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방랑/80일간의티벳일주

스님들이 손뼉치며 싸움질 하나? - 세라사원 스님들의 괴이한 선문답

찰라777 2011. 7. 22. 08:52

 

스님들이 손벽치며 싸움질 하나?

-라싸 세라사원 스님들의 괴이한 선문답

 

 

 

 

 

 

오후 2시, 조캉사원 정문으로 가니 약속한대로 신선생과 하선생이 와 있었다. 아내와 나, 그리고 신 선생, 하부장, 양군 다섯 사람이 택시 두 대를 불러 타고 세라사원으로 향했다. 세라 사원은 조캉사원에서 약 5km에 거리에 위치하고 있어 그리 멀지가 않다.

 

 

 

 

 

세라사원은 티베트 최대의 불교대학이다. 한 때 5000여명의 승려가 거주할 정도로 티베트 승려를 양성하는 스님들의 교육기관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약 300여명정도의 승려가 3개 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 중국의 문화혁명 당시(1959년) 승려들의 숙소와 상원이 거의 파괴된 데다 달라이 라마가 인도로 망명을 갈 때에 상당수의 승려가 함께 망명의 길에 올랐기 때문이다.

 

 

총카파(1357~1419, 티베트 불교 중심세력인 겔룩파 창시자) 제자인 사캬 예쉬가 세운 세라사원은 대법당을 비롯하여 3개의 대학과 13개의 캉첸(승려 숙소)이 들어서 있다. 세라 메, 세라 응악파, 세라 제 대학 중 ‘세라 제’는 승려들의 토론장으로 유명한 곳이다. ‘최라(Chora)’라고 불리는 선문답은 오후 3시 30분부터 약 1시간 정도 벌어진다.

 

 

 

 

토론장에 도착하니 오후 2시 30분이다. 스님들의 토론이 벌어지려면 아직 1시간 정도 남아 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우리는 대법당과 코라를 돌아보기로 했다. 시계방향으로 돌며 대법당과 대학, 숙소를 차례로 돌아보았다. 이곳에도 순례자들이 ‘옴 마니 빗 메 훔’을 염송하며 코라를 돌고 있다. 티베트는 어디를 가나 기도를 하는 순례자들을 만난다.

 

 

 

 

 

3시경이 되니 다행히 비가 멎었다. 우리는 세라 제 앞마당 토론이 열리는 정원으로 갔다. 많은 관람객들이 카메라를 들고 토론장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다. 스님들이 하나 둘 모여 들기 시작했다. 3시 반이 되자 드디어 스님들의 열띤 토론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토론장은 곳 스님들이 지르는 고함소리와 손뼉 치는 소리, 발을 구르는 소리 등으로 소란해지기 시작했다.

 

 

“저게, 선문답이라니… 스님들이 꼭 싸우는 것 같아요?”

“그러게, 우리나라 스님들의 선문답과는 영 딴판인데.”

 

 

 

 

스님들은 1:1 또는 1: 2 로 마주 앉거나 서서 고함을 지르고, 삿대질을 하고, 손뼉을 치고, 춤을 추듯 빙그르 돌기도 하는 모습이 영락없이 싸움질 하는 모습이다.

 

당신이 정말 그랬어?

제대로 알고 말해? 

거짓말이지?

무슨 엉뚱한 소리여,

공부를 통 안 했군.

말도 안 돼,

헛소리 말라니까.

다시 한 번 잘 생각해봐.

아니야 내말이 맞아 네가 틀렸어?

 

 

 

 

그런 열띤 토론중에도 스님들은 한 번 정도는 왼손을 밑에 받치고, 오른손을 높이 들어 힘껏 내리치는 특이한 손뼉 치기를 했다. 이는 우주의 진리와 불교의 교리가 충돌하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 때 위로 치켜 든 손은 극락을, 떠받치고 있는 아래 손은 지옥을 상징하기도 한다고 했다.

 

 

선문답을 하는 스님들의 표정은 싸우는 것 같으면서도 무척 진지하고 재미있게 보였다.

우리 나라 스님들처럼 가부좌를 틀고 앉아 눈을 지그시 감고 주고받는 선문답 보다는 훨씬 자유분방하고 신나 보인다. 운동도 되고 스트레스도 해소 될 것 같았다. 얏! 소리를 냅다 지르는 순간에 깨우침이 올까? 짝짝 힘껏 내리치는 순간에 번뇌가 사라질까?

 

 

 

 

임제 ‘할(喝, 소리 지르기)’과 덕산 ‘방(棒!, 몽둥이로 때리기)’은 이곳 세라사원에서 출발한 것일까? 스님들의 삿대질과 고함, 그리고 손뼉을 힘껏 내리치는 모습에서 당나라 시대 임제스님의 ‘할’소리와 덕산 스님이 내리치는 ‘봉’이 생각난다. 임제스님은 학인들을 맞이의 공부를 점검할 때 천둥이나 벼락이 치듯 "할(喝)!"하고 벽력같이 고함을 지르고, 덕산은 마치 소나기가 쏟아지듯 "방(棒-몽둥이)"을 후려쳐 깨닫게 했다.  

 

 

임제는 어려서 출가하여 경전을 보다가 황벽 선사 밑에 3년 동안 가 있을 때 아무 것도 묻지 않고 열심히 정진하였다. 옆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목주 스님이 “너는 왜 황벽 선사에게 불법의 참뜻을 묻지 않느냐?”는 말을 듣고, 임제는 황벽을 찾아가 “불법의 참뜻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

 

 

 

 

그런데 갑자기 황벽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주장자로 임제를 후려쳤다. 영문도 모른 채 호되게 주장자를 맞고 내려와야 했다. 그러나 임제는 목주의 간곡한 권유로 다시 황벽을 찾아 불법의 참뜻을 물었다. 이번에도 황벽은 다짜고짜 주장자로 임제를 내려칠 뿐이었다. 주장자로 다시 얻어 맞은 임제는 다시는 황벽을 찾지않겠다고 결심하며 산을 내려왔다. 그런 임제에게 목주는 다시 한 번만 찾아가라고 극구 일르자 임제는 그 다음날도 황벽을 찾아갔다. 그러나 이번에도 임제는 또 주장자만 실컷 얻어맞고 말았다.

 

 

 

 

까닭도 모르고 매만 맞은 임제가 황벽과 인연이 없다고 생각하고 그곳을 떠나려고 하자, 황벽은 대우 스님을 찾아가라고 하였다. 대우는 자신을 찾아온 임제에게 “황벽 선사께서 요즘 무슨 법문을 하시던가?”라고 물었다. 임제는 세 번이나 주장자로 얻어맞은 사실을 말하고 자신에게 무슨 허물이 있기에 그처럼 때리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때 대우가 “황벽 스님께서 자네를 위하여 그처럼 애를 썼는데도 그분의 잘못이라고 생각한단 말인가?”라고 하자, 이 말에 크게 깨친 임제는, “황벽의 불법이 별거 아니군” 하고 중얼거렸다.

 

 

 

 

대우가 “아까는 잘못이라 하더니 이제는 웬 큰소리인가?” 야단치니, 임제는 대우의 옆구리를 주먹으로 세 번이나 쥐어박았다. 그 뒤 임제는 황벽 스님에게 되돌아가 그의 법통을 잇고 가르침을 펴기 시작하면서 임제종의 종조가 되었다. 임제 스님이 학인들을 다룰 때는 깨달음의 근본 자리를 알게 하고자 ‘할’이란 방편을 많이 사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덕산은 어려서 출가하여 경에 두루 밝았는데 특히 <금강경>에 능통하여 그의 성씨와 함께 ‘주금강(周金剛)’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하루는 도반들에게 말하기를 “경에서 보살행을 오랫동안 실천해야 성불한다고 말했는데 요즘 남방 스님들은 ‘바로 마음을 가리켜 단숨에 성불케 한다’라고 하니, 이들의 잘못을 바로 잡겠소” 하고 길을 떠났다.

 

 

 

 

길을 가다가 점심을 먹으려고 어떤 떡집에 들어가니 떡을 파는 노파가 “걸망에 든 것이 무엇입니까?” 묻기에, 덕산은 “<금강경>을 풀이한 책들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노파가 다시 말하기를 “<금강경>에서 ‘지나간 마음도 찾아볼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찾아볼 수 없으며 미래의 마음도 찾아볼 수 없다’라고 하였는데 스님께서는 어떤 마음으로 점심을 하시겠습니까?”라고 물었다. 말문이 막힌 덕산에게 노파는 용담의 숭신 선사를 찾아가라고 하였다.

 

 

용담사를 찾아 간 그는 “용담(龍潭)의 소문을 들은 지 오래인데 와서 보니 용도 없고 연못도 안 보이는군” 하고 큰소리를 쳤다. 그때 숭신이 나오면서 “자네는 참으로 용담에 왔네”라고 말하자 덕산은 또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날 밤 늦도록 법담을 나누다가 객실로 가려 하니 바깥이 깜깜하였다. 이에 숭신이 초에 불을 붙여 내밀자 덕산이 받으려고 하니 숭신은 입으로 훅! 불어 촛불을 꺼버렸다. 그 순간에 홀연 크게 깨달음을 얻은 덕산이 숭신 선사에게 공손히 절을 올렸다. 숭신이 “자네는 무엇을 보았기에 절을 하는가?” 물으니, 덕산은 “앞으로는 제가 다시 천하 큰스님들의 말씀을 의심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튿날 덕산은 애지중지 메고 다니던 <금강경>을 풀이한 책들을 다 불살라 버렸으며 이후로 용담의 법을 잇는 법제자가 되었다. 당나라 무종 때 일어난 법난을 겪은 뒤 가는 곳마다 부처님을 모시는 불전을 없애고 설법하는 법당만 남겨두었던 덕산 스님은 책을 가지고 논하자는 제자나 학인을 만나면 이마에서 도깨비불이 번쩍 튀도록 얻어맞았다고 한다. 뒷날 이 가르침을 덕산의 ‘방’이라고 하였다.

 

 

 

 

임제의 ‘할’과 덕산의 ‘방’은 무슨 뜻으로 쓰이는 것일까?

본디 인생은 생멸(生滅)이 없고, 나고 죽음이 없으며, 시비 분별이 없는, 원래의 그 마음자리를 단숨에 깨우쳐 주기 위함이다. 임제록에서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도 죽여라"라고 하는 말 있다. 나무로 만든 부처를 만나면 불살라 땔감으로 쓰고, 아기 부처를 만나면 때려잡아 개밥으로 던져주라는 소리는 무서운 선사들의 가르침이지만 중생이 듣기에는 섬뜩할 뿐이다.

 

 

 

 

이 말은 공부가 무르익어 부처나 조사의 경계에  이르더라도 거기에 안주하지말고 그 경계마져 뛰어넘어 끊임없이 정진하라는 뜻이다. 부처나 조사의 경계에 집착하여 안주를 하는 그 순간 도는 땅에 떨어진다는 것이다. '눈 푸른 납자'는 어떤 인연을 따르더라도 그 속에서 무심하게 모든 일을 바른 진리로 성자의 삶을 이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세라사원에서 펼쳐지는 티베트 스님들의 선문답도 진리를 단숨에 깨우치기 위한 방편일 것이다.

 

 

“호호, 극락과 지옥이 저 손바닥 안에 있는 것 같이 보이네요.”

“세상사 모두가 부처님 손바닥 안에 있다고 하지 않았소? 가부좌를 틀고 앉아 고고하게 선문답을 하는 것보다는 훨씬 재미있고 운동도 되겠네. 자, 우리도 손뼉 치기 한번 해볼까?”

“에공, 아서요, 아서.”

 

 신 선생은 스님들의 선문답 모습을 열심히 카메라에 담았다. 그는 티베트와 네팔에서 주로 인물사진만 찍고 있다. '지구촌 사람들'이란 주제로 몇 차례 전시회를 열기도 한 그의 카메라는 매우 바빴다. 

 

 

 

 

"좋은 사진 많이 찍으셨나요?"

"몇 장 건진 것 같아요. 저기 미소를 짓고 있는 스님의 모습이 너무 좋군요."

"아 저 스님이요. 아까부터 손뼉을 치며 삿대질을 하는 스님에게 그저 미소만 짓고 있던데."

"네, 그 미소짓는 모습이 아주 일품입니다."

 

 

 

 

그의 눈에 비친 스님들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세상사가 카메라 앵글에 다 담겨져 있고, 손바닥 안에 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발을 통통 구르고, 손뼉을 치며, 고함을 지르며 삿대질을 하는 상대방 스님에게 마주 앉아 있는 스님은 그저 빙그레 미소만 짓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마하 가섭의 파안미소(破顔微笑)처럼 보였다.

 

어느날 붓다는 구름처럼 몰려든 영산회상의 대중 앞에서 한 송이 꽃을 들어 보여주시고 아무 말도 하지않았다. 대중이 그 영문을 알지 못해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 있을 때 오직 마하가섭 존자만이 그 뜻을 알고 홀로 빙그레 웃었다. 이것이 이른바 붓다가 가섭에게 법통을 전수하게 된 유명한 '염화미소拈華微笑' 이다. 염화란 꽃을 손에 드는 것을 의미한다. 붓다가 손에 꽃을 든 의미를 오직 두타제일(頭陀第一 ) 가섭만이 알고 미소지은 것이다. 가섭은 의식주 그 무엇에도 집착하지 않고, 얽매이지 않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지금 세라사원에 선문답을 하고 있는 저 스님의 미소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 파안미소(破顔微笑)를 짓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스님은 염화미소를 짓고 있는 것일까? 원래 청정한 마음은 임제의 ‘할’도 덕산의 ‘방’도 도깨비 작란에 지나지 않는다. 모두가 깨우침을 위한 방편일뿐.... 

 

 

 

 

어떤스님은 선문답을 하다가 하염없이 눈물을 짓고 있었다. 슬픔에 잠겨 눈물을 흘리는 스님을 동료스님이 조용히 타일러 주고 있다. 무언가 막혀서 그럴까?

세라사원의 스님들 선문답은 4시 반에 막을 내렸다.

 

“저렇게 소리를 질러대고 손뼉을 치면 소화 하나는 잘 되겠어요.”

“저 거 끝나고 나면 배가 고파 밥을 먹겠지. 그러고 보니 갑자기 배가 고파지네.”

 

 

세라사원에서 내려온 우리는 라싸 시내로 돌아와 바낙숄 호텔에 있는 중국 국제여행사를 들렸다. 신 선생은 카트만두로 갈 비행기 표를 예약하고, 나와 아내, 그리고 하 선생과 양군은 지프차를 렌트하여 네팔로 넘어가는 일정을 예약하기 위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