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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선교장이야기 ⑥]열화당

찰라777 2017. 8. 12. 07:10

일가친척들이 화기애애한 정담을 나누는 열화당

 

월하문을 지나 안채로 통하는 평대문과 사랑채로 연결되는 솟을대문이 나란히 나온다. 안채대문은 여인들이 출입하는 문이고 솟을대문은 남자들이 출입하는 문으로 남녀출입을 구분하였다. 솟을대문에는 소남(少南) 이희수(李喜秀, 18361909)가 쓴 선교유거(仙橋幽居)’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기둥에는 선교장 주인 이강륭(李康隆)이란 명패도 작게 걸려있다.

 

 

 

 

여기서 선교유거는 신선이 머무는 그윽한 집이란 뜻이다. 소남은 대원군이 천재라고 부를 정도로 자질이 빼어났던 조선 말기의 서예가다. 안채는 지난 1월 화재로 수리 중에 있어 들어가지 못하고 사랑채인 열화당(悅話堂)으로 들어갔다.

 

열화당(悅話堂)은 순조 15(1815) 오은거사 이후가 건립한 사랑채로 친척들과 화기애애한 정담을 나누는 장소다. 열화당이라는 이름은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 구절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세상과 더불어 나를 잊으니(世與我而相遺)/다시 어찌 벼슬을 구할 것인가(復駕言兮焉求)/친척들의 정다운 이야기 즐겨 나누고(悅親戚之情話)/거문고와 책을 즐기며 우수를 떨쳐버리리라(樂琴書以消憂)' 이 가운데 '친척들의 정다운 이야기 즐겨 나누고'에서 '()'자와 '()'자를 따서 일가친척이 열화당에 모여 정담을 나누고 거문고와 책을 즐겨 근심을 없앤다는 의미로 열화당이라는 당호를 정하였다고 한다.

 

현재 선교장 관장을 맡고 있는 이강백(70)선생은 선대의 뜻을 이어 받아 열화당 대청과 방에 '열화당 작은 도서관'을 개관(2009)하고, 열화당과 같은 이름으로 출판사 '열화당(대표 이기웅)'을 설립(1971)하여 가문의 문화와 전통을 이어나가고 있다.

 

 

 

작은도서관과 출판사를 열게 된 것은 선교장이 한국 최초의 석판 인쇄기를 제작하여 당시 시인묵객들의 시문을 인쇄하여 나누어 주고, 조상들의 행장을 기록하여 집안의 대소가들에게 배포하는 등 300년 동안 이어온 열화당 정신을 이어가자는 데 있다

 

열화당 마당 한 가운데는 능소화 한그루가 외롭게 피어있다. 이곳 사랑 마당에 심어진 능소화는 오래된 유래가 있다. 열화당 마당에 능소화가 심어진 사연은 약 1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충청도에 사는 선비 한분이 금강산과 관동팔경을 유람하던 중 선교장에 머물러 지냈다. 그는 충청도 고향의 능소화를 자랑하면서 나중에 강릉에 다시 오는 일이 있으면 능소화를 가져와서 마당에 심었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그 후 세월이 한참 지나 그 선비는 능소화를 구하여 선교장으로 보냈는데, 먼 길을 오는 동안 능소화가 말라죽지 않도록 그늘을 지나오고 물을 주어가며 애지중지 가져왔다. 그 정성에 감탄한 경농 이근우(李根宇, 1887~1938) 선생은 능소화를 대문밖에 심지 않고 큰 사랑 마당에 심어 능소화를 아끼고 사랑하였다고 한다. 그 후로 몇 차례 폭설로 큰 가지가 부러져도 새로 가지가 올라오며 생명력을 잃지 않고 지금도 예쁜 꽃을 피워주고 있다.

 

강릉 인심이 좋더라는 말은 선교장에서 유래

 

열화당 후원으로 돌아가니 거대한 배롱나무 한그루가 화사하게 꽃을 피우며 열화당 지붕위에 드리우고 있다. 배롱나무 위쪽 건너편에는 '노야원'이란 초정이 단아하게 자리 잡고 있다. 아침 일찍 손님들이 일어나면 열화당 후원으로 산책을 하고 노야원에 앉아 정담을 나누도록 한 장소다.

 

 

 

 

 

 

노야원에서 뒷산으로 올라가는 길옆에는 거대한 주엽나무 한 그루가 험상궂게 버티고 서 있다. 강릉시에서 보호수로 지정한 주엽나무는 수령이 570년에 달하고 수고 25m에 나무둘레가 3.8m에 달한다. 나무줄기에 굵은 가시가 붙어 있는 주엽나무는 선교장을 지키는 신장처럼 보인다.

 

 

 

 

 

주엽나무 뒤로는 '선교장둘레길'이 울창한 솔숲으로 고즈넉이 나 있다. 소나무들이 어찌나 큰지 하늘이 보이지 않는다. 소나무 중에는 수령이 500년 넘은 금강송(강릉시 지정 보호수)이 끝 간 데 없이 하늘로 용틀임을 하며 선교장을 굽어보고 있다. 선교장을 'U'자 형으로 에워싸고 있는 300~600년 된 금강송은 선교장의 품격을 더욱 격상시켜주고 있다

 

 

 

 

 

강릉 선교장이 이처럼 몇 백 년 동안 파괴되지 않고 대를 이어 흥성하게 된 것은 선교장 주인들의 후한 인심에 있다. 조선시대 선교장은 고택을 찾아오는 다양한 손님들을 후하게 대접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선교장 인심에 대한 사례는 '오온공유고집'에 규장각 직각 서만순(徐晩淳)이 쓴 묘갈명에 잘 나타나 있다.

 

"전에 범려(笵蠡:중국 춘추시대 재상)가 재산을 세 번 이루어 세 번 흩었다 하였으니, 그 지혜는 따라갈 수 없거니와 무릇 사람들이 재산을 일으키는 데 있어 올바른 도리에 따르면 일어나고, 도리를 거스르면 망한다. 사람이 나눠서 흩어주지 않는다면 하늘이 반드시 흩어버릴 것이고, 하늘이 만약 흩어버린다면 먼저 화를 내릴 것이니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느냐."

 

 

 

 

이는 오온거사가 죽기 전 두 자식들에게 내린 유지다. 자손들은 오온의 유지에 따라 수천금을 가난한 친족과 친구에게 나누어 주어 구휼(救恤)하였다. 또 오은거사는 두 아들에게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던 소강절(邵康節, 1011~1077, 송나라 유학자) 선생의 "평생에 눈썹 찌푸리는 일을 하지 않으면 세상에서 응당 이빨을 가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平生不作皺眉事 世間應無切齒人)"란 구를 걸어두고 두 아들에게 훈계한 대목에서도 남을 위해 베풀고 배려하는 삶을 살라는 기미를 읽을 수 있다.

 

선교장 사람들은 인심이 후했다. 당시 사람들이 감기에 걸려 재채기를 할 때는 배다리 통천댁으로 가라고 했고, 참새들이 곡식을 쪼아 먹을 때는 새들을 향해서 "배다리 통천댁으로 가라"고 했다고 한다.

 

통천댁이라는 표현은 9세손 이봉구(李鳳九, 1802~1868)가 통천군수를 지낼 때 극심한 흉년이 들자 집 창고에 있던 쌀 수천석을 풀어 군민에게 무상으로 나누어 주었는데 그 때 적선(積善)을 받은 사람들이 선교장을 통천댁()으로 불렀다고 한다.

 

'강릉 인심이 좋더라'는 말이 선교장에서 유래되었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선교장에서 무전취식을 하였다. 당시 선교장에 머물렀던 사람들의 명부를 기록한 방명록인 활래간첩이 24권이나 된다고 하니 선교장의 인심을 짐작할 수 있다.

 

 

 

 

역대 선교장 주인들은 경작지를 남과 북으로 나누어 북쪽에서 생산되는 수확은 북촌에, 남쪽으로부터 들어오는 수확은 남촌에 저장하여 소작인들이 기근이 와도 굶지 않도록 배려하였다. 또한 소작인들이 나라에 내야하는 세금역시도 저장고에서 내주는 등 미덕을 쌓는데 망설이지 않았다.

 

 

 

늦은 밤에 찾아오더라도 월하문(月下門)을 두드리라는 선교장의 후한 인심과  '타인능해(他人能解)'라 써 붙인 구례 운조루가 쌀뒤주에 쌀을 가득 채워 쌀이 필요한 사람은 누구나 퍼가게 한 배려는 조선시대 부자 고택을 오랫동안 존재하게 하는 좋은 본보기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