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임진강일기

가을비 단상-100명의 네팔 어린이들을 그리며...

찰라777 2014. 10. 20. 09:15

벌거벗는 나무, 점점 두꺼워지는 사람의 옷

 

추적추적 가을비가 내린다.

이번 가을비가 내리고 나면 겨울이 성큼 가다 올 것만 같다. 가을비는 처마의 홈통을 타고 돌돌돌 흘러내린다. 가을비는 테라스를 적시고, 푸릇푸릇한 김장김치를 촉촉이 적셔주고 있다. 이렇게 차가운 가을비를 맞으며 푸름을 간직하고 있는 김장배추를 보면 경이롭기만 하다.

 

 

 

가을비가 내리면 사람들의 옷은 점점 무거워지겠지. 나무들은 하나 둘 낙엽을 떨어뜨리고 점점 벌거벗어 가는데, 사람들은 점점 두꺼운 옷을 걸치기 시작한다. 사람도 나무들처럼 훌훌 옷을 벗어버리고 겨울을 지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옷값도 안 들고, 난방비도 안 들고…

 

그런데 사람은 자연의 나무들과 정 반대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겨울이오면 난방비 걱정, 김장 걱정, 옷 값 걱정… 벌이는 시원치 않은데 자꾸만 늘어나는 생활비 부담에 대한 걱정주름이 줄줄이 늘어만 간다.

 

어제 심야전기 보일러를 처음으로 가동을 했다. 아무리 아껴 쓰려고 하지만 한 겨울철엔 난방비가 30~40만원이 나온다. 더구나 이곳 연천은 최전방 오지로 가장 추운 지방이다. 그러니 난방비가 안 들어 갈 수가 없다. 벌써 옷이 두꺼워졌다. 내의에 스웨터, 그리고 더 추워지면 방한복을 입고 거실에서 지내야 한다. 그렇게 아껴도 나올 것은 다 나온다.

 

빗소리를 들으며 밖으로 나가니 임진강에 물안개가 자욱하다. 잔디밭도 어느새 노래졌다. 느티나무 낙엽이 바람에 뒹굴고 있다. 가을 서정이 듬뿍 담긴 정경이다. 네팔을 다녀오면 바로 김장을 해야 할 것 같다. 아니 좀 늦지나 않을지 모르겠다.

 

네팔의 아이들을 만나고 오면…

 

27일 날 장학금을 후원하고 있는 네팔 현지 학교를 방문할 예정이다. 지난 3년 간 컴퓨터 모금 운동을 전개했는데 의외로 반응이 좋았다. 네팔의 칸첸중가 오지 기슭에 살고 있는 아이들은 컴퓨터 자판을 한 번 만져보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다. 지난 2010년 10월 10대의 컴퓨터를 기증했었는데, 그것으로는 1200명이나 다니는 학생들에겐 턱없이 부족하다.

 

그래서 작은 봉사단체인 자비공덕회에선 지난 3년간 컴퓨터 보내기 운동을 전개해 왔다. 결과는 매우 좋았다. 3천만 원의 기금이 모아졌다. 그것으로 40대의 데스크 탑 컴퓨터를 살 수 있었다. 중고 노트북도 30대나 모아졌다. 그 컴퓨터를 들고 15명의 자비공덕회 회원들이 네팔 현지 학교를 방문할 예정이다.

 

가서, 그 초롱초롱한 네팔의 아이들을 만나고, 함께 이야기를 나눌 예정이다. 아이들의 희망을 들어보고, 아이들의 부모님들도 만나볼 생각이다. 볼펜도 2000자루를 준비했다. 티셔츠, 가방 구두 등 아이들과 학보님들께 드릴 선물들도 기증이 들어왔다.

 

세상은 선한 사람들이 훨씬 많다는 것을 새삼 다시 느낀다. 이 기증품들을 보내준 사람들도 결코 살림이 넉넉하지만은 않다. 성금을 보내주신 분들도 면면히 살펴보면 생활이 그리 넉넉지 않은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남을 위해서 돕는 마음을 선뜻 내는 것을 보면 그저 감동적이 뿐이다.

 

 

 

나는 지난 10달 동안 매월 3만원씩을 컴퓨터 기금으로 송금을 했다. 작은 돈이지만 매월 들어온 원고료의 일부(아니 전부일 때가 많았다)를 네팔의 아이들을 위해서 쓰기로 했던 것이다. 10달 동안 모은 금액이 30만원. 나에게는 결코 적지 않은 돈이다. 그 돈이면 이곳 연천에서 한 달간 쓸 수 있는 생활비이기 때문이다.

 

마치 가난한 여인이 부처님을 위해서 등불을 켜는 마음으로 나는 그 돈을 네팔의 아이들을 위해서 모았다. 물론 그 돈으로는 컴퓨터 한 대도 살 수 없는 작은 돈이다. 그렇지만 그 돈에는 매일 매일 내가 썼던 원고료의 대가가 녹아 있다.

 

그 돈을 보내며 나는 행복했다. 내 가난했던 시절도 생각했다. 시골 농촌에서 자란 나는 11살이 넘도록 하교에 가지 못했다. 시골 살림이 넉넉지도 못했지만 5형제 중 막내였던 나는 어머님께서 잔심부름을 하라고 11살이 넘도록 학교에 보내주지 않았다. 그래서 그 해 봄 나는 땅에서 뒹굴면서 학교에 보내달라고 어머님께 졸랐다.

 

마침내 나는 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고, 공부를 지독히도 열심히 했다. 그 길만이 시골에서 일을 하지 않고 세상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출구였기 때문이다. 머리는 둔재인데 워낙 열심히 공부를 하다 보니 중학교와 고등하교도 장학생으로 다닐 수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바로 은행에 취직을 했다. 은행에 취직을 해서 야간에 공부를 하여 대학원을 졸업했다.

 

100명의 회원, 100명의 네팔 후원학생

 

 

 

 

 

 

 

생각해 보면 그 때의 내 환경이나 지금 네팔의 아이들 환경이 비슷하다. 그래서인지 나는 네팔의 아이들이 마치 네 친 동생이나 아들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그 애들은 한 달에 1000루피(약 15천원)가 생활비를 손수 벌어야 살 수가 있다. 그런데 그 돈을 우리가 보내주면 용돈을 벌지 않고 그 돈으로 학교에 다닐 수가 있다. 네팔에서 고등학교까지는 학비가 무료이다.

 

 

자비공덕회에서는 네팔의 아이를 선정하여 초등학교에 입학시켜 전문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12년간 학비를 보내주고 있다. 2010년 최초 12명 후원을 시작으로 현재는 100명의 아이들을 후원하게 되었다. 후원학생수가 늘어날수록 그 책임도 점점 무거워진다.

 

그러나 세상은 악한사람들보다도 남을 돕고자 하는 착한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을 이번 모금운동을 계기로 다시 한 번 실감할 수 있었다. 100명의 회원들이 100명의 아이들을 후원하고, 70대의 컴퓨터를 모금하여 보내게 되었으니 말이다.

 

 

가을비는 여전히 추적추적 내리며 대지를 적시고 있다. 네팔 아이들을 만나고 오면 김장을 서둘러 해야 할 것 같다. 그 동안 얼지는 않을 지 걱정이다. 허지만 그 순수한 미소를 짓는 네팔의 아이들을 만날 생각을 하면 저절로 마음이 행복해진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우리가 주는 것보다 받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