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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선교장이야기 ③]대원군과 백범도 드나들어던 강릉선교장

찰라777 2017. 8. 12. 06:28

수많은 시인묵객들의 교류장소 

 

선교장은 주인의 넉넉한 인심에다 뛰어난 풍광 덕분에 시인묵객과 유명인사들이 끊임없이 드나들었던 명소다. 조선시대 선교장은 관동팔경과 금강산을 구경하기 위해 수많은 시인묵객이 드나들며 교류의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하도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어 선교장 행랑채에는 서화를 표구하는 장인이 상주하고, 환자를 돌보는 의원까지 둘 정도였다고 한다.

 

 

 

선교장을 드다들던 사람들 중에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 1820~1898), 몽양(夢陽여운형(呂運亨, 1886~1947)같은 유명인사도 있었다. 추사는 삼십 세 전후에 금강산을 유람하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선교장에 들어 '홍엽산거(紅葉山居:붉은 잎으로 산에 깃들어 살겠다는 뜻)'라는 편액을 남겼다. 흥선 대원군은 이회숙(李會淑, 1823~1876)과 친하게 지냈는데, 선교장을 찾아 대련(對聯:문과 집 입구 기둥에 거는 글) 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이 작품들은 현재 선교장 민속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백범과 독립운동가들이 드나들었던 선교장 

 

백범(白凡) 김구(金九, 1876~1949) 선생도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기 위하여 선교장을 자주 찾았다. 백범 선생은 광복 후 73세 되던 1948년 당시 선교장의 주인이었던 이돈의(李燉儀, 1897~1961) 선생에게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가들을 남몰래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것을 치하하는 뜻으로 '天君泰然(천군태연)'이란 휘호를 써서 기증을 했다.

 

 

 

 

천군(天君)사람의 마음, 태연(泰然)머뭇거림이나 두려움 없는 기색이란 뜻으로 선비의 의연한 마음가짐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휘호는 1962년 도난을 당했다가 52년 만인 2014127일 한 수집가의 기증으로 되돌아왔다. 당시 백범 선생은 또 다른 글씨 天下爲公(천하위공)’이란 글도 써 보냈는데, 이 작품도 1962년에 없어져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

 

독립운동가 성재(省齋) 이시영(李始榮)과 건국준비위원회의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도 활래정의 단골 손님이었다. 특히 몽양은 선교장과 인연이 깊어서 1908년 선교장 옆 터에 세운 동진학교(東進學校)에서 1년간 영어 교사를 하기도 했다. 동진학교는 이 집안에서 세운 강원도 최초의 사립학교다.

 

 

또한 최근에는 2018 평창동계올림픽 개최지 선정을 위해 내한한 IOC위원들을 위한 차회(茶會)가 활래정에서 열리기도 했다. 연간 20여만 명이 찾는 선교장은 이제 과거와 현재의 문화를 잇는 우리문화의 가교역할을 하며 전통문화체험관으로 거듭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