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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선교장이야기 ⑤]월하문(月下門)

찰라777 2017. 8. 12. 06:53

유명한 퇴고(堆敲)’의 일화를 남긴 가도의 시

 

활래정을 지나면 안채로 통하는 월하문(月下門)이 나온다. 월하문 양쪽 기둥에는 두 개의 주련이 걸려 있는데 당나라 시인 가도(賈島, 779~843)의 시 제이응유거(題李凝幽居)’에서 따온 글이다.

 

새는 못가의 나무에서 잠자고(鳥宿池邊樹), 스님은 달 아래 문을 두드린다(僧敲月下門)’ 즉 달이 뜨는 늦은 밤이라도 이곳을 찾는다면 월하문을 두드리라는 뜻이다.

 

 

 

 

가도는 당 왕조의 유명한 시인으로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출신이었지만 어릴 적부터 배우기를 좋아하고 글쓰기를 매우 좋아했다. 그러나 과거에 몇 년 계속 실패하여 가진 돈도 다 떨어지고 극심한 절망감에 빠져 있다가 출가를 한다. 중이 되어서는 이름을 무본(無本)이라 고치고 절에 머물며 시를 지었다.

 

가도는 슬픈 시로 이름을 날렸는데 구절마다 오랜 시간을 들여 정성껏 시를 지어 참신하고 독특한 시가 많았다. 그러나 그는 오랫동안 주위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했다. 극도로 상심한 그는 두 구절을 3년 걸려 지은 시 한 번 읊으니 두 줄기 눈물이 흐른다. 그러나 이를 감상할 이 없으니 더욱 처량하구나!”라며 한탄했다.

 

 

 

 

가도는 걸을 때도 앉아서도 먹을 때도 잠을 잘 때도 고통스런 창작을 멈추지 않았으나 여전히 인정을 받지 못해 처지가 이만저만 곤란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당나귀를 타고 이유(李餘)의 집을 찾아 나선 길에 조숙지변수, 승퇴월하문(鳥宿池邊樹, 僧推月下門)”이라는 두 구절의 시를 지었다. 바로 선교장 월하문 주련에 걸린 문장으로 그 유명한 퇴고(堆敲)’의 일화를 남긴 시다.

 

길을 가다가 시를 지은 가도는 ()’자가 마음에 들지 않아 ()’자로 바꿀까 고민하며 아무 생각 없이 손으로 밀고 두드리는 퇴고의 동작을 반복하다가 갑자기 꽝하는 소리가 들렸다. 정신이 번쩍 들어 주위를 살펴보니 어떤 조정대신의 수레와 충돌한 것이었다. 그 조정대신은 당나라의 저명한 문학가이자 경조윤(京兆尹, 수도를 지키고 다스리던 관직) 자리에 있는 한유(韓愈)였다.

 

 

 

 

당대의 문장가였던 한유는 조실부모하고 어렵게 공부한 한유는 고난 속에서도 책을 손에서 놓는 날이 없었다고 할 만큼 고학(苦學)했다.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한유는 독서는 부지런히 끈질기게 해야 하고 독창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부는 부지런함으로 정교해지고, 노는 것 때문에 망가진다. 행동은 생각에서 이루어지고, (생각없이) 남 따라 하다가 망가진다 '진학해(進學解'는 공부를 권하는 역대 명언 중에서도 최고의 명언으로 남아 있다.

 

부지런히 책을 읽는 것 외에 한유는 깊은 생각을 강조했다. 뭔가 새로운 것을 이야기하고 싶어도 그것에 대한 인식이 한층 더 깊어진 다음에라야 진위를 인지하고 흑백을 가릴 수 있는 독창성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또 독서는 반드시 폭넓되 요약할 수 있는 능력이 결합되어야 한다고도 했다. 깊은 맛을 가진 의미심장한 옛 서적에 빠져 그 정수를 꼼꼼히 잘근잘근 씹어 참맛을 볼 수 있는 독서를 하라고 권한다.

 

 

 

 

그렇게 사려가 깊었던 한유는 시종을 시켜 가도에게 수례에 충돌한 이유를 물었다. 가도의 사연을 들은 한유는 꾸짖는 대신 시의 한 글자를 놓고 집착하고 있는 이 요상한 중에게 관심을 가졌다. 수례를 멈춘 한유는 가도와 함께 ()’자가 나은지 ()’자가 나은지 토론 끝에 ()’자가 더 어울린다는 결론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이에 가도는 자 대신 자를 넣었고, 바로 이 일화에서 퇴고(堆敲)’라는 유명한 일화가 탄생했다.

 

이러한 만남을 통해 가도의 재능을 알게 된 한유는 가도의 처지를 동정하여 그가 승려로 지내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직접 문장법을 전수하여 진사에 도전하게 했다. 가도는 한유의 권유로 퇴속하여 머리를 길고 다시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왔고, 후에는 장강현의 주부 벼슬을 지내기도 했다.

 

관원의 의장대와 충돌하는 행위는 당 왕조의 법에 다르면 벌을 받아야 하는 범법 행위다. 가도는 시 창작에 몰두하느라 유서초(劉棲楚, 당나라 경조윤)의 의장대와 부딪쳤을 때는 능욕을 당했지만, 한유의 의장대와 충돌하고는 그와 친구가 되었다. 한유는 인재를 알아보고 아꼈음을 의미한다. 한유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가도는 출세는커녕 한평생 한을 품은 채 살았을 지도 모른다. 인재를 아끼고 추천한 한유의 정신은 칭찬받아야 하고 또 따라 배워야 할 마음이다.

 

어쩌면 선교장의 주인 오온거사의 마음도 한유를 흠모하며 가도의 시심(詩心) 닮았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