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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인 최초로 "서울시명예시민"이 된 시토울라 씨

찰라777 2009. 11. 3. 18:06

네팔인 최초로 '서울시명예시민'이 된

네팔관광청 한국사무소장 케이피 시토울라 씨

 

 

지난 10월 28일 오세훈 서울시장으로부터 "서울시명예시민증'을 받은 네팔관광청한국사무소장 케이피 시토울라(K.P. Sitoula, http://www.nepal.or.kr)의 감회는 남다르다. 네팔인으로서는 최초로 명예시민증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번 명예시민증을 받은 16명의 외국인중 네팔인으로서는 유일무이한 그를 만나기 위해 삼청동에서 그가 직접경영하고 있는 네팔식당 "옴(OM, http://omfood.co.kr)"을 찾아갔다. 

 

“이곳에 들어오니 내가 꼭 네팔에 온 기분이 드는군요. 우선 서울시명예시민이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어서 오십시오.”

 

그는 유창한 한국어로 반가이 손님을 맞이하며 네팔차 찌아(chia)를 내놓았다. 최근에 삼청동에 오픈한 네팔식당 옴은 모든 인테리어를 네팔에서 가져온 골동품으로 꾸미고 주방장과 종업원까지 모두 네팔인이다. 네팔인들이 부담없이 네팔 전통차를 마시며 대화를 할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하고, 한국인에게도 네팔의 음식 맛과 문화를 느낄 수 있도록 모든 인테리어를 네팔식으로 꾸며 보았다는 것.  네팔음악이 흘러나오는 네팔 레스토랑에서 네팔 전통차 찌아를 마시며 그와 이야기를 나누자니 마치 네팔 현지에서 차를 마시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시토울라씨가 한국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언제부터이지요?”

 

“제가 한국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대학생시절 올림픽에 대한 역사를 공부하다가 1988년도에 한국에서 올림픽을 개최한 것을 알게 되면서부터였어요. 그동안 아시아 국가 중에서는 일본이 가장 많이 알려져 있었는데, 우리나라보다 더 작은 한국에서 올림픽이 개최된 것을 보고 놀랐어요. 그래서 한국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눈부신 경제발전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공부를 하면서 한국에 가고 싶었어요. 그리고 마침내 대학을 졸업한 후 1992년에 한국에 입국을 하게 되었지요.”

 

“그럼 한국에 온지 벌써 17년째가 되네요. 한국에서 처음엔 어떤 일을 하기 시작하셨나요?”

 

“17년 동안 계속 한국에 있었던 것은 아니고요 네팔과 한국을 왔다 갔다 했지요. 처음에는 저의 관심분야인 의류디자인 공부를 하기 위해 한국인회사 디자인실에서 근무를 했어요. 그러다가 네팔에서 의류사업을 해볼까 하고 라사라 디자인 학원에서 본격적으로 디자인 종합과정을 2년간 공부했어요. 그 후 한국기업과 손을 잡고 네팔에서 의류사업 시작했는데 네팔의 열악한 환경 때문에 실패를 하고 말았어요.”

 

“그렇군요. 그럼 네팔관광청업무는 언제부터 시작했지요?”

 

“저는 의류사업을 하면서도 관광사업에 관심이 많았는데, 마침 네팔항공이 서울에 사무소를 오픈하여 운 좋게 그곳에 취직하여 일을 하게 되었어요. 네팔항공에서 일을 하면서 한국인들이 네팔에 대하여 관심이 많은 것을 보고 개인자격으로 네팔 관광 업무를 시작하다가 2002년부터 독립하여 (주)네팔투어(http://www.nepaltour.co.kr)를 설립하면서 동시에 네팔관광청한국사무소 업무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었어요.”

  

 ▲오세훈 서울특별시장으로 부터 명예시민증을 받고 있는 시토울라씨

 

세계의 지붕인 네팔 동부 칸첸중가 산맥의 오지에서 태어난 시토울라가 한국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92년.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한 그는 한국인의 생활관습과 근성이 여러모로 네팔인과 유사하다는 점을 발견하고 한국에서 무엇인가 배워 네팔 경제발전에 도움을 주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의류디자인에 관심이 많았던 시토울라는 라사라 패션 디자인 학원에서 의류디자인을 본격적으로 공부를 하고 네팔에서 의류산업에 뛰어 들었으나 네팔의 열악한 투자환경 때문에 실패를 하고 만다.

 

1993년부터 네팔의 산업연수생들이 한국에 많이 들어오면서부터 시토울라는 언어가 다르고 생활습관이 달라 한국생활에 적응을 잘 하지 못하고 있는 네팔근로자들을 돕는 일을 시작했다. 그는 네팔인들 몇 명과 함께 “네팔소식”이란 작은 신문을 만들어 복사를 해서 네팔 근로자들에게 배부를 하고, 한편으로는 “재한 네팔 공동체”란 모임을 만들어 외로운 네팔인들을 돕기 시작했다. 그리고 2002년도에는 (주)네팔투어를 서울과 네팔에 설립하고 독자적으로 관광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또한 생소하기 그지없는 네팔이라는 나라를 한국인에게 제대로 알리고자 (주)네팔투어 사무실에 민간자격으로 네팔관광청한국사무소를 설치하였다.

 

“사연이 참 많군요. 그런데 관광청업무는 주로 정부에서 주도하여 하게 되는데 개인사무실에 네팔관광청한국사무소를 두고 있는 것도 특이하군요?”

 

“사실 한국에 네팔영사관조차도 없었던 데다가 네팔정부가 워낙 가난하다보니 개인자격으로 관광청업무를 시작할 수밖에 없었어요.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요. 정부의 지원이 전혀 없이 관광청 업무를 하다 보니 여러 가지 애로사항이 많을 수밖에 없었어요. 허지만 저는 이 일이 재미있었어요. 그래서 서울시의 가장 큰 문화행사인 ‘Hi Seoul Festival' 행사에 빠짐없이 참여를 해왔어요. 또한 해외 이주민들의 다문화 축제인 ‘마이그런츠 아리랑’에도 매년 참여를 하여 네팔을 한국에 알리고, 네팔노동자들의 화합과 사기를 높여주고자 노력을 해왔지요.”

 

▲서울시명예시민증을 받은 16명의 명예시민들과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는 시토울라씨(아래우측 세번째)

 

“듣자하니 네팔 근로자 찬드라 실종사건 때문에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면서요?”

 

“찬드라 사건만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나려고 해요. 1993년 11월 17일 네팔인 여성근로자 찬드라 그룽 실종 소식을 듣고, 네팔공동체와 함께 찬드라를 찾으려고 갖은 노력을 했지만 찾지 못하고 거의 포기를 한 상태였지요. 그로부터 6년이 지난 1999년도에 제가 재한 네팔인 공동체 총무를 맡고 있을 때 이근후 박사님(당시 이화여자대학병원 정신)과 동료 의사님들의 도움으로 용인의 어느 정신병원에 찬드라가 수용되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확인한 후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있는 찬드라를 적극 돕기로 결심을 했어요. 당시에는 외국인 이주노동자에 대한 한국정부의 시각이 좋지 않아 엉뚱하게 제가 감시대상이 되기도 하여 곤욕을 치르기도 했어요. 마침내 찬드라의 누명이 벗겨지고, 찬드라가 한국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하여 보상을 받아내어 조금은 위안이 되었지만, 지금도 찬드라 실종사건만 생각하면 참으로 가슴이 아파요.”

  

외국인 노동자 찬드라 구릉 사건은 "찬드라, 말해요(이란주 지음)"란 소설과 “믿거나 말거나, 찬드라의 경우(여섯 개의 시선, If You are Me 중, 박찬욱 감독)”란 인권다큐 영화로 우리에게도 이미 널리 알려진 바 있다. 찬드라 사건은 서울의 한 섬유공장에서 보조 미싱사로 일하던 네팔 노동자 찬드라가 공장 근처 어느 식당에서 라면을 시켜 먹다가, 뒤늦게 지갑이 없는 사실을 알고 계산을 하지 못하자, 식당주인이 그녀를 경찰에 신고를 하게되고, 출동한 경찰은 한국어를 더듬는 찬드라를 정신 행려병자로 취급해, 정신병원에 보내어 무려 6년 4개월 동안이나 억울하게 갇혀 지내야 했던 웃지 못 할 사건이다.

  

▲인권다큐영화 여섯 개의 시선 중 찬드라편에 직접 출연을 하고 있는 시토울라 씨

 

시토울라는 네팔신문에 찬드라는 정신병자가 아니라는 내용을 싣는 등 찬드라에 대한 진상을 알리고, 구명운동을 하다가 엉뚱하게 경찰의 감시대상이 되기도 하며 고초를 겪기도 했다. 그 이후 그는 찬드라를 소재로 한 인권 다큐영화에 직접출연을 하기도 했다.

 

“시토울라씨는 한국어를 한국인보다 더 잘하여 한국인지 외국인지 잘 구분이 안 될 정도에요. 그런데 한국어를 어떻게 공부하셨지요?”

 

“아직도 많이 부족해요. 한국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한국어를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독학으로 한국어를 정말 열심히 공부했어요. 그리고 매년 문화관광부에서 주최하는 ‘한국어 발표 대회’에 나갔어요. 한국어 발표 대회를 나가려고 하니 한국어를 더 열심히 공부를 하게 되고, 한국어실력이 자연히 늘더군요.”

 

 

  ▲자신이 경영하고 있는 네팔식당 옴에서 종업원들의 축하를 받고 있는 시토울라씨

 

시토울라는 한글학회와 문화공보부가 주최하는 한국어 발표대회에서 무려 세 차례나 수상을 하기도 했다. 그 덕분에 그는 네팔 고위 간부가 한국을 내한할 시에는 자연히 통역을 담당하게 되었고, 정부나 법원, 검찰청에 네팔인 관련 사건이 있을 때에도 통역을 자청하여 맡고 있다. 또한 한국어 네팔 여행 가이드북인 ‘세계를 간다(중앙 M&B)’를 번역 감수하기도 했으며, ‘이주노동자 문화가이드북-네팔 편(문화관광부)’을 번역 감수하기도 했다.

 

"서울시명예시민이 되신 시토울라씨는 앞으로 아주 한국에 귀화 하는 건 아닌지요?”

 

"그건 아직 우리부모가 원치를 않아 좀 더 생각을 해보아야겠어요. 저는 아직도 서울시명예시민이 되었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요. 그저 감개무량하여 자꾸만 눈물이 나려고 합니다. 찬드라에게 괜히 미안하기도 하고요. 앞으로 네팔 노동자들이 한국에 좀 더 잘 적응하고 그들의 고충을 돕는 일에 더욱 열심히 일을 해야겠다는 사명감을 갖게 되었어요. 또한 한국과 네팔 두 나라 간 문화교류 증진에 민간사절로서 역할을 적극적으로 해내야겠다는 막중한 책임감을 느낍니다.”

 

2007년도부터 정식으로 네팔 대사관이 개설된 한국에는 약 2300여명의 네팔인이 거주하고 있다. 지구촌에서 몇 번째 안가는 가난한 나라 네팔출신 시토울라가 한국에 첫발을 디딘지 17여년 만에 ‘서울시명예시민증’을 받은 의미는 크다. 외국인 이주 노동자 40만 명을 넘어선 다문화 시대에 접어든 한국도 이제 외국인 이주노동자에 대한 차별적인 시각을 버리고, 이들에 대한 처우도 개선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