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우리강산/서울

문주란

찰라777 2009. 7. 2. 14:31

문주란 꽃대를 바라보며...

 

 

 

 

 

 

 

심심하고 무더운 여름 날, 녹차를 끓여 한 그릇 사발에 따라 마시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번개가 불의 칼처럼 하늘을 가르더니 먹구름 속에서 천둥이 우르르 꽝꽝 쳐대기 시작했다.

 

창밖이 갑자기 한 밤중처럼 어두워 졌다. 녹차 사발을 들고 베란다로 나가 하늘을 쳐다보았다. 번개는 계속 하늘에서 난잡하게 칼춤을 추었다. 천둥이 먹구름 속에서 쿵쿵쿵 울리더니, 이윽고 굵은 빗방울이 유리창을 사정없이 때렸다.

 

고개를 돌려 무심코 베란다 구석에 쳐 박아 놓은 문주란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 무슨 변고인가? 꽃대가 올라오지 않아 밉다고 베란다 한쪽으로 치어 놓았던 문주란이었다. 문주란은 잎새 한 가운데에서 보란 듯이 꽃대를 쑥 내밀고 있었다. 녀석은 성질이라도 난 듯 사납게 미역줄처럼 널따란 잎새를 재치고 힘차게 하늘을 향해 분기탱천하고 있었다. 그 모양이 마치 말 xx를 연상케 했다. 

 

 나는 넋이 나간 듯 문주란 꽃대를 바라보다가 하마터면 녹차사발을 떨어뜨릴 뻔했다. 어쩌면 저렇게 힘차게 솟아올라 올까? 이 문주란이 우리 집으로 온지는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아마 25년은 족히 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문주란은 어떤 해에는 꽃이 피고 어떤 해에는 꽃이 피지 않기도 했다. 직장에 다닐 적에는 바쁘다는 핑계로 집 안에 있는 꽃들을 살펴 볼틈도, 관심도 별로 없었다. 그러나 명퇴를 하고 집에 있다 보니 자연히 베란다에 자라나는 꽃들에게 저절로 관심이 갔다. 물도 주고 거름도 주어야 꽃들이 피어났다. 말하자면 꽃들도 여자처럼 보살펴 주어야 예쁘게 꽃도 피어주고 향기도 내 품어 주는 것이다. 저 문주란도 그 중의 하나였다.

 

 

 

으르렁 거리던 천둥이 자고 갑자기 해가 솟아 나왔다. 햇볕이 쬐자 살짝 창가에 기대듯 서 있던 문주란 꽃대는 코브라처럼 트위스트를 추더니 똑바로 섰다. 녀석은 말의 그것이 분기탱천하여 절정에 달한 것처럼 탱탱했다. 어찌 보면 약이 바싹 오른 코브라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여간 힘이 넘쳐흐르는 모습이었다. 겉모양은 퍼렇지만 아마 속은 젊은 피로 지글지글 끓고 있는 것 같았다.

 

저녁이 되자 녀석은 허리를 고추 세우고 마치 잠을 자듯 창가로 살짝 기대어 섰다. 허참, 나! 그리고 다음날 해가 뜨면 다시 코브라처럼 머리를 고추 세우기를 반복했다. 그러면서 녀석의 꽃대는 성난 말 그것처럼 점점 길어져 갔다.

 

 

 

  

 그러던 어느 날 녀석은 겉껍질을 허물을 벗듯 살짝 벌리며 안쪽에 있는 꽃잎 봉오리를 슬쩍 내 비치고 있었다. 녀석의 꽃대를 발견한지 5일 뒤였다. 꽃이 당장이라도 피어날 기세였다.

 

손으로 벌려 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지만 참았다. 녀석의 자태는 요염했다. 그런 문주란을 두고 지방에 볼일이 있어 하루를 비워야 했다.

 

 

 

 

지방에서도 나는 녀석이 어떻게 변했을까 하는 생각 때문에 좀이 쑤셨다. 꽃잎이 피어났을까? 아니면 아직도 그대로 있을까? 녀석이 보고 싶어 안달이 나서 일을 보는 둥 마는 둥 마무리하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베란다로 달려가 문주란을 바라보았다.

 

아이고, 저런! 녀석은 이미 겉 허물을 벗어던지고 원기둥 모양의 비늘줄기 끝에 비녀처럼 생긴 피침형의 꽃잎을 송골송골 내밀고 있었다. 옥비녀 같은 잎이 얇은 비늘줄기를 젖히고 점점 사방으로 펴져 나와 있었다.

 

꽃잎을 새어보니 18개였다. 끝이 뾰쪽하고 가장자리는 밋밋하여 주름을 이루고 있는 모습이 꼭 여인의 머리칼에 꽂은 옥비녀를 닮았다. 오후가 되니 꽃잎은 점점 젖혀져 늘어지기 시작했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뾰쪽한 비녀 끝에서 드디어, 하얀 꽃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꽃이 피어나는 속도를 느끼는 순간이다! 녀석들은 원추형의 가장자리에 있는 잎들부터 먼저 피어났다. 안쪽에 있는 잎들은 비녀 형태로 가지런히 하늘을 향해 있었다. 한 비녀마다 여섯 개의 가는 꽃잎이 유연하게 뒤로 젖혀지며 피어났다. 꽃 조각마다 노란 왕관 같은 꽃가루를 단 꽃술이 강한 향을 뿌려댔다. 그리고 산형꽃차례 가운데는 한 개의 암술이 솟아났다. 짙은 향기가 코를 찔렀다.

 

 

 

 

다시 하루가 지나자 이젠 9개의 옥비녀가 나선형으로 젖혀지며 마치 '하얀 머리 앤'처럼 거대한 한 송이 꽃봉오리를 이루었다. 문주란 꽃대는 처음에는 하늘을 향해 힘차게 분기탱천을 하다가 마지막에는 하얀 머리를 풀어 헤치고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는 여인처럼 변해갔다. 아마 내일쯤이면 18개가 다 피어날지도 모르겠다. 그 꽃대의 두근거림에 마음이 괜히 설레인다.

 

문주란은 남성인가 여성인가! 문주란 꽃대는 남성으로 피어났다가 여성으로 변하는 트레이드 젠더다. 문주란 꽃말이 '정직, 순박'이라고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청순하지만 트레드 젠더 같은 변덕쟁이처럼 보인다.

 

문득 고진하 시인의 '문주란'이란 시가 떠올랐다.

시인의 꾸밈없는 표현이 정직한 문주란을 닮아서 좋다.

  

 

문주란

-고 진 하

 

뜨락에 핀 꽃들을 보며 훤한 대낮부터 곡차 한 사발씩 벌컥벌컥 들이켰다. 모두들 벌게진 눈길로 길쭉길쭉한 푸른 잎새들 사이에서 말 자지 같은 긴 꽃대를 하늘로 쑥 뽑아 올린 문주란을 감상하고 있는데, 훌떡 머리 벗겨진 중늙은이 居士가 문주란을 가리키며 이죽거렸다. 이년 저년 집적거리지 말고 문주란처럼 좆대를 하늘에다 꽂아, 하늘에다 말이야!

 

대머리 거사의 일갈 때문일까. 문주란이 놓여 있는 뜨락 위의 하늘이 어느 때보다 더 깊고 쨍쨍해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