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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선교장이야기 ⓛ]대관령 옛길을 넘어 강릉 선교장을 가다

찰라777 2017. 8. 12. 05:26

 

▲문수성지 오대산 월정사

 

문수성지 오대산 월정사에서 하루 밤 묵으며 오욕에 물든 세속의 찌꺼기를 조금이라도 씻어보려고 애를 써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고희를 살아오는 동안 쌓아온 두터운 업장을 어찌 일순간에 씻을 수 있겠는가?

 

오히려 고요한 산사에 가부좌를 틀고 있으니 번뇌만 더욱 죽 끓듯이 이글거린다. 우매한 중생은 소음으로 가득 찬 속세에 한 점으로 남아 있음이 오히려 도심 속의 한 점 티끌 섬이 되어 더 자유로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번뇌가 죽 끓듯이 무진할 바에야 속세에 머리를 처박고 있음이 오히려 약이 되지 않을까? 가부좌를 풀고 대관령이나 넘어가 바닷바람이나 쏘이자. 나는 다음 날 이른 아침 서둘러 대관령 옛길로 차를 몰았다. 고속도로를 타면 시간이야 빠르겠지만 어두운 땅굴을 지나가는 것이 답답할 것 같아서였다.

 

와우! 대관령(832m) 고개 마루턱에 다다르니 시야가 탁 트이고 운무에 싸인 동해바다가 한 폭의 산수화처럼 펼쳐진다. 오랜만에 넘어보는 대관령 옛길이다. "오길 잘했어. 가부좌 틀고 앉아있는 것보다 훨씬 좋아!" 역시 나는 색()을 좇는 속물인가 보다.

 

▲대관령에서 바라본 강릉시와 동해바다

 

대관령은 예나 지금이나 영동과 강릉에서 서울로 가는 관문이다. "장백산에서 산맥이 구불구불 비틀비틀 남쪽으로 뻗어 내리면서 동해가를 차지한 것이 몇 곳인지 모르나, 이 영()이 가장 높다. 산허리에 뻗은 길이 아흔 아홉 구비인데, 서쪽으로 통하는 큰 길이 있다." 신증동곡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조선시대 인문지리서)에 나오는 이 내용은 고개의 규모가 크고, 영동~영서를 잇는 주요 관문이라는 데서 '대관령(大關嶺)'이라는 지명이 유래했음을 시사하고 있다

 

일찍이 송강(松江) 정철(鄭澈, 1536~1593)"울고 왔다가 울고 떠난다"고 읊었던 대관령은 수많은 사람들이 이 험준한 대관령을 울며 넘어왔다가 떠날 때에는 강릉의 따뜻한 인심에 이별을 안타까이 하며 울며 떠나가곤 했다는 고개다. 매월당 김시습(金時習, 1435~1493)과 율곡 이이(李珥, 1536~1584)가 넘어 다녔고,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관동팔경과 금강산을 유람하기 위해 넘나들었다.

 

강릉에는 율곡이 탄생한 오죽헌을 비롯하여, 관동제일루 경포대, 허균허난설헌 기념공원, 방해정, 금란정, 취영정 등 명승지가 수두룩하다. 그런데 유독 조선시대 고택인 선교장이 마음에 꽂힌 것은 열화당 뒤뜰에 핀 배롱나무 꽃의 유혹 때문일까?

 

 

▲붉은 배롱나무 꽃이 유혹하고 있는 강릉 선교장

 

비단 그뿐 만은 아닐 것이다. 이 고택이 필자와 한 직장에서 근무를 했던 지인(선교장 집주인 이강륭:전 조흥은행장)이 살았던 집이기도 했기에 연줄을 따라 선교장이 불현 듯 떠올랐는지도 모른다. 오래전 우연히 선교장에 들렀을 때 열화당 뒤뜰 거대한 배롱나무에 핀 그 붉은 꽃의 유혹을 잊을 수가 없다.

 

배롱나무 꽃은 온천지가 녹색일변도인 한여름에 화려하게 피어나 100일 동안 붉은 꽃 잔치를 벌려준다. 필자는 선교장 뒤뜰에 핀 붉은 배롱나무 꽃의 유혹에 못 이겨, 조선시대 시인묵객들처럼 꼬불꼬불한 대관령 옛길을 조심조심 내려갔다. 그러나 자동차라는 문명의 이기는 아흔 아홉 구비를 한 달음에 내려와 곧장 선교장에 도착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