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우리강산/백두산대장정

일본인과 함께한 고구려 도읍지 국내성

찰라777 2009. 9. 4. 07:09

 고구려의 찬란한 문화유적이 숨쉬는 집안

 

 

 ▲집안(集安) 시에 남아있는 국내성터. 국내성은 400년간 고구려의 수도역할을 하며 찬란한 문화를 이룩하였다.

 

일본사람이 백두산을 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는 나카무라 

 

아침일찍 단동을 출발하여 붉은 옷수수밭을 달려 도착한 곳은 고구려의 혼이 살아 숨쉬는 집안시. 우리일행중 특이한 점은 일본인이 한사람 끼었다는 사실. 그는 일본 대사관에 근무를 하는 나카무라라고 하는  남자인데 백두산에 관심이 많아 휴가를 얻어 이번 투어에 참여를 했다고. 

 

"나카무라, 어떻게 혼자서 백두산을 갈 생각을 했지요?"

"전부터 백두산에 대하여 관심이 많았어요. 그러나 일본 사람이 백두산을 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기도 하겠군요."

 

사실 일본인 하눅인 틈에 끼어 여행을 한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더구나 이 곳 만주는 일제의 침략을 받아 원한이 많은 지역이 아닌가? 나카무라는 한국말도 곧잘하고 마음이 근본적으로 착해 무엇이든지 협조적이었다. 우리일행과 함께 어울려 식사시간에는 소주도 한잔하고, 한국생활에 대하여 이야기도 하였다. 그는 한국생활이 편하다고 했다.

 

아내와 두 아이를 둔 그는 현재 2년째 한국에 근무를 하고 있다고 했다. 북한이 고향인 안내자와 우리 일행은 일본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때에는 다소 주춤거릴 수밖에 없었다. 함부로 일본을 욕하거나 막말을 할 수없는 형편. 과거를 잊어버리지는 말아야 겠지만 현재 우리와 함께 여행을 하고 있는 인간 나카무라를 곤란하게 해서는 안 될 일이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영광이 찬란했던 국내성터

 

집안(集安)시는 고구려의 옛 수도였던 국내성의 현재 지명으로 길림성 동남쪽에 위치한다. AD 3년경 고구려 제 2대왕인 유리왕이 졸본성에서 국내성으로 천도하였는데 427년까지 가장 오랜기간(424년) 수도로서  찬란했던 번성기를 누렸던 만큼 1만여개의 고분과 수많은 유적지가 남아있어 이곳이 국내성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거의 없다.

북온대 대륙성기후로 사계절이 뚜렷하고 연평군기온은 6.5℃이며, 강우량은 약 1000㎜ 정도이다. 유구한 역사가 말해 주듯 압록강과 훈강 수로의 교통, 내륙과 연결되는 육로 및 북한과 이어지는 철도 등이 잘 발달되어 있으며, 유서 깊은 역사의 도시로 널리 알려져 있다. 집안시에는 저 유명한 광개토대왕비, 태왕릉, 장군총 등 고구려의 많은 문화 유산이 산재하고 있어 융성했던 시대의 발자취를 보여준다.

 

 

 

그러나 고구려의 2대 유리왕이 수도를 천도한후 400년간 영화를 누렸던 집안시의 국내성터는 상상했던 것보다는 너무도 초라했다. 유리왕 22년, 서기 3년부터 장수왕이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기 전인 427년까지 약 400여년동안 고구려의 수도가 자리했던 영광의 곳이다.

졸본성에 이은 고구려 제2의 수도였던 국내성은 사각형 방형으로 북쪽 우산과 서쪽 칠성산에 에워싸인 배산임수의 천연요새이다. 압록강 서쪽에 위치한 국내성은 총면적 13,000평, 성길이 2,686m, 높이 1~5m로 총6개의 성문과 해자가 갖춰져 있었다.

 

그러나 1921년 중국정부에서 성을 개수하면서 옹성의 모습은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 버렸다. 또한 동서남북에 각각 세워져 있던 성문마저 1947년 중국공산당과 국민당의 전투 때 소실되었다. 원래 성벽의 높이는 7m였으나 거의 훼손되어 없고 현재 민가가 있는 남서쪽 성벽 3~4m 와 아파트 건물 사이에 위치한 벽 4~5단만이 겨우 남아있을 뿐이다.

 

 

 

 

그래도 집안시  중앙에는 고구려의 공원이 있었다. 붉은 글씨로 고구려 유적지 공원이라고 바위에 새겨 놓은 글씨가 그나마 고구려의 혼을 말해주고 있었다. 이곳이 우리민족의 가장 번성했던 영화를 누렸던 지역인데 지금은 중국의 일개 처라한 유적지로 변화되어 버린 모습을 바라보는 마음은 슬프다.

 

 

 

 

 

 

 

진주불고기집의 한국음식과 야시장

 

국내성터를 돌아본후 우리는 '진주 불고기집 '이라고 간판이 붙은 북한 음식점으로 들어가 불고기 정식을 먹었다. 북한 동포가 경영하는 이 불고기집은 부드러운 소고기에 상치, 마늘, 김치, 고추 등 한국식을 음식을 내 놓았다. 음식은 정갈하고 맛이 있었다. 우리민족, 우리땅, 우리말, 우리 음식... 아아 같은 핏줄을 나눈 민족이 분리되어 있는 현실이 잘 믿기지가 않았다.

 

 

 

 

 

점심을 먹은 후 우리는 집안시 야시장에 들렸다. 야시장은 우리나라 시골 장터를 방불케 한다. 여러가지 물건이 시골스럽게 널려있고, 사람은 순하다. 택시는 앙증맞고 작다. 우리나라 티코 수준의 택시가 이곳 집안시에는 툭툭이처럼 달려 다닌다.

 

 

 

 

무엇보다도 우리들의 눈과 입, 코를 즐겁게 하는 것은 무공해 과일들이다. 농약이 비싸 그대로 야생 재배를 한다는 광일들이 무더기로 쌓여 있다. 과일은 투박하고 생김새도 껄껄하게 생겼지만 맛은 좋다. 거기에다가 값은 엄청 싸다 중국돈 10위엔만 주면 한 무더기를 준다. 사과, 참외, 수박, 석류, 꽈리, 복숭아, 귤,자두, 이름을 알 수 없는 광일도 있다. 보기만 해도 군침이 나온다.

 

저마다 과일 한봉다리를 산 후 우리는 광개토대왕비와 장수왕릉을 보기 위해 버스를 탔다.

 

 

 

 

 

 

 

 

 

 

 

(백두산 가는 길에 집안시에서 2009.8.26 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