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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아품을 껴 안은 동리산 태안사

찰라777 2015. 4. 27. 06:15

멀고도 깊은 곳에 위치한 동리산 태안사

 

구례시외버스터미널에서 마중을 나온 대원거사 부부의 차를 타고 섬진강을 따라 곡성 쪽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대원거사는 오늘 오전에 서울에서 태안사 참배를 하기 위해 미리 와 있었다. 내가 최전방 경기도 연천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이곳 태안사까지 오는 데는 12일이나 걸렸다.

 

곡성으로 가는 섬진강변은 아름답다. 지리산 자락을 따라 유유히 흐르는 섬진강, 굽이굽이 흐르는 섬진강 양변에 고즈넉이 뻗혀있는 두개의 신작로, 그리고 추억의 곡성 기찻길… 곡성 섬진강은 강변을 따라 네개의 곡선이 흐른다.  마치 먼 태곳적 시절로 회귀하는 시간여행을 하는 느낌이 든다.

 

▲곡성 태안사로 가는 길은 섬진강변을 따라 섬진강을 가운데 두고 두개의 신작로와 기찻길 등 네개의 곡선이 흐른다.

 

구례구역에서 우회전을 하여 섬진강로를 따라 8km를 달리니 압록사거리가 나온다. 압록사거리는 보성강과 섬진강이 만나는 지점이다. 여기에서 주암 방면으로 좌회전을 하여 보성강을 따라 올라가다가 태안사 삼거리에서 좌회전을 하여 보성강을 건넌다. 보성강은 작은 호수처럼 잔잔하게 흘러가고 있다.

 

 

▲언제 보아도 아름다운 섬진강.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태안사는 보성강과 섬진강이 만나는 아름다운 곳에 자리하고 있다. 크고 작은 봉우리와 맑은 물줄기가 흐르는 이곳은 찾아오는 이가 드물고 고요해서 마음 닦는 수행자들이 공부하기에 좋은 곳이다. 이곳에는 용이 깃들고 독충과 뱀이 없으며, 구름이 깊고 소나무 숲이 우거져 있다. 또한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하여 삼한의 명승지라 할 만한 곳이다. 이곳 동리산에 구산선문의 하나인 <동리산문>을 연 신라 혜철국사(惠哲國師, 785~861)의 비문에 나와 있는 태안사에 대한 설명이다.

  

▲동리산(봉두산 753m)정상에서 내려다본 태안사

 

이렇게 아득히 멀고 깊은 곳에 위치한 태안사가 한 때 승보사찰 송광사와 태고종 본산인 선암사, 그리고 지리산 제일의 화엄사를 말사로 거느렸다니 도저히 믿기지가 않는다. 지금은 오히려 태안사의 말사였다는 화엄사의 말사가 되어 있다. 그 찬란했다는 옛 문화재는 전쟁으로 불타 없어지고 돌로 깎은 부도만 남아 태안사의 옛 영화와 전설을 전한다. 이렇게 깊고 먼 동리산 자락에 숨어 태고의 숨결을 간직한 태안사는 우리 시대에 아픈 상처를 껴안고 있다.

 

시인 조태일의 탯줄과 영혼이 묻혀 있는 곳

  

 

보성강을 건너 죽곡면 유봉리 삼거리에서 다시 좌회전을 순천, 월등 방면으로 가다가 비포장도로로 꺾어지자 곧 조태일 시문학관이 나온다. 1941년 대처승의 아들로 태안사에서 태어난 저항시인 조태일의 영혼은 어디에 있을까? 1970년대 시퍼런 독재정치권력에 대항하여 식칼을 들이댔던 조태일. 그의 번득이는 눈동자는 어디에 있을까? 아마 그는 지금도 시대의 아픔을 안고 식칼의 날을 예리하게 갈고 있는지도 모른다.

 

너희가 뱉는 천 마디의 말들을/단 한 방울의 눈물로 쓰러뜨리고-중략-/너희의 녹슨 여러 칼을/꺾어 버리며, 내 단 한 칼은/후회함 없을 앞선 심장 안에서/말을 갈고 자르고/그것의 땀도 갈고 자르며/늘 뜬 눈으로 있다/그 날카로움으로 있다.”

 

 

시대의 순결성을 유린하는 제도적 폭력에 맞선 시인의 꼿꼿한 자세와 역사의식은 지금도 가슴을 서늘하게 만든다그는 독재시대의 턱밑에 식칼을 들이대고 당당히 맞섰다.

 

벼랑을 건너뛰는 이 무적의 칼 빛은/나와 너희들의 가슴과 정신을/단 한 번에 꿰뚫어 한 줄로 꿰서 쓰러뜨렸다가/다시 일으키고 쓰러뜨리고 다시 일으키고/메마른 땅 위에 누운 나와 너희들의 국가 위에서/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끌어다 놓고/더욱 퍼런빛을 사방에 쏟으면서/천둥보다 번개보다 더 신나게 운다/독재보다도 더 매웁게 운다

 

세상이 답답해서 소주에 밥을 말아 먹었다는 조태일은 57세에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앓은 간암은 독재시대의 억압과 폭력이 그의 정신을 옭아 맨 시대암이 아닐까?

 

붉은 동백처럼 사라저간 충혼불멸(忠魂不滅) 경찰들

 

조태일 기념관에서 비포장도로를 따라 우거진 숲속을 거슬러 올라가니 <동리산문>이란 편액을 단 일주문이 나오고, 조금 더 올라가니 좌측 언덕에 경찰충혼탑이 나타난다. 안내판을 읽어보니 북한군 제603 기갑연대를 섬멸한 보복으로, 태안사에 설치한 우리 경찰 작전지휘본부를 북한군이 기습공격 하여 48명의 경찰관이 전사를 한 곳이라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북한군은 우리 경찰관을 대웅전에 가두어 둔 채 불을 질러 산채로 태워 죽였다고 한다. 결국 6.25 한국전쟁을 겪으며 태안사의 모든 전각은 불타 사라지고 부도와 돌무더기, 그리고 능파각과 일주문만이 옛 자취를 남겨주고 있다. 장렬히 전사한 경찰관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참전동지들의 성금과 국가의 지원으로 1985년에 건립한 충혼탑에서는 매년 8월 위령제를 지낸다.

 

 

 

 

충혼문을 들어서면 48명의 이름을 새긴 충혼탑이 높이 솟아있고, 우측에는 <충혼불멸>이라 새긴 작은 석탑이 자리 잡고 있다. 탑 뒤에 새긴 진혼시가 가슴을 적신다. “한사코 지키신 땅 백일만에 풀린 사슬/뫼뿌리 자욱 자욱마다/꽃이 엉켜 피서라가슴 아픈 진혼시처럼 충혼탑 주변에는 동백꽃 붉게 엉겨 피어있고, 동백꽃이 목이 뚝뚝 부러진 채 붉을 피를 토하며 여기저기 떨어져 있다. 못다 핀 채 사라저간 젊은 영혼들을 모는 것 같아 가슴이 아리고 섬뜩하다.

 

시대암에 걸렸던 인권변호사 조영래가 머물렀던 절

 

충혼탑을 뒤로 하고 태안사 경내로 들어가는 길 양 옆에는 검은 돌무더기가 무덤처럼 지키고 있다. 돌문에 올라서니 둥근 연못 가운데 삼층석탑이 우뚝 서 있다. 이는 바람결에 연못이 고기비늘처럼 파르르 주름을 일으킨다. 나는 그 물결 위에서 또 한 사람의 영혼을 떠올린다. 시대암을 앓다가 세상을 떠난 인권 변호사 조영래. 그는 이곳 태안사에서 요양을 하다가 폐암으로 귀천을 한 인권변호사가 조영래 바로 그다.

 

 

 

1947년 대구에서 태어난 조영래는 가정교사를 하며 경기중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경기고 재학시절 6.3한일회담 반대 시위를 주동하다가 정학처분을 받기도 했다. 그런 그가 1965년 서울대학교 전체수석을 하며 법과대학에 입학한다.

 

그는 1971년 사법시험에 합격해 연수원에 들어갔으나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으로 구속 수감되어 16개월의 실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른다. 1973년 만기출소 후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배되어 6년간 쫒기는 생활을 하면서 노동운동가 전태일의 삶을 기록한 <전채일 평전>을 쓴다. 이 책은 익명으로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란 제목으로 출간된다.

 

10.26사태로 6년 도피생활에서 해제된 그는 사법연수원에 다시 복귀하여 수료를 한 후 <시민공익법률사무소>를 설립했다. 사법시험에 합격을 한 후 10여 년이 지난 뒤였다. 1986년 충격적인 부천서 성고문 사건의 피해자 권인숙 씨를 변호하여 가해자 문귀동 경장에 대한 유죄판결을 이끌어내는 등 인권변호사로 활약을 한다.

 

담배 한 개비에 한 문장으로그렇게 줄담배를 피워가며 변론 원고를 썼던 그는 권양, 우리가 그 이름을 부르기를 삼가지 않으면 안 되게 된 이 사람은 누구인가? 얼굴 없는 우상이 되어버린 이 처녀는 누구인가?’란 날카롭고 가슴 서늘한 변론으로 재판관들을 감동시킨다 . 결국 그는 '진실을 감방 속에 가두어 둘 수는 없습니다'라는 명문을 탄생시키며 <부천서 성고문 사건>의 피해자 권인숙씨를 변호해 승소한다. 그리고 그 사건은 이듬해 6월 민주화의 도화선 역할을 한다.

 

 

  ▲부천 성고문 사건을 맡아 승소 시킨 고 조영래 변호사(자료:KBS 인물현대사 조영래 편)  

 

그런 조영래 변호사의 방에는 늘 큰 재떨이가 있었다고 한다. 시대의 아픔을 줄담배로 달랬던 그는 1990년 가을 폐암 3기 선고를 받고 이곳 태안사로 내려와 폐암투병을 한다. 유난히 절집 풍경을 좋아했던 그는 태안사에서 방을 하나 얻어 조용히 살면서 담담하게 삶을 정리해 나간다. 결국 그는 1990121243세에 짧은 생애를 마치고 귀천을 했다.

 

조영래는 전태일 자신이 쓴 평전을 읽고 노동운동을 하다가 죽은 사람들, 목숨을 스스로 끓은 사람들에 대해서 천도제를 지내고 싶다고 했다. 그의 뜻에 따라 그의 아내 이옥경은 노동열사들에 대해 극락왕생을 비는 천도제를 지냈다. 그 후 <조영래 평전>을 쓴 안경환 교수(서울법대 학장 역임)그의 때 이른 죽음을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입을 모아 내린 진단은 시대암이었다라고 적고 있다.

 

태안사에 다녀 온 후 나는 <KBS 인물현대사> 시리즈로 방영됐던 '진실은 감옥에 가두어 둘 수 없다 - 조영래'편을 인터넷을 뒤져 다시 봤다. "진실을 감옥에 가두어 둘 수 없다"는 그의 말은 그때나 지금이나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린다고 진실은 감뤄지지 않는다. 진실은 무덤 속에서조차도 감춰질 수 없다.

 

 

 

  

겉으로 보기엔 평온하기만 한 태안사는 이처럼 전란의 상흔과 우리시대의 아픔을 껴안고 있다.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 허물어졌던 태안사는 1985년 청하큰스님이 조실로 주석을 하면서부터 중창해 오늘의 모습을 간직하게 됐다. 

30여 년 전 청화큰스님의 법문을 듣기 위해 찾아오곤 했던 추억을 더듬으며 일주문을 들어서니 이끼 낀 부도비가 천년고찰 태안사의 역사를 일러주고 있다. 조태일 시인은 어느 방에서 태어났으며, 조영래는 어느 방에 머물렀을까? 태안사 경내에는 유난히 민들레꽃이 많이 피어 있다. 댓돌 밑에도 여리고 노란 민들레가 비시시 피어나고 있다. 시대암을 앓다가 떠난 이들의 영혼이 다시 부활를 한 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