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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사성암 기왓장에 소원을 비는 구구절절한 사연들

찰라777 2013. 2. 22. 09:13

'순이씨, 정리하려고 했지만 잘 안 되네요. 그냥 좋아 할래요. 제맘 받아주세요'

- 두 번째 고백-

 

 

섬진강이 바라보이는 명당 터 구례 사성암 기왓장에 소원을 비는 이 사연을 읽는 순간, 어쩐지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내용으로 보아 아마 사랑하는 사람이 헤어지자고 하는 모양입니다. 기도문을 올린 사람은 아무리 정리를 하려고 했지만 잊을 수가 없어서 여기 지리산 자락까지 와서 간절하게 기도를 올린 모양입니다.

 

 

오죽했으면 여기까지 와서 이런 간절한 기도문을 올려놓았을까요? 이 기왓장의 사연을 본 순간 정말 이 사람이 사랑하는 순이(가명)씨와 헤어지지 않고 그대로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 단애의 절벽에 세워진 사성암 약사전

 

 

▲ 사랑하는 연인과 해어지지 않고 함께 살기을 소원하며

기와장에 쓴 간절한 기도문(구례 사성암)

 

"수능대박,"

"OO야, 말 좀 들어라." - 에미, 애비

"우리식구 건강기원."

"롯또 1등 당첨되게 해주세요!"

"제발, 건설수주계약 성사 되게 해주세요."

 

 

우리나라 제일 가는 기도처의 하나인 사성암 약사전으로 올라가는 층계에는 구구절절한 사연들이 적힌 기왓장 기도문들이 적나라하게 펼쳐져 있습니다. 기왓장에 아로새긴 기도문 하나하나가 너무 간절하게 보여 읽는 사람의 마음이 그저 숙연해집니다.

 

 

 

 

설날을 맞이해 절이나 교회에 가서 한 해의 소원을 비는 경우가 많습니다. 세상살이가 점점 힘들어지다보니 빌어야 할 소원도 점점 더 많아지겠지요. 삶이 힘들고 어려울수록 기도는 더 간절해지니까요.

 

 

혹자는 이를 '기복'이라고 말하겠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세상살이가 오죽 답답했으면 이렇게 멀리까지 와서 소원을 빌겠습니까? 설령 그 소원이 다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기도를 하는 순간만큼은 마음이 진실해질 것입니다.

 

사실 태초부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기복이 없는 종교는 존재하기가 어렵다고 했습니다. 절이나 교회에 가서 '마음을 비운다', '회개를 한다'고들 하지만 보다 더 근원적인 마음 밑바닥에는 소원을 성취해달라고 비는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작년 1월, 100여명의 스님들이 용맹정진을 하고 있던 문경 봉암사로 대중공양을 간 적이 있었습니다. 이 소원 기왓장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그때 봉암사 수좌스님이신 적명스님께서 소원을 비는 기도에 대하여 말씀하신 설법이 떠 오르는군요.

 

"기도를 하는 것은 좋지만 너무 거듭 말하지 마십시오. 여러분께서도 너무 자주 같은 말을 들으면 짜증나지 않습

 

니까? 소원을 말할 때는 일곱 번을 넘기지 마세요. 거듭 말하다 멈추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도를 간절히 올리다보면 소원에 매달려 있던 마음에 여유가 생기고, 옆 사람도 눈에 들어올 것입니다. 이웃의 자식을 위해, 그들의 고통을 위해 기도하면 일체중생을 위해 살아가셨던 부처님을 닮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빌었던 소원이 이루어져도 진정으로 행복해지는 게 아닙니다. 소원이 이루어지면 또 새롭게 시작해야 할 일이 생깁니다. 내가 아는 거사님 중 한 사람은 빌었던 사업에 크게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성공을 하고 나서 모든 걸 다 아들한테 물려주고 절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는 성공을 위해 평생을 밤에 접대를 하다가 그만 큰 병이 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는 모든 걸 바쳐 회사를 일궈냈지만 대신 너무 무리를 해서 병이 난 것입니다. '인생이 무상'하듯 '소원의 무상함'도 이와 같은 것입니다."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돈, 권력, 보다 많은 소유 등 물질을 우선시하는 현대는 그 욕망이 끝이 없는 것 같습니다. 돌이켜 보면 제가 어린 시절에는 자동차도 없고, 아파트도 없었으며, 컴퓨터나 텔레비전이 없어도 행복했던 시간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물론 선택의 여지도 별로 없었겠지만 그때는 작은 것에 기뻐하고 행복해 하곤 했습니다.

 

 

 

사성암(四聖庵)은 원효, 의상, 도선, 진각 등 네 분의 큰 스님들께서 수행정진을 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노고단 건너편 오산에 수직으로 올라가 절벽에 세워진 약사전에는 원효대사가 암벽에 손톱으로 그렸다는 약사여래마애불이 있습니다. 이 약사여래부처님은 영험해서 이곳에서 건강소원을 빌면 효험이 크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래서 연중 수많은 기도 객들이 끊이지를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약사전으로 올라가는 계단에도, 소원바위로 올라가는 계단에도 소원을 적은 기왓장들이 수도 없이 놓여 있습니다. 800년 묵은 귀목나무 위에 올라서면 구례벌판과 지리산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그 위로 산신각으로 가는 길에는 소원을 비는 커다란 소원바위가 있습니다.

 

이 소원바위에 이마를 대고 소원을 간절히 빌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어 사람들은 저마다 바위에 동전을 붙여 놓거나 소원 쪽지를 대롱에 넣어 놓고 소원을 빌기에 바쁩니다.

 

몇 해 전 호주에서 존이라는 친구가 내가 살고 있었던 지리산을 방문하여 사성암을 함께 오른 적이 있습니다. 나는 존한테 약사여래불에게 소원을 빌고, 소원바위에 소원을 빌면 건강해지고 원하는 소원을 들어준다고 설명을 하였습니다.

 

 

▲ 소원바위에 이마를 대고 소월을 빌며 기도를 하고 있는  사람들

 

▲ 소원바위에 열심히 기도를 하고 있는 호주에서 온 친구 존

 

 

그 말을 들은 그는 약사여래불 앞에서 무릎을 꿇고 너무나 열심히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소원바위에 이마를 대더니 떨어질 줄을 모르며 무언가 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나서 그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말했습니다.

 

"원더풀! 기도를 하는 순간 무언지는 모르지만 너무 놀랍고 큰 감동을 받았어요!"

 

동서양을 막론하고 소원을 비는 마음은 다 같은 것 같습니다. 오늘 함께 사성암에 오른 열두 명의 보살님들도 각자 소원을 너무도 진지하게 빌었습니다. 그들의 소원이 모두 이루어 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너무 자주 소원을 빌지 말라는 적명스님이 말씀과 너무나 열심히 소원을 빌던 호주의 존이 떠올라 속으로 빙그레 웃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정리가 잘 안 되어 그냥 그대로 살자'고 고백하며 간절하게 소원을 빌었던 그 청년의 사랑이 꼭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