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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도한 모과나무 기둥이야...화엄사 구층암

찰라777 2015. 1. 28. 09:34

 

살아서 향기를 품어내고

죽어서 암자기둥이 되었네

삶과 죽음의 경계는 어디에 있고

도(道)는 어디에 있는가?

죽로차 한잔에 도가 있다네!

 

 

 

 

 

▲죽어서 암자 처마를 받치고 있는 모과나무 기둥

화엄사 뒤뜰을 지나면 구층암으로 가늘 오솔길이 있습니다. 대나무 숲속으로 난 길은 스님들께서 묵언정진을 하며 걷는 호젓한 길입니다. 이 묵언길을 걷다보면 정말 세속을 떠난 느낌이 듭니다. 계곡물소리, 바람소리만 들리는 대나무 숲 터널을 10여 분을 걸어가면 구층암이 수줍은 자태로 나타납니다.

 

 

 

 

"바로 이런 집이야. 내가 살고 싶은 집이……."

 

화려함을 배제한 단아한 절집 풍경이 딱 마음에 듭니다. 반은 허물어진 구층암 석탑이 오래된 절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신라시대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석탑은 당시에는 9층으로 건축되어 구층암이라는 이름이 생겼을 것입니다.

 

 

 

석탑 뒤로 하얀 회벽을 바른 아담한 승방이 나타납니다. 앞에서 보면 평범한 승방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승방을 돌아서 옆으로 들어가면 너를 마당과 두 개 요사채를 사이에 두고 1000구의 부처님을 모신 천불보전이 나옵니다. 천불보전 앞에는 수령을 알 수 없는 모과나무가 다리를 꼬아 뒤틀고 서 있습니다. 그 모습이 꼭 가부좌를 틀고 선정에 들어 있는 듯한 모습입니다.

 

 

 

 

▲천불보전 앞에 살아있는 모과나무

 

그러나 살아있는 모과나무보다는 천불보전 우측에 승방 처마를 받치고 있는 두 개의 죽어있는 늙은 모과나무 기둥이 더욱 이색적으로 다가옵니다. 늙은 고승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모습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해탈의 경지에 서 있는 나무라고나 할까요? 작은 석등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늙은 모과나무 기둥과 살아있는 젊은 모과나무 기둥을 바라보고 있으면 묘한 느낌이 듭니다. 이미 득도를 한 늙은 모과나무가 젊은 모과나무에게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가르쳐 주고 있는 모습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이 늙은 모과나무 기둥은 구층암 뜰에 자라던 모과나무가 죽어서 그대로 기둥이 된 것입니다. 동편에 자라던 모과나무는 동쪽 승방의 기둥으로, 서편에 자라던 나무는 서쪽 승방의 기둥으로 다시 뿌리를 내리고 서 있습니다.

 

 

 

인간의 손끝을 전혀 대지 않고 본래 자라났던 나무 모습 그대로 기둥으로 옮겨 놓은 모습입니다. 모과나무는 아직도 밑 둥은 주춧돌에 뿌리를 내리고, 위는 서까래에 가지를 뻗고 있는 듯 합니다.

 

오래된 고목은 뼈마디를 드러낸 채 나뭇가지의 흔적, 나뭇결과 옹이까지도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단층도 하지 않은 처마와 서까래를 받치고 있는 모습이 놀랍기만 합니다. 그 나무 기둥 사이에 앉아 있으니 저절로 선정에 들어가는 듯합니다.

 

 

 

 

 

모과나무 기둥에 기대 앉아 죽로차를 마시며 다담을 하기에 딱 좋은 분위기입니다. 구층암은 죽로 야생차를 맛볼 수 있는 절집입니다. 승방 문틀 위에 걸어진 다향사류(茶香四流: 차 향기가 사방에 흐르네)란 현판이 찻집 분위기를 한껏 풍겨주고 있습니다. 구층암에서는 대나무 그늘에서 이슬을 머금고 자란 죽로차를 제다를 하여 선을 보이고 있습니다.

 

구층암 건물은 남쪽과 북쪽 어느 방향에서 보아도 정면이 되는 특이한 구조를 띠고 있습니다. 남북 양쪽에 각각 독자적 출입문과 마루, 독립된 마당까지 갖추고 있습니다. 남쪽에서 바라보면 남향집이 되고, 북쪽에서 바라보면 북향집이 됩니다.

 

이렇게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 건물에 모과나무 특유의 울퉁불퉁한 수피와 옹이까지 그대로 살려 기둥으로 삼은 모습은 과히 파격적인 발상입니다. 살아있는 모과나무를 있는 그대로 뽑아내어 그대로 기둥을 받쳐놓은 모습니다.

 

모과나무는 재질이 치밀하고 단단해 과거에 화초장 같은 고급 가구용으로 쓰였다고 합니다. 화엄사에 전해 내려오는 말에 따르면 임진왜란 때 화엄사의 모든 암자가 불에 타면서 근처에 있던 수령 수백 년이 넘은 모과나무들도 화를 입었다고 합니다.

 

천불보전 앞에는 살아있는 모과나무가 몸을 뒤틀며 힘차게 자라나고 있습니다. 죽어서 온 몸으로 지붕을 받치고 있는 모과나무와 살아서 진한 향기를 뿜어주고 있는 모과나무를 바라보면 묘한 생각이 듭니다. 어찌 보면 죽어서 암자의 기둥이 된 모과나무가 오히려 더 생동감이 넘치게 보입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는 어디에 있는가?"

 

모과나무를 바라보면 문득 이런 화두를 던져줍니다.

 

 

천불보전 왼편에 있는 요사는 팔작지붕에 정면 다섯 칸의 기와집이 시원스럽고 단아한 기품으로 서 있습니다. 잡석으로 단을 쌓고 그 위에 초석을 놓아 기둥을 세운 모습이 매우 검소하게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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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칸의 집에는 창살문이 예스런 풍경을 보여주고 모과나무 기둥 하나가 중심을 잡고 처마를 받치고 있습니다. 꾸미지 않는 자연그대로의 조화로움이 단연 돋보입니다.

 

 

 

살아있는 모과나무를 지나 천불보전으로 다가 가봅니다. 천불 보전 문틈으로 1000구의 작은 토불(土佛)이 앞 다투어 밖을 내다보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토불에 합장배례를 하고 처마를 올려다보니 용을 조각한 모습이 해학적으로 다가옵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토끼와 거북'을 조각한 모습도 보입니다. 이는 토끼와 거북이가 반야귀선(般若龜船)을 타고 불국토로 가는 모습을 형상화 한 것이라고 합니다.

 

 

 

구층암은 자연을 그대로 닮은 암자입니다. 산 것도 죽은 것도 자연을 거스르는 일이 없이 자연 그대로 보존 된 곳, 이런 집에서 세월을 잊고 살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납니다. 나는 한동안 그렇게 모과나무 기둥에 앉아 있다가 대숲을 흔드는 바람소리를 들으며 묵언길을 따라 내려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