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임진강일기

'깨가 쏟아진다'는 말, 꼭 좋은 말은 아니랍니다

찰라777 2012. 9. 9. 04:43

 

'깨가 쏟아진다'는 말, 꼭 좋은 말은 아니랍니다

-참깨 수확철 다가왔지만 텅 빈 농촌, 안타깝네요

 

지난 8월 30일, 아랫집 현희 할머니네 집에 태풍 피해가 없는지 궁금해 들렀다. 태풍이 지나갔지만 연일 비가 내리고 있었다. 두 부부는 마침 고추를 따서 말리고 있었다.

 

"이번 태풍에 큰 피해는 없는지요?"

"네, 벼가 좀 쓰러지기는 했는데 다행히 큰 피해는 없어요. 그런데 날이 개면 깨를 베야 해요. 그런데 사람을 구할 수 없어 큰일이군요."

 

▲일손이 모자라 베다 만 현희네 깨밭

 

비가 그치면 고추도 따고, 논에 농약도 쳐야 하는데... 참깨밭에는 깨가 익을 대로 익어 지금 수확하지 않으면 깨가 쏟아져 내려 큰일이란다. 돈 주고 일하는 사람을 구하려고 해도 모두 바빠 사람 구하기가 하늘에 별 따기란다. 두 부부는 나더러 "누구 일할 사람 있으면 좀 구해달라"며 울상을 지었다.

 

농사는 시기를 놓치면 안 된다. 현희네 깨밭은 바로 우리집 아래에 1000여 평 정도 되는데 내가 보기에도 깨가 아주 잘 여물어 수확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정을 보니 일을 할 줄 모르는 나라도 좀 도와줘야 할 형편. 깨를 베어내는 일은 기계로 할 수 없는 일이다. 깨를 베고 털어내는 일은 여전히 원시적인 방법으로 사람의 손을 빌려야만 한다.

 

▲고추도 따야 하고 깨도 베내야 하고 일손이 부족한 농촌현실. 현희 할머니가 고추를 따고 있다.

 

현희 할머니는 우리집 일이라면 팔을 걷어붙이고 도와주시는 분이다. 올해 초에 이곳 동이리에 이사를 온 뒤 텃밭을 가꾸다가 모르는 게 있으면 나는 늘 현희 할머니께 달려가 물어보고는 했다. 이번에 배추 모종과 무씨를 고르는 일도 손수 전곡 농약상에 함께 가서 골라 주셨다.

 

나는 그 자리에서 서울에 있는 친구 응규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침 친구가 전화를 받았다. 친구에게 현희내 집 전후 사정을 말했더니 일요일부터 시간을 낼 수 있단다. 내 친구 응규는 시골에서 농사를 지어봐서 어지간한 농사 일을 거의 곧잘 해낸다. 마침 현희 할머니와는 여러 차례 안면이 있어 서로 아는 사이기도 했다.

 

"일요일부터 서울에 있는 내 친구와 제가 좀 도와 드리죠."

"아이고, 그 친구 분이 도와주시면 너무나 고맙지요!"

 

 

'아차' 하면 우수수 쏟아지는 참깨

 

 

우리는 지난 2일 오전 7시부터 현희네 깨밭에 가서 깨를 베기 시작했다. 마침 비가 개어서 일하기에는 좋은 날씨였다. 그런데 깨를 베어내는 작업은 보기보다 쉽지가 않았다. 자칫 잘못하면 그 아까운 깨가 땅에 다 떨어지기 때문이다.

 

 

▲ 참깨를 베기 전에 먼저 거적을 깔아놓는다

 

현희 할머니는 작업 순서를 차근차근 설명했다. 먼저 큰 거적을 깨밭에 길게 깔아놓고 깨를 조심스럽게 베어낸 뒤 나란히 늘어놓는다. 경우에 따라서는 작은 거적에 베어내어 큰 거적에 옮겨 놓기도 한다. 그 다음에는 베어낸 깨를 적당한 크기로 묶는다.

 

 

 

▲ 깨를 베는 시범을 보여 주는 현희 할머니. 아차하면 깨가 다 솓아지므로 깨가 쏟아지지않도록 조심스럽게 베어내야 한다.

 

묶은 깻단은 자동차에 싣고 비닐하우스로 옮긴다. 노지에 말려도 되지만 혹시 비라도 내리면 깨알이 젖어서 썩기 때문이다. 비닐하우스로 옮긴 깻단을 4~5개씩 묶어서 세워둔다. 그렇게 해서 깨가 마르면 깨를 털어낸다. 우리가 먹는 고소한 참깨는 이렇게 여러 가지 작업을 거쳐 식단에 오르는 것이다.

 

낫을 들고 깨를 베어보니 그만 깨가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깨가 쏟아진다'는 말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인 것 같다. 하지만 아까운 깨를 땅바닥에 쏟아서야 되겠는가.

 

"어휴, 내가 깨를 베다가는 힘들여 지어놓은 깨 농사 다 망치겠어요."

"호호, 낫질하기가 그리 쉽지는 않지요. 그러니 저하고 같이 깻단을 묶는 일을 해요."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네요."

 

응규와 현희 할아버지, 그리고 조카 되시는 분은 깨를 베는 작업을 하고 낫질이 서툰 나는 현희 할머니와 깻단을 묶기로 했다. 깻단을 묶는 일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 베어낸 깨는 세워놓기 좋게 가지런히 묶어야 한다.

 

두 손으로 잡힐 정도로 깻대를 추려 깻단을 세워놓기 좋게 가지런히 묶어야 한다. 튀어나온 부분은 낫으로 잘라내고, 깻대 속에 있는 풀은 골라내야 한다. 그래야 깨가 잘 마른단다.

 

깻대에는 여러 가지 잡초가 섞여 있었는데 특히 메꽃·유영초가 문제였다. 이 풀들은 깻대 끝까지 휘감고 올라가 뜯어내기가 보통 힘든 게 아니었다. 잡초를 풀어내다 보면 깨가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아차하면 쏟아져 내리는 참깨

 

 

"이렇게 쏟아진 깨만도 상당하겠는데요?"

"네, 그래서 거적을 깔지요."

 

비가 오려는지 날씨가 무척 더웠다. 우리는 현희 할머니가 가져온 막걸리와 옥수수로 새참을 먹으며 잠시 휴식을 취했다. 밤나무 그늘 밑에서 먹는 새참 맛이 그만이었다.

 

 

▲ 밤나무 그늘에서 꿀맛같은 새참과 점심을 먹었다.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작업을 계속해 깨를 가까스로 다 베어냈다. 묶은 깻단은 비닐하우스로 다 옮겨놓고, 미처 묶지 못한 것은 거적으로 덮어놨다. 깻단을 묶고, 세우는 작업을 하는 데 하루가 걸릴 것 같았다.

 

현희 할머니는 저녁식사를 준비해 놓을 테니 함께 먹자고 했다. 일을 마치고 현희네 집으로 갔더니... 삼겹살과 밭에서 수확한 채소들로 푸짐하게 한 상 차려놓고 있었다.

 

"처음 해보는 일이라 힘들었지요?"

"네, 안 해본 일을 하다 보니 벌써 손이 까졌어요."

"아이고, 이를 어쩐담. 아주머니한테 혼나겠네요."

"괜찮아요. 덕분에 좋은 실습을 했는데요. 하하하."

 

저녁을 먹고 나니 졸음이 슬슬 몰려왔다. 적당한 육체노동을 한 후에 오는 나른함은 이래서 좋은 모양이다. 그러나 이날 작업량은 내게는 조금 과한 노동이었다. 다음 날 아침에는 오전 6시부터 작업을 하기로 했다. 날씨가 서늘할 때 작업을 많이 하기 위해서였다.

 

"마른 깨 털어내면 더 신나요... 보람 느끼죠"

 

 

▲ 베어낸 깨를 말리기 위해 비닐하우스로 옮겨 세워 놓는다.

 

 

다음날(9월 3일) 오전 6시에 응규와 함께 현희네 깨밭으로 갔더니 현희 할아버지가 벌써 와 계셨다. 이날 작업은 먼저 비닐하우스에 있는 깻단을 세우는 일부터 시작됐다. 바람이 통하지 않으면 눕혀놓은 깻단이 들뜨기 때문이다.

 

깻단을 4~5개 정도 한데 묶어 넘어지지 않게 세워놓기 시작했다. 비닐하우스 안에는 땅바닥에 거적을 전부 깔아놨다. 비닐하우스는 아침인데도 날씨가 더웠다. 비닐하우스에서 일을 하는 것은 참 어려운 작업이다. 양쪽 중간을 터놨는데도 숨이 막힐 정도로 더웠다. 재미있는 일은 깻단을 세울 때마다 깨가 툭툭 떨어져 내리는 것이다.

 

"정말 깨가 막 쏟아져 내리네요?"

"나중에 마른 깨를 털어내는 일은 더 신나요. 그때는 정말 깨가 우수수 떨어져 내리거든요.그래서 깨를 털다 보면 농사를 짓는 보람을 느끼게 된답니다." 

 

▲ 깻단 밑에 쏟아져 내린 참깨

 

 

▲ 거적에 떨어진 깨를 채로 걸러내는 작업

 

 

온종일 깻단을 묶고 세우는 일을 했다. 작업은 오후 5시에야 끝났다. 이틀간 안 하던 일을 하고 나니 온몸이 쑤시는 듯. 내 친구 응규는 일을 해본 가락이 있어서인지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현희 할머니는 오늘도 저녁식사를 대접하겠단다.

 

"내일은 비가 온다는데 두 분 덕분에 일을 다 마쳐서 저희가 너무 큰 득을 보네요. 정말로 감사합니다."

"비 오기 전에 일을 다 마치게 돼 저희들도 기분이 매우 좋군요."

"너무 힘들었지요? 제가 품삯을 두둑이 드릴게요."

"아이고, 그런 말씀 마세요. 현희 할머니한테 저희가 허구한 날 신세만 지는데요. 농사 실습도 잘하고 맛있는 음식도 먹고 이걸로 충분합니다."

 

 

 

▲ 비닐하우스에 건조하기 위해 세워놓은 깻단

 

현희 할머니는 "참깨를 수확하면 꼭 보답을 하겠다"며 고마워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무엇보다도 비가 오기 전에 깨를 거둬들인 것이 안심이 되고, 기분이 좋은 모양.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니 친구와 나도 괜히 흐뭇하고 일한 보람이 생겼다.

 

일할 사람 없는 농촌... 사라져가는 공동체 의식

 

저녁식사를 마치고 집으로 걸어오면서 마음이 뿌듯하고 정체 모를 행복함이 가득찼다. 이게 공동체 의식일까. 이웃이라곤 없는 이곳은 오직 현희네 집과 이장님 집이 100m 거리에 있을 뿐이다. 그러니 자연스레 나는 두 집과 소통하며 지낸다. 농사에 대해서는 왕초보인 나는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두 집에 가서 묻고 도움을 받는다. 그러니 두 집에 내가 도울 일이 있다면 응당 도와줘야 한다는 생각이다.

 

 

▲ 일을 마치고 현희네 집에서 준비한 푸짐한 음식으로 저녁을 먹었다.

 

우리 농촌에는 공동체 의식이 점점 희박해지고 있다. 젊은이들은 모두 도시로 떠나고 힘든 일은 농기계가 대신해 주고 있다. 동이리 마을에도 대부분 노인들만 살고 있다. 그래서 노동력이 없다. 모두가 자기 일을 하기에도 바쁘다.

 

기계에 의존할수록 일은 편해질지는 모르지만, 수확의 허실은 많아지고 공동체 의식은 사라진다. 급기야는 '이기주의'가 마을 안에 퍼지기 시작하기도 한다.

 

여행을 하다보면 지구상에는 아직도 공동체 생활을 하며 행복하게 지내는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인도의 라타크 사람들이나 페루 티티카카 호수에 있는 타킬레 섬사람들은 아직도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다. 타킬레 섬에 살고 있는 케추아 원주민들은 모자·장갑 등 수공예품을 뜨개질을 해 얻은 수익금을 공동으로 분배한다.

 

▲ 묶은 깻단을 비닐하우스로 옮기고 있다.

 

 

작은 섬에는 전기나 수도, 자동차도 없다. 모든 물자는 자급자족과 물물교환으로 조달한다. 주민들은 서로 돌아가며 일을 나눠 맡고, 생산물과 수입은 공동으로 분배한다. 한 달에 한 번씩 주민 전체가 모여 회의를 해 섬의 주요 사항을 결정한다. 그래도 섬 사람들은 매우 행복해 보였다.

 

그러나 우리네 농촌은 어떤가. 젊은이들을 찾아보기 어렵고 대부분 노인들만 마을을 지키고 있다. 기계화가 되면서 공동체 의식은 희박해지고 마을 인심은 각박하게 변해가고 있지 않은가.

 

※덧붙이는 글

현희네 참깨 베어내기를 이틀간 한 후 다음날(9월 4일) 아침 비가 내렸습니다. 비가 오기전에 참깨를 비닐하우스에 건조하게 되어 무척 기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