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방랑/80일간의티벳일주

붓다 열반지, 쿠시나가르 사라나무 아래서...

찰라777 2022. 12. 22. 07:35

아아, 부처님이시여 어디에 계시나이까?

 

6월 5일

룸비니에서 쿠시나가르까지

 

 

 

부처님 탄생지 룸비니에서 출발하여 걸어서 인도 국경을 건너갔다. 인도 국경 소놀리(Sonauli)는 인도인과 네팔인들이 자유롭게 국경을 건너 다시고 있었다. 부처님께서도 이 길을 숱하게 걸어 다녔으리라 생각하니 왠지 가슴이 벅차오른다.

 

6월은 인도에서 가장 더운 달이라 강렬한 햇볕과 높은 기온 때문에 숨이 턱턱 막혔다. 무거운 배낭을 앞뒤로 걸머진 아내의 모습이 순례자처럼 보였다. 그래도 마음만은 즐거운지 입가에는 미소가 흐른다. 고행은 때로는 즐거운 추억과 깨달음을 준다. 길 위에 서면 잡생각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소놀리 국경을 건너서 쿠시나가르로 가는 버스를 탔다. 버스는 냉방시설도 없는 일반 완행버스였다. 덥고 후 지근한 바람이 온몸을 덮쳤다. 인도의 시골 풍경은 변함이 없다. 아이들은 순박해 보이고 눈동자는 수정처럼 밝게 보였다. 원시적인 시골 풍경, 꾸미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다. 붓다의 탄생지에서 열반지로 가는 긴 여정이었다. 2500년 전 부처님은 룸비니에서 쿠시나가르까지 걸어서 다녔던 고행의 길이다. 그러니 버스를 타고 가는 주제에 부처님을 생각하면 고행이라고 할 수 없다. 구도의 길, 깨달음의 길, 설법의 길… 붓다에게는 실로 80년이란 긴 여정이었다.

 

고락푸르Gorakhpur에서 쿠시나가르로 가는 버스를 갈아탔다. 버스는 덜컹거리며 느리게 달려갔다. 꼬박 10시간이 걸려 부처님의 열반지 쿠시나가르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려 한국절 대한사를 찾아갔다. 한국절이 반갑기도 하고 혹시 하룻밤 머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었지만 절에는 아무도 없었다.

 

열반당 인근에는 여러 나라의 절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하는 수 없이 우리는 열반당으로 가다가 티베트 절이 보여 안으로 들어가니 마침 라마 스님이 계셨다. 합장하고 하룻밤 머물 수 없느냐고 물었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스님이 안내해준 요사에 짐을 부려 놓고 바로 열반당으로 갔다.

 

 

푸른 초목이 우거진 길을 따라가니 동그란 지붕에 아담한 열반당이 보였다. 아아, 부처님이 마지막 숨을 거둔 땅에 도착하다니… 사라나무(단단한 나무라는 뜻. 인도에선 신성한 나무로 여긴다) 사이로 보이는 열반당을 바라보니 감회가 남달랐다.

 

오늘따라 열반당에는 아무도 없고 고요했다. 아내와 나는 신발을 벗고 합장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붓다가 한 손으로 머리를 베고, 두 발을 포갠 채 누워 있었다. 1500년 전에 조성했다는 열반상은 6.1m 길이의 황금상이었다. 우리는 부처님 열반상 앞에 엎디어 오체투지 삼배를 했다. 눈물이 쏟아 질 것만 같았다.

 

 

붓다는 쿠시나가르에 오기 전 “열반한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며 자신의 죽음을 예고했다. 우안거가 끝나자 붓다는 바이샬리를 뒤돌아보고 여래가 바이샬리를 보는 마지막이 될 것임을 예고했다. 붓다는 파바(Pava)에서 잠시 춘다(Cunda)의 망고숲에 머물렀다. 춘다는 대장장이의 아들이었다고 한다. 붓다가 자기 집 근처를 지난다는 소식을 들은 춘다는 매우 기뻐하며, 붓다 일행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 그리고 정성껏 만든 음식으로 공양을 드리고 붓다에게는 특별히 진귀한 수까라 맛다바요리를 대접했다. 수까라는 돼지라는 뜻이며, 맛바다는 부드럽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 음식의 이름은 돼지고기 또는 부드러운 버섯으로 받아들여졌다.

 

붓다는 춘다의 공양을 받고 카쿠타Kakuta강에서 목욕을 하고, 몹시 지쳐 강변에 누워 아난다에게 물었다.

“지금 춘다는 어떠냐?”
“춘다는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춘다가 부처님께 공양을 올렸지만 공덕은커녕 해가 되었다고 대중이 말합니다.”

“춘다를 이리 오라고 해라.”

춘다가 오자 붓다는 아난다에게 물었다.

“아난다야,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공덕이 있는 공양은 무엇인가?”

“그것은 수자타의 공양입니다.”

“이 세상에는 그와 같은 공덕이 있는 공양이 또 하나 있다. 그것은 여래가 열반에 들기 직전에 먹은 공양이다.”

 

 

춘다의 공양을 받고 부처님이 죽게 되었으니 춘다에게 공덕이 없다고 생각하기 쉽다. 춘다는 예수님을 죽게 만든 가롯 유다와 같은 사람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부처님은 이렇게 말했다.

"이 세상에 가장 큰 공덕이 있다면 그것은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의 공덕이다. 그리고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 중에도 가장 공덕이 큰 공양이 있다면, 정각을 얻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먹은 공양과 열반에 들기 직전에 먹은 마지막 공양이다."

수자타가 올린 공양의 공덕은 수자타를 위대하게 만들었으나 춘다의 공양은 부처님을 위대하게 만들었다. 육신이 부처가 아니라 그런 자비심을 내는 것이 바로 부처다.

 

춘다의 공양을 받은 붓다는 짐작하건대 식중독에 걸리고 말았다. 팔리어 경전에는 “죽은 것 같은 고통에 시달리며, 피가 나오는 설사병을 앓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파바 마을에서 쿠시나가르까지는 20km에 달한다. 붓다는 그 길을 걸으며 무려 스물다섯 번이나 쉬었다고 한다. 붓다는 아픈 몸을 이끌고 쿠시나가르의 사라나무 숲에 도착했다. 지금 열반사의 자리다.

 

 

붓다는 가사를 깔고 자리에 누웠다. 그때 사라나무 꽃잎이 비처럼 내렸다고 한다. “사라나무 신들이 내게 공양을 했다. 그러나 이것은 여래를 진정으로 고양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 어떤 것이 여래를 공양하는 것입니까? “수레바퀴만 한 아름다운 꽃을 붓다에게 뿌린다고 해도 그것만으로 공양이라 할 수 없다. 나라는 실체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최상의 공양이다.”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꽃은 허무한 것이며, 논에서 보이지 않는 깨달음의 꽃이 최상의 공양이라는 붓다의 가르침은 위대하다. 제행이 무상함을 깨달은 자만이 비로소 여래를 보기 때문이다.

 

붓다는 열반당이 들어선 사라나무 아래서 마지막 가르침을 남겼다. 아난다가 슬퍼하며 붓다에게 여쭈었다.

"나는 아직 배워야 할 것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제 스승께서 사라지시면 저는 어찌합니까."

“아난다여, 슬퍼하지 마라.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사랑하는 것들과 이별하게 되어 있다. 너희들은 저마다 자신을 등불 삼고 자기를 의지하라. 또한 진리를 등불 삼고 진리를 의지하라. 이 밖에 다른 것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 모든 것은 덧없으니,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라.”

붓다는 이 마지막 가르침을 남기고 80세를 일기로 최후를 맞이했다.

 

 

다음 날 아침에는 붓다를 다비한 라마브하르Ramabhar Stutp로 갔다. 2500년 전, 이곳에서 다비식을 하려고 장작에 불을 붙였는데 불이 붙지 않았다고 한다. 수제가 마하 가섭이 도착하자 비로소 불이 붙었다고 한다. 가섭이 다가가자 붓다의 두 발이 관 밖으로 나왔다고 한다. 가섭은 거기에 이마를 댄 뒤, 관 주위를 시계 방향으로 세 바퀴 돌았다.

 

다비장에서 우리는 다시 열반당으로 갔다. 붓다를 다시 한번 뵙기 위해서였다. 나는 부처님 발바닥을 두 손으로 받들어 만지며 3배를 올렸다. 가슴 속에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붓다는 말이 없었다. 아아, 붓다는 어디로 가셨을까? 별이 되어 하늘에 계실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