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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을 통열하게 비판한 두보의 "春望"

찰라777 2010. 5. 27. 09:07

청두 두보초당을 찾아서

두보는 "봄의 소망(春望)"이란 시를 통해 전쟁을 통열하게 비판했다.

 

 

청양궁에서 노자의 흔적을 찾아보고 두보초당으로 향했다. 35번 버스는 바로 두보초당 앞에서 내려 주었다. 시인의 초당은 한가로웠다. 5월의 신록이 우거진 두보초당은 대나무 숲이 출러거리고 있었다.

 

이태백(李太白)과 함께 중국 최고의 고전시인 두보(杜甫 712-770)는 허난에서 태어나 20세에 중국을 보기 위해 고향을 떠났다. 중국을 유람하던중 두보는 744, 때마침 장안의 궁정에서 추방되어 산둥 성으로 향해가고 있던 이백과 뤄양에서 운명적으로 만났다. 이백의 천재적인 풍격을 사모하던 두보는 이백과 함께 양송(梁宋 : 지금의 허난 성) 지방으로 유람을 떠났다. 여기서 이백 외에 시인 고적(高適)·잠삼(岑參) 등과도 알게 되어 함께 술을 마시며 시를 지었다.

 

그해 겨울 이백과 헤어진 두보는 강남(江南)으로 향했고 그후 두 사람은 다시 만나지는 못했다. 그러나 두보는 오랫동안 이백을 사모해서 종종 그를 꿈속에서 만나는 일도 있었는데 사흘 밤이나 계속해서 이백을 만나는 꿈을 꾼 후 지은 것이 〈몽이백이수 夢李白二首이다.

 

장안에 도착한 그는 약 10년 동안 과거시험에 급제하지도 못하고 관직도 얻지 못한 채 곤궁한 생활을 계속했다. 두보는 명사고관의 집을 드나들고 시문을 조정에 바쳐 인정을 받으려고 노력했으나 임용되지 못했다. 천보 13년 처음으로 금위군의 무기고 관리로 정8품 하(下)라는 가장 낮은 관직을 얻어 굶주림을 면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 현종(755)시에 일어난 안사의 난은 당나라 명운을 바꾼 대전란이었다. 8년간 지속된 전쟁으로 무려 3000만 명이 죽어 인구는 무려 70%나 감소했고, 집들은 890만호에서 293만호로 파괴 되었다고 한다. 이는 중국 역사상 가장 최악의 잔혹한 전쟁이었다.

 

 

 ▲신록이 우거진 청두 두보초당-두보는 장안에서 피나을 와 이곳 초막에서 가난하게 살았다.

 

 

春望(춘망)-杜甫(두보)

 

國破山河在(국파산하재) 조정은 망했어도 산하는 그대로요

城春草木深(성춘초목심) 성안은 봄이 되어 초목이 무성하네

感時花淺淚(감시화천루) 시대를 슬퍼하여 꽃도 눈물 흘리고

恨別鳥驚心(한별조경심) 한 맺힌 이별에 나는 새도 놀라는구나

烽火連三月(봉화연삼월) 봉화불은 석 달이나 계속 오르고

家書抵萬金(가서저만금) 집에서 온 편지 너무나 소중하여라

白頭搔更短(백두소갱단) 흰 머리를 긁으니 자꾸 짧아져

渾欲不勝簪(혼욕불승잠) 이제는 아무리 애써도 비녀도 못 꼽겠네

 

당나라 현종의 실정으로 일어난 안록산의 난 때문에 백성들이 받은 고초를 보고 두보는 위와 같이 노래했다. 이 시에는 안록산의 난이라는 전쟁이 배경으로 깔려 있다. 인간의 이기심이 조직적이고 집단적으로 결집되어 그것이 쌓이고 쌓이면 일시에 폭발하듯 나타나는 것이 전쟁일 것이다.

 

전쟁이 일단 터지면 모든 것은 전쟁의 단순 논리와 생리로 진행된다. 철저하게 강자만이 살아남는 잔인하고 몰이성적인 처참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어느 한쪽이 다 없어질 때까지 비인간적이고 야수 같은 것만이, 아니 적의 모든 것이 파괴되는 것이 전쟁이다.

 

그토록 수많은 인간의 목숨을 빼앗고 고통과 파괴를 요구하는 전쟁을 인간은 왜 지속하는 것일까? 과연 전쟁의 발생에 대한 신의 섭리는 무엇인가? 신은 왜 전쟁이란 비극에 대하여 침묵하는가? 인류의 평화와 행복을 신은 질투하는 것일까?

  

▲두보의 초상을 모신 공부사, 두보초당은 송,명, 청 시대에 중수했다.

  

두보의 시 "춘망(春望)"에는 전쟁을 직접 보고 체험한 두보의 사상이 그대로 깔려있다. 그는 시를 통하여 전쟁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다. 전쟁이 인간의 육체와 영혼을 찢고, 죽여 온갖 물건을 파괴해도 계절은 언제나 때맞추어 나타나고 있다. 초목도 그에 따라 변화하는 질서를 가진다는 것이다. 전쟁은 인간만의 전쟁일 뿐이다.

 

전쟁으로 꽃도 눈물을 뿌리고, 새도 놀란다는 것이다. 조정이 정치를 잘 못하여 전쟁을 일으키고 국토와 백성이 고통을 받는 시대를 슬퍼하며, 전쟁으로 가족과 생이별하는 인간의 한 맺힌 이별을 담고 있다.

 

가족걱정, 나라 걱정, 자신의 건강과 장래에 대한 걱정 때문에 흰 머리가 더욱 희어지고, 머리털이 빠져서 비녀도 꽂지 못하게 됨을 표현하고 있다. 이는 결국 두보도 심신이 극도로 쇠락한 상태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

 

 

▲작은 움막에서 살았던 자리 엄청나게 넓은 정원이 들어섰다.  

 

안사의 난은 당조를 급속히 몰락시켰다. 낙양에서 반란군이 장안을 향해 물밀듯이 쳐들어오자 당 현종은 양귀비와 몇몇의 측근을 데리고 쓰촨으로 도망갔다. 도망 중에 황제의 친위병들은 황실의 몰락이 양씨 일가 때문이라고 하며 양귀비를 처형 하려고 하자, 양귀비는 스스로 자살을 하여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759년 두보도 안사의 난을 피해 청두로 피신을 와서 5년 여 간을 지내면서 시작에 몰두했다. 원숭이를 기르는 사람을 따라 산속에서 도토리를 주어 연명할 정도였다고 한다. 도토리와 풀뿌리를 케어 먹으며 도착한 청두는 전란의 참화와는 거리가 멀었다.

 

 ▲두보는 이 곳에 4년간 기거하며 240수의 시를 지었다.

 

천부지국(天府之國)이라 불리는 쓰촨은 문물이 풍부했다. 두보는 완화계(浣花溪)라 불리는 개울가 암자의 빈방에 정착을 했다. 하루 벌어 하루를 살아갔지만 마음은 평온하여, 시상은 끝없이 떠올랐다. 두보는 이 초당에서 무려 240편의 시를 지었다.

 

현재 두보 초당은 약 20만㎡에 이를 정도로 넓다. 오대의 시인 위장심이 두보가 묶었던 초당을 기념하여 중수한 이래 송, 원, 명, 청대를 거치면서 두보초당은 성역화 되며 대나무 숲이 우거진 멋진 정원을 이루고 있다.

 

두보의 위패와 초상을 모신 공부사(工部嗣), 청나라 건륭제가 친필로 하사한 소릉초당, 마오쩌둥의 지시로 만들어진 두보초당 회랑 입구의 '草當'이라는 글씨들이 눈길을 끈다. 권력자들은 속으로는 검은 생각을 하면서도 겉으로는 시를 사랑하는 사람처럼 비추이고자 자신의 글씨 남겨 시인의 사상을 더럽힌다.

 

두보초당은 영화촬영지로도 각광을 받고 있다. 우리나라 영화 <호우시절>이란 영화도 두보의 시 '춘야희우(春夜喜雨)'란 시의 구절에서 제목을 가져왔다고 한다. 영화는 보지 못했지만, 중국 청두로 출장을 간 한 남자가 두보초당을 구경하다가 그곳에서 가이드를 하고 있는 미국 유학시절의 여자 친구를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졌다는 내용을 담은 영화이다.

 

▲두보초당 입구에 앉아있는 청두의 노부부

 

 

春夜喜雨 (춘야희우) - 봄밤에 내린 비

 

好雨知時節 (호우지시절) 좋은 비는 계절을 알고

當春乃發生 (당춘내발생) 봄이 되니 곧 내리기 시작 한다.

隨風潛入夜 (수풍잠입야) 바람 따라 이 밤에 살짝 스며들어

潤物細無聲 (윤물세무성) 소리 없이 만물을 적신다.

夜徑雲俱黑 (야경운구흑) 들판 길 구름 낮게 깔려 어둡고,

江船火獨明 (강선화독명) 강 위의 배는 불을 외로이 밝혔다.

曉看紅濕處 (효간홍습처) 이른 아침 분홍빛 젖은 곳을 보니

花重錦官城 (화중금관성) 금관성에 꽃들이 활짝 피었네.

 

대숲에 일렁이는 신인의 초당을 돌아보다보면 누구나 시 한수를 읊어지고 싶어진다. 초당을 떠나려고 하는데 초당 입구에 두 노인 부부가 앉아 허허롭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온갖 시름을 잊고 소박한 모습으로 다정히 앉아 있는 모습에서 시인 두보를 떠올린다. 시인은 가고 없지만 시인이 남긴 시는 영원히 우리의 심금을 울려주고 있다. 전쟁이 일어나면 저 평화로운 노 부부의 웃음도 볼 수 없을 것이다. 어떻게 하든 전쟁은 피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