광사업과 미래는 없다. 오래된 문화유적과 전통문화는 목숨을 걸고라도 원형을 최대한 유지하도록 사수를 해야 한다.

 

 

☞맛집 소개안동 간고등어

 

간고등어 한 손이믄

아배 소원 풀어 들이련만

저승길 배고플라요.

소금에 밥이나 많이 묵고 가이소 -박목월-

 

안동 간고등어는 시인의 노래로 불릴 정도로 유명하다. 위의 시는 박목월 시이의 "만술 아비의 축문"에 나오는 내용이다. 40 - 50년 전까지만 해도 간고등어가 우리들의 밥상에 오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복잡한 유통과정이 있었다. 고등어를 잡는 어부에서부터 이것을 각지로 운반하는 우마차꾼과 바지게꾼, 고등어의 배를 따서 다듬는 아지매, 소금간을 하는 사람 등 간고등어를 둘러싼 가공과 유통에는 각 부분의 일을 담당하는 사람들의 땀과 정성이 배어있다.

 

바다와 꽤 떨어져 있는 안동에서, 생선은 무척 귀한 산물이었다. 이동수단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장 가까운 바다인 강구, 축산, 후포 등으로부터 고등어를 가져오자면 통상 1박 2일이 걸렸다. 강구에서 새벽 5 - 6시쯤 출발하면 날이 어두워져서야 황장재 넘어 신촌마을에서 저녁을 먹고 하루 밤을 쉴 수 있었다. 다음날 새벽에 다시 출발하여 진보나 임동면 챗거리에 가서야 고등어를 넘길 수 있었다고 한다.

 

이틀이나 걸리는 이동시간으로 인해 고등어가 상하기 쉽기 때문에 고등어의 장기간 보존을 위해서는 소금이 필수적이었다. 소금간을 하는 것에는 세 가지 방법이 있는데, 먼저 고등어를 잡자마자 즉석에서 배를 따고 간을 하는 형태가 있고, 두 번째로는 포구에 도착하여 간하는 방법, 마지막으로 소비지역까지 운반하여 간을 하는 형태 등이다.

 

이 중 안동간고등어는 세 번째 방법을 택했다. 생선은 본래 상하기 직전에 나오는 효소가 맛을 좋게 하기 때문인데, 영덕에서 임동면 채거리까지 하루가 넘게 걸리며 오다 보면 얼추 상하기 직전이 되며, 이 때 소금간을 하게 되면 가장 맛있는 간고등어가 되었다는 것이다. 어쩌면 안동간고등어의 맛의 비결은 자연 지리적 조건이 안동주민에게 안겨준 선물일지도 모른다(조정현, 실천민속학회 간사의 글을 참조함)

 

안동은 천지가 간고등어 집이다 그러나 안동댐 밑에 있는 안동간고등어 양반밥상집(054-855-9900/http://www.yangban.net 가장 전통이 있고 맛이 깔끔하다. 다양한 간고등어 메뉴를 선보이고 있지만, 양반밥상과 고등어구이가 무난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