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섬진강일기

새벽에 지리산을 오르는 이유

찰라777 2011. 7. 22. 21:26

▲새벽에 지리산을 오르는 사람들

 

 

▲노고단 운해

 

 

7월 18일, 일어나 보니 새벽 3시다. 이곳 지리산자락으로 이사를 온 후 바이오리듬이 완전히 변해버린 것 같다. 저녁 9시가 되면 눈이 저절로 감기고, 새벽 3시경이면 저절로 눈이 떠지니 말이다. 도심에 살 때에는 그 반대였는데, 이곳에 이사를 온 후 낮에 노동을 많이 하면서부터 언제부터인가 삶의 리듬이 변해 가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면 거실 유리창을 먼저 쳐다본다. 유리창에는 '청개구리기상청'에서 파견된 일기예보관들이 그날의 날씨를 예보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은 예보관들이 단 한분도 아니 계신다. 음, 오늘은 날씨가 좋겠군. 밖으로 나가 보니 달이 밝다. 별들도 총총하고 하늘이 무척 청명해 보인다.

 

 

 

▲지리산 노고단에 밝아오는 여명

 

청개구리들의 날씨예보는 기가 막히게 맞아들어간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천기를 TV에서 앵무새처럼 말하는 기상청의 일기예보 보다 청개구리들이 육감으로 보여주는 날씨예보를 믿기로 했다. TV의 일기예보를 따르다가 큰 코를 다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청개구리들은 유리창 높은 곳에 매달려 큰 비가 내릴 것을 예고해주고 있었는데, TV에서는 곳에 따라 비가 조금 내리고 흐리겠다고 했다. 그런데 그날 엄청 큰 비가 내렸다. 나는 기상청 일기예보를 믿고 지리산 종주 산행을 계획했다가 도중 하차를 하고 말았다.

 

오늘 같은 천기라면 산행을 하기에 최적이다. 문득 노고단의 원추리가 보고 싶어졌다. 청개구리기상청의 예보대로라면 지리산을 오르기에 아주 좋은 날씨이다. 무려 한 달 넘게 지루한 장마가 계속되다가 모처럼 갠 날을 맞이하게 된 것이니 이런 기회가 어디 있겠는가?

 

나는 아내가 잠에서 깰 새라 조심조심 배낭을 챙기기 시작했다. 여름철 시즌에는 구례에서 노고단으로 올라가는 버스가 새벽 4시에 있다. 마루에서 큰 카메라, 작은 카메라, 물, 비옷, 라면, 햇반, 바나 등을 주섬주섬 배낭에 넣고 있는데 아내가 화장실을 가다가 내 모습을 보고 말았다. 앗, 불사! 들키고 말았군.

 

"당신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예요?"

"음, 노고단 원추리 좀 담아 오려고."

"세상에, 이렇게 일찍이요?"

"낮에는 너무 덥지 않소?"

"그래도 그렇지. 내가 못 말려."

 

 

▲새벽에 지리산에서 산상 데이트를 하는 남녀 등반객

 

문안에서 걱정스런 표정을 짓고 있는 아내를 뒤에 두고 나는 배낭을 메고 밖으로 나갔다. 시계를 보니 3시 50분이다. 저런,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나? 구례읍까지 가려면 너무 늦을 것 같아 나는 화엄사로 차를 몰았다. 나는 화엄사 입구 주차장에서 성삼재로 가는 공영 버스와 동시에 도착을 했다. 경적을 울려 가까스로 출발하려고 하는 버스를 잡았다.

 

헐레벌떡 버스에 오르니 이게 웬일? 버스가 완전히 만원이다. 좌석에는 이미 사람들이 가득 앉아 있고 몇 사람이 서 있다. 평일인데도 이렇게 지리산을 찾는 사람이 많다니 놀랍다.

 

사실 나는 구례로 이사를 온 후 지리산 종주를 하려고 몇 번이나 마음먹었으나 아직까지 실행을 못하고 있다. 지리산 가까운 곳에 살다보니 오늘 못가면 내일 가지, 하는 식으로  언제라도 오를 수 있다는 생각에 그렇게 1년이란 세월이 휙 지나가 버린 것이다. 

 

그런데 저 멀리 서울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용산역에서 22시 45분에 출발하는 무궁화호를 타고 온다. 다음날 새벽 3시 18분에 구례구역에 도착을 하여 노고단으로 가는 공영버스가 3시 30분에 출발하는 버스를 타고 노고단 성삼재로 간다. 그리고 그들은 1박 2일, 혹은 2박 3일 지리산 종주 등산을 감행한다. 그래서 등산시즌이 오면 금요일 날 용산역에서 출발하는 22시45분 발 구례구행 무궁화호표는 거의 매진이다.

 

 

▲새벽 4시 반 노고단 여명

 

  

나를 마지막으로 태운 버스는 곧 성삼재로 출발했다. 건장한 남녀노소 등산객 사이에 끼여 있다 보니 갑자기 어떤 알 수 없는 기운을 받는 것 같다. 노련한 운전기사는 어둠 속을 뚫고 꾸불꾸불한 길을 능숙하게 운전을 하며 지쳐 올라갔다. 버스는 천은사 매표소도 무료통과다. 이 시간에는 매표소 직원이 지키지 않기 때문이다. 항상 신경을 건드리고 말썽을 부리는 지리산 통행세도 부지런 하면 이렇게 거침없이 통과를 한다.

 

버스가 고도를 높여 갈수록 점점 더 서늘해빈다. 나무들이 여명 속에서 묵묵히 서 있다. 노고단은 1985년부터 성삼재 관광도로가 확포장된 다음부터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찾아드는 지리산의 명소이다.

 

 

▲서쪽으로 기우는 달

 

 

"곧 성삼재에 도착을 하겠습니다. 잊은 물건 없이 잘 챙기시고, 안전산행을 하시어 지리산 정기를 듬뿍 받아가시길 바랍니다."

 

운전기사의 코멘트도 일품이다. 새벽에 지리산을 오르는 등산객과 새벽에 버스를 운전하는 운전기사! 그들은 서로 호흡이 척척 맞는 것 같다. 그들은 새벽공기를 가르는 부지런한 사람들이다. 성삼재에 도착을 하니 4시 30분, 하늘에는 벌써 여명이 밝아오고 있다. 

 

한쪽이 다소 찌그러든 달(음력 18일)이 서쪽으로 넘어가려고 하고, 붉은 노을이 노고단 고개를 타고 슬슬 올라오고 있다. 그 위에 한줄기 구름이 춤을 추고 있다. 구례읍 쪽을 바라보니 여명 속을 밝힌 전기불이 반짝이고 있다.

 

"와아! 환상적이네!"

"원더풀!"

 

등산객들은 버스에서 내리며 하늘과 땅에서 펼쳐지는 멋진 풍광에 저마다 환성을 지른다. 밤새 기차를 타고 새벽 산행을 한 피로가 한 순간에 사라지는 풍경이다. 아, 바로 이맛에 지리산 새벽등반을 하는구나. 그러니 새벽 4시 지리산으로 가는 버스가 만원이 될 만도 하다.

 

 

▲저자거리를 방불케 하는 새벽 노고단 산장 풍경

 

 

노고단 대피소에 도착하니 산장은 마치 등산객들로 저자거리처럼 붐빈다. 저마다 무언가를 해먹기에 바쁘다. 버너에 라면을 끓이는 사람, 커피를 끓이는 사람, 밥을 짓는 사람, 파이팅을 외치는 사람… 여기가 산인가 저자거리인가?

 

나는 산장에 무거운 배낭을 내려놓고 작은 카메라 하나만 들고 노고단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지리산에 떠오르는 일출을 보기 위해서였다. 노고단 고개에 이르니 반야봉에서 해가 막 솟아오르고 있다.

 

 

 ▲노고단에서 바라본 지리산 일출

 

 

 

오! 아름다운 지리산! 그리고 그 밑을 흐르는 구름바다! 구름 속 베일에 가리듯 태양은 반야봉 정상에서 보일 듯 말 듯 숨바꼭질을 하고 있다. 반야봉 밑으로는 운해가 하얀 비단결처럼 꿈틀거린다.

 

"와우! 원더풀!"

"어머! 환상이에요!"

"야아! 정말 죽여주네!"

"이래서 새벽에 지리산에 오르는구나!

"밤새 기차를 타고 온 보람이 있네!"

"엄마야! 저런 풍경이 다 있네!"

"그래, 바로 이맛이야!"

 

 

▲노고단 운해

 

노고단 고개를 오른 등산객들마다 지리산 일출의 비경에 취해 저마다 한마디씩 비명을 지른다. 사람은 소리를 지르는데, 산은 말이 없다. 묵묵히 그 모습을 보여줄 뿐. 말문이 막힌다. 모두가 노고단 운해와 반야봉의 비경에 취해 한동안 넋을 잃고 있다. 아하, 바로 이 맛이야! 밤기차를 타고와서 새벽에 지리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비로서 이해가 간다.

 

부지런한 만큼 아름다운 비경을 볼 수 있다!

자연은 부지런한 사람들에게 그 숨은 비경을 보여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