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섬진강일기

준비없는 산행의 대가

찰라777 2011. 7. 26. 06:36

준비 없는 산행의 대가

 

 

 

 

노고단 삼거리

 

 

사진기를 꺼내어 노고단 서편으로 지는 달을 향해 버튼을 누른 순간 삑~ 하는 경고음이 들린다. 모니터를 바라보니 "No CF Card!"란 에러 메시지가 뜬다. 에고, 큰일 났다! 준비 없이 급히 오다보니 이런 실수가… 야생화를 찍으러 온 사람이 총알 없이 전쟁터에 나온 군인과 같다니. 나는 비상용 니콘 쿨픽스 소형카메라를 꺼내 조심스럽게 풍경을 담았다. 오늘 산행은 더욱 조심을 해야 할 것 같다. 준비 없이 지리산을 오르는 것은 산에 대한 '모독'이기 때문이다.

 

 

1000고지가 넘는 노고단은 서늘하다 못해 한기마저 느껴진다. 사람들이 배낭에서 모두 재킷을 꺼내 걸치고 이마에는 랜턴을 두르고 서둘러 산을 오른다. 높은 산에 오르려면 재킷을 준비하는 것이 기본인데, 준비 없이 산행을 한 나는 재킷을 물론 랜턴도 없다. "이건 노고 할머니에 대한 모독이야. 노고 할매 죄송합니다." 나는 노고단 정상을 향해 읍소를 하며 반성을 했다. 배낭에서 비옷을 꺼내 재킷 대신 걸쳤다.

 

 

'노고老姑'는 노인 '老'에 시어미 '姑'를 쓴다. 이는 삼신할미란 뜻이다. 조선시대 추강 남효온은 그의 지리산 산행기 '지리산일과'에서 '노고단老姑檀'을 '고모당姑母堂'으로 적고 있다. 이는 민간 신앙에서 말하는 '할미당'이나 '삼신할미당'이란 뜻을 의미한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금강산을 봉래산蓬萊山, 지리산을 방장산方丈山, 한라산을 영주산瀛洲山이라 하는데 소위 삼신산三神山이다. 지지地誌에는 지리산을 태을선인太乙仙人이 사는 곳이며, 뭇 신선이 모이는 곳이라 하였다" 고 기록하고 있다.

 

 

중국의 삼신산 전설에 따르면, 삼신산들이 발해渤海의 동쪽으로 몇 억 만 리나 떨어진 곳에, 밑바닥이 없는 골짜기인 귀허歸墟의 개울 속에 있는데, 그 정상에 선인仙人들이 살고 있는 어전御殿이 있고 주변에 불로불사不老不死의 과일나무가 있다고 전한다. 그리고 선인들은 산과 산 사이를 하루 몇 번씩이나 날아다닌다.

 

 

중국의 삼신산 전설에 등장하는 삼신산이 조선에 있다고 믿는 신앙이 일찍부터 한국에도 있었다. 조선은 3방三方이 모두 밑이 없는 깊은 바다이며 그 땅에 백두산의 천지가 있고 그 산정의 대臺가 넓다는 것이다. 또 그런 산이 셋 있는데 금강산(봉래산), 지리산(방장산), 한라산(영주산)이라는 것이다. 이 산들 위에는 때때로 신들의 이적異蹟(기이한 행동)이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명산을 준비 없이 오른다는 것은 지리산의 신성에 대한 모독이 아닐 수 없다. 사실 나는 지난주에 목욕재계를 하고 3박 4일 지리산 종주계획을 세웠다가 폭우로 입산이 금지되어 오르지 못했다. 지리산 노고 할머니는 아직 내가 지리산을 종주할 자격이 없는 놈으로 보는 모양이다. 그런데 오늘 또 대책 없이 노고단을 올랐으니 혼 줄이 나도 싸다. 나는 노고 할매에게 죄송한 마음으로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겼다.

 

 

노고단 정상에 세워진 돌탑

 

 

노고단은 성삼재에서 2.5km의 거리에 있다. 등산로가 잘 닦여져 있어 1시간이내에 정상에 오를 수 있다. 노고단 중간 쯤 오르는데 아가씨 한 사람이 땅에 쪼그리고 앉아있고, 주위에 동료들이 근심어린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왜 그러지요?"

"아마 체했나 봐요. 배가 아프데요."

"그럼 저쪽 쉼터 마루에 오른쪽으로 눕히고 배를 살살 문질러 주세요.'

"그래야겠군요.'

 

 

신선이 거닐었다는 지리산. 노고단 운해

 

 

아마 저 아가씨도 나처럼 준비 없이 지리산에 오지 않았을까? 밤새 기차를 타고 오며 맥주를 마실 수도 있고. 흔히 밤기차를 타고 산에 오르는 사람들은 지루한 시간을 달래거나 들뜬 마음에 친구들과 휩쓸려 기차에서 맥주를 마시거나 다른 술을 마시는 경우가 흔히 있다. 그러나 높은 산을 오를 때에는 주의해야 한다. 기차에서도 편히 쉬도록 하고 조신調身을 해야 한다. 그래야 탈이 없다.

 

 

높은 산을 오를 때 '준비 없는 산행'은 '게으른 산행'보다 훨씬 못하다. 늑장을 부리더라도 산을 존경하는 마음가짐과 최소한의 장비의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 재 묻은 개가 똥 묻은 개를 나무란다더니 대책 없이 산에 오른 내가 남의 일에 간섭을 하다니. 픽 웃음이 나온다. 준비없는 산행은 그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