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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도재- 이 고개를 넘으면 견성을 한다는데...

찰라777 2018. 11. 20. 05:37

 

 

 

용추폭포를 출발하여 함양읍내를 지나 24번 국도를 탔다. 함양 상림을 들릴까 하고 저마 하다가 곧 날이 어두워질 것 같아 곧바로 지리산으로 가는 구동마을로 들어섰다. 평지에 있는 지안 마을을 지나자 뱀처럼 구불구불한 길이 나타났다.

 

마치 뱀이 스르륵 지나가는 자리 같기도 한 지안재이다. 원래 오도재는 지안재와 구분하여 불렀으나 요즈음은 고개 전체를 오도재라고 부른다. 옛날 내륙 사람들은 남해 사람들과 물물교환을 하려면 지리산 장터목으로 가야 했는데, 이때 반드시 넘어야 하는 고개가 바로 이곳 오도재이다.

 

오도재는 함양에서 지리산으로 가는 가장 단거리 코스로 2004년도에 개통하여 도로로서의 기능뿐 아니라, 최근 새로운 관광명소로 각광을 받고 있다. <신증동구여지승람>에는 오도치(悟道峙)는 군 남쪽 20리 지점에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1716년 승려 탄천이 쓴 <등구사적기(登龜寺蹟記)>에도 지리산에 들어와 머물 곳을 찾으려고 오도치(悟道峙)에 올라가서 남쪽을 바라보았다는 내용이 있다.

 

오도재는 휴천면과 마천면의 경계에 위치하며 삼봉산(1186)이 동쪽으로 내달은 773m의 고개에 위치하고 있다. 여행자들은 지안재를 촬영하기 위해 수신 탑 아래 가드레일을 넘어가서 위험한 자세로 촬영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그냥 지나쳤다. 몸이 불편한 환우들을 태우고 가는 데 굳이 위험을 무릅쓸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다. 젊은 시절에는 나 역시 위험을 무릅쓰고 사진을 촬영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나는 주차하기가 안전한 오도재휴게소 주차장에 차를 잠시 멈추었다.

 

 

 

 

고개 마루턱에는 오도령(悟道嶺)이란 표지석과, 지리산제1(智異山一門)이란 현판이 걸린 전통한옥 관문이 우람하게 서 있다. 전망대에 올라 앞을 바라보니 대봉산 천왕봉(1228)을 비롯하여 백운산(1278), 계관봉(1251), 도숭산(1044), 황석산(1190), 기백산(1331) 준봉들과 함양읍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오도재! 이 고개를 넘으면 깨달음을 얻는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휴게소에는 유학자들과 승려들이 남긴 시구 입석들이 여기저기 서 있다. 조선시대부터 내놓으라 할 유명인사들이 두류산(지리산의 옛 지명)으로 들어가기 위해 이 고개를 넘나들며 저마다 한 마디씩 읊어 족적을 남긴 흔적이다.

 

고운 최치원-청산경불환, 탁영 김일손-두류시, 금재 강한-두류산책, 일두 정여창-지리산, 뇌계 유호인-두류산 노래, 감수재 박여량-천왕봉을 다녀와서, 구졸암 양희-지리산, 청매선사-12각시(十二覺時) 등이 세월을 안고 서 있다. 이들은 모두 오도재를 넘으며 깨달음을 얻었을까?

 

그중에서 고운 최치원의 청산경불환이란 시가 마음에 와 닿는다. 조선 말기 춘추 김도수(1699~1733)가 쓴 남유기(南遊記)에는 고운이 항상 이 골짜기에 머물러 청학을 타고 왕래를 하였기에 바위틈에 옛날 한 쌍의 청학이 있었습니다.”라고 기록하고 있어 그가 지리산 쌍계사 불일암 골짜기를 자주 찾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최근에는 최치원이 시를 읊고 노닐었다는 불일암 근처에서 그가 음각을 했다는 폭 150cm, 높이 140cm 크기의 완폭대(翫瀑臺)’라는 바위가 발견되어 청학동 설화가 사실에 가까움을 증명해주고 있다.

 

 

 

 

그러나 최치원은 기울어져가는 신라 말기 조정의 권세 다툼에 실망하여 산수가 좋은 곳을 두루 찾아다니며 유유자적하다가 해인사가 있는 가야산에서 갓과 신발만 남겨 둔 채 홀연히 신선이 되어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아마 그도 이 오도재를 오가며 지리산에서 노닐었으리라.

 

僧乎莫道靑山好 승호막도청산호

山好何事更出山 산호하사경출산

試看他日吾踪跡 시간타일오종적

一入靑山更不還 일입청산경불환

 

승려야 너 산이 좋단 말 빈말이 아니더냐

정말 산이 좋다면 왜 다시 나오는가

두고 보아라 내 언제인가 산에 들어간다면

푸른 산속에서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

 

청매선사가 깨달음을 얻고 <십이각시(十二覺時)>가 기묘하게 그 듯을 알 듯 모를 듯 다가온다. 일설에 의하면 오도재라는 이름도 청매선사가 도를 깨쳤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覺非覺非覺 각비각비각

覺無覺覺覺 각무각각각

覺覺非覺覺 각각비각각

豈獨名眞覺 기독명진각

 

깨달음은 깨닫는 것도

깨닫지 않는 것도 아니니

깨달음 자체가 깨달음 없어

깨달음을 깨닫는 것이네.

깨달음을 깨닫는다는 것은

깨달음을 깨닫는 것이 아니니

어찌 홀로 참깨달음이라 이름하리오.

 

 

 

청매선사(1548~1623)는 선조 25(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휴정 서산대사를 따라 승병장으로 3년 동안 왜군과 맞섰다. 선사는 전쟁으로 인하여 불에 탄 가람과 땅에 떨어진 승풍을 다시 바로 잡고, 어떻게 하면 도탄에 빠진 민중을 구해낼 수 있을까 하는 깊은 고뇌에 빠졌다.

 

이에 선사는 크게 발심을 하고 부안 아차봉 마천대 기슭에 월명암을 짓고 목숨을 던진 수행에 들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밝은 거울에 갖가지 형상이 비칠 때, 거울은 대상을 분별하여 받아들이지 않고 거울 속에 나타난 형상을 소유하지도 않으면서, 갖가지 형상을 그대로 나타내는 것을 인지하고 첫 번째 깨달음의 오도송을 <십이각시(十二覺時)>로 읊었다.

 

청매선사는 오도재에서 가까운 도솔암(1200)을 창건하고, 영원암(900)에서 수행을 하고, 말년에는 지리산 연곡사에서 1617(광해군 9)에 왕명을 받아 정심(正心지엄(智嚴영관(靈觀휴정·선수(善修) 5대 종사의 영정을 그려 조사당에 모시고 제문을 지어 봉사하였다. 입적을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오도재 인근에는 청매선사를 기려 도솔암의 정견스님이 지리산 천왕봉이 바라보이는 곳에 청매암(함양군 마천면 창원리 소재)을 건립하였다.

 

 

 

여행자는 여러차례 오도재 고개를 넘나들었고, 그리고 고희를 넘긴 지금도 이 오도재 고개를 넘고 있다. 허지만 깨달음은커녕 슬슬 배가 고파져 어디서 저녁밥을 먹을까만 생각을 하고 있다. 옛 선인들처럼 걸어서 가는 길도 아니고 자동차를 몰고 잠시 휘리릭 고개를 넘어가는 주제에 무엇을 깨달을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차마고도를 통해 라사로 가는 길에 수천 킬로미터를 오체투지를 하며 라사로 가는 순례자들을 본 적이 있다. 그 순례자들에 비하면 낵 지금 넘고 있는 오도재는 그냥 순 안 대고 코를 풀며 가는 쉬운 길이다.

 

산이 높은 곳에는 해가 일직 저문다. 지리산조망공원에 들려 천왕봉과 지리산 영봉들을 바라보기엔 너무 늦었다. 아내도 배가 고픈지 뜨거운 추어탕을 먹고 싶다고 했다. 제대로 된 추어탕을 먹으려면 남원시가지 가야 한다. 남원까지는 너무 멀다. 우리는 숙소에서 가까운 인월면 흥부골에서 추어탕을 한 그릇 먹었는데 시장이 반찬이라 추어탕 한 그릇을 후루룩 맛있게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