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우리강산/백두산대장정

방탄유리 속에 갇힌 광개토대왕비

찰라777 2009. 9. 5. 07:14

 아아, 광개토대왕!

 

 

 

 

방탄유리속에 갇힌 광개토대왕비

 

잡안은 한국 고대사의 비밀을 쥐고 있다. 400년간의 찬란한 고구려 문화가 숨쉬고 있는 집안은 도시전체가 고구려 박물관 같은 느낌을 받는다. 광개토왕릉비, 장군총, 수백개가 넘는 고구려 고성, 국내성터... 집안은 고구려 역사박물관이라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8월이지만 벌써 날씨가 서늘하다. 고추 잠자리들이 욱수수밭을 빙빙 돌며 날아다닌다. 집안시에서 불과 몇분만에 도착한 광개토대왕비. 버스에서 내려 대왕비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우산나무들이 보초를 서듯 도열해 있었다. 우산나무 길을 지나니 중국식 사당지붕을 한 유리집이 하나 나온다. 언덕에 그냥 세워져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것과는 상상을 초월하는 모습이다. 유리 우리속에 갇힌 광개토대왕 탑.

 

 

▲광개도대왕비로 가는 길에 도열해 있는 우산나무

 

"중국정부에서 광개토대왕비를 보존 하느라 방탄유리로 사방을 막아놓았습니다. 안에 들어가 볼 수는 있지만 사진을 찍을 수느 없습니다."

"무엇때문에 방탄 우리까지 해 놓았지요?"

"동북 공정에 신경이 날카로워진 중국정부는 혹시 한국측에서 대왕비를 폭파해 버릴수도 있다는 우려를 하고 있대요. 자신들의 호태왕비가 파괴되는 것을 염려하여 방탄유리로 막았다는 겁니다."

"헛헛, 그건 오히려 보존을 잘 해주니 우리가 고맙다고 생각을 해야 겠네."

"그런데 중국은 중국대로 일본은 일본대로 광개토대왕이 자신들의 족장이라고 우기고 있다는 사실이지요."

"참 기가막히군. 고구려의 왕을 자신들의 족장이라고 여기다니..."

 

 

유네스코문화유산에 등록된 광개토대왕비 

 

 

▲중국에서는 호태왕으로 기록하고 있다. 

 

아아,광개토대왕이시여!

 

우리는 단동에서 집안까지 오는 버스에서 유인촌 씨(현 문화부장관)가 설명하는 '이것이 알고 싶다'란 프로그램에서 광개토대왕비에 대한 설명을 비디오 테이프로 관람을 했다. 고구려의 유적 현장을 답사하며 들어보는 설명은 귀에 쏙쏙 들어왔다.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는 우리 역사상 최고의 정복군주, 가장 위대한 고구려의 왕으로 칭송받는 고구려 19대 광개토대왕의 능비로서 높이가 6.39m에 이르고 무게가 37톤으로 추정되는 세계적 규모를 지니고 있다.

 

414년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사후2년)이 세웠으며 높이만 3층 건물과 맞먹고, 방추형의 자연석으로 만들어진 비석의 배면 너비는 1.46미터, 1.35미터 2미터 1.48미터로 각 면이 다른 크기와 문양을 지니고 있다. 땅에 비석을 고정시켜 주는 대석과 비문을 새겨진 비신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대석은 길이 3.35m, 너비 2.7m의 불규칙한 직사각형이고, 두께는 약 20cm이나 고르지 않으며 비신에는 총 1775자의 비문이 음각되어 있다. 개석 (蓋石)이 없는 고구려 석비 특유의 형태라고 한다.

 

고구려 특유의 호방한 필체로 쓴 비문은 현재까지 한,중,일 학자들에 의해 약 1500여자 정도가 해석되어져 있는데 내용은 크게 고구려 건국과정과 광개토대왕의 대외 정복사업과 업적, 수묘체계 등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라는 광개토왕의 시호(諡號)를 따라 중국에서는'호태왕비(好太王碑)'라고 불린다. "광활한 영토를 개척하고(廣開土境) 민생을 편안하게 보살핀(平安) 하늘과 같이 큰 왕(好太王)의 업적을 기록한 기념비"라는 뜻이다.

 

현재는 1982년에 중국 당국에 의하여 새로 건립된 단층의 대형 비각 속에 있으며 200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고, 공원처럼 주변 경관이 잘 꾸며져 있다.

 

 

동북공정의 첨예한 촉각

 

그런데 이 비석을 두고 중국, 일본, 한국 삼국이 각자 다른 해석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중국은 호태왕으로 해석을 하고, 일본은 바다를 건너 신라와 백제를 쳐 부수고 자신의 일본에 조공을 바친 속국으로 보고 있다고 해석을 하는 점이다. 바다를 건넌 광개토대왕이 백제와 신라를 정복하고 만주까지 진출하여 영토를 넓혔다는 주장이다.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 來渡海 破百殘△△新羅 以爲臣民

 

신묘년 기사대목으로 △△은 완전 유실되어 해독이 불가능하며 나머지 글자도 학자에 따라 판독이 다르거나 불분명한 글자가 섞여 있다. 일본은 1889년 <회여록>에서 "백잔 ,신라는 본디 속민이었으므로 원래 조공을 하였다. 그런데 왜는 신묘년(391년)에 바다를 건너 백잔 △△ 신라를 쳐 부수고 신민으로 삼았다." 고 해석하였고, 이는 곧 임나일본부설의 근거가 되었다.

 

그러나 여러 정황과 사료를 살필때 "破"의 주어인 고구려가 생략된 것이 아닐까하는 견해가 국내에서는 더욱 인정받고 있는 편이고, 아직까지 각종 학설이 난무하는 가운데 정확히 밝혀진 것은 없다.

 

  

▲광개토대왕릉으로 가는 길 (웃통을 벗은 사람이 나카무라다)

 

 

"꼭 우산속을 거니는 기분이 들군요."

"자연우산이네!"

우리는 나카무라와 함께 우산나무가 도열해 있는 길을 따라 비석이 세워진 곳으로 갔다. 잡초가 우거진 길, 역사의 땅, 고구려의 숨결이 느껴지는 대지는 말이 없다. 정말 나카무라도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을까?

 

▲광개토대왕비 앞에 던져져 있는 복전 

 

"아니 왠 돈이?"

"위대한 왕에게 복을 비는 복전이지요."

"가만이 앉아서 돈을 버는 대왕님이시네!"

 

1500년전 세워진 비석은 거대했다. 사방에 새겨진 비문은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아들 장수왕이 세웠다는 비석의 돌은 어디서 가져왔을까? 위대한 정복자의 비석 앞에는 복을 비는 복전만 수북히 쌓여있다. 과연 동북공정의 첨예한 주인공 광개토대왕은 3국이 우러러보는 성인인가?

 

"나카무라, 당신은 어떻게 생각을 하지요? 과연 광개토대왕이 당신 나라의 장군으로 생각이 됩니까?"

"네?"

 

나는 기어코 나카무라에게 질문을 던지고말았다. 물론 명쾌한 대답을 바라고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단지 그가 어떻게 반응을 할것인가 하는 점이 궁금했을 따름이다.

 

"나는... 이 대왕님이 이 땅을 빛낸 영웅으로 생각이 됩니다."

 

그의 대답은 모호했다. 이 땅을 빛낸 영웅? '고구려의 땅'을 빛낸 영웅이라고 왜 대답을 하지 못할까? 동북공정의 촉각은 이처럼 첨예하다. 중국은 오히려 일본의 입장을 옹호하고 있는 편이다. 한반도 한민족의 정통성을 부인하는 중국의 의도가 심각한 역사적오류를 범하고 있다.

 

"저기 <來渡海 破百殘△△新羅 以爲臣民>의 '來渡海'를 과연 '일본이 바다를 건너와'로 해석이 될가요?"

"글세요. 역사가가 아닌 제가 무엇을 알겠습니까? 저는 그저 여행객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서로 먹적은 웃음을 지으며 유리관을 나와 광개토대왕릉으로 추정되는 언덕으로 올라갔다. 그렇다 그는 여행객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속내는 알 수가 없다.

 

 

▲허물어진 광개토왕릉. 시안의 진시왕릉을 연상케 한다.

 

 

영광의 무덤 광개토대왕의 능

광개토대왕비에서 서쪽으로 약 200미터 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한 정사각형의 계단식 석실묘로 남아있는 높이만 14,8미터,한 변의 길이가 66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규모를 지니고 있다. 현재는 많이 무너져 상단부만 보존되어있고, 철제 계단으로 올라 내부를 간단하게 살펴볼 수 있다.

 

내부에는 큰 직사각형 모양의 돌이 두 개 있고, 그 겉은 플라스틱틀로 덮여있는데 대왕과 대왕비를 합장한 것으로 보이며 중국인들이 던진 동전들이 보인다. 복을 빌며 동전을 던진다고 한다.

대형 돌을 직사각형으로 다듬어 계단식으로 쌓아 올린 구조인 태왕릉은 7단의 계단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계단 안은 작은 돌들이 채워 넣었져있다. 현재 광개토대왕릉 양쪽으로 중국과 북한의 풍경을 볼 수 있다는 점도 이색적이다.

인근 장군총에 비해 능의 정교함과 예술성이 다소 떨어져 보이지만 이곳에서 "태왕릉이 산처럼 굳건하고 평안하기를 바란다 (願太王陵 安如山 固如岳 )"라는 의미의 명문 (銘文) 벽돌이 출토되었고, 광개토대왕비에서도 좀더 가까우며 손상되지 않았을 때 무덤의 크기도 장군총보다 클 것으로 추정되어 태왕릉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곳에서도 중국 경비원이 지키고 있고, 내무 사진 촬영은 금지를 하고 있다. 나는 왕릉에 허물어진 돌 하나를 들어보았다. 이 돌은 대왕이 호령했던 시절부터 있었을까?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돌만이 알고 있을뿐....

 

 

▲이 돌은 광개토대왕님의 사연을 알고 있겠지요. 옆에는 무덤을 지키고 있는 중국 경비원

 

 

▲광개토 왕릉에서 바라보이는 장수왕릉 산 밑에 하얀 탑처럼 보이는 곳이다.

 

 

아아, 고구려여, 영원하라!

 

아아, 안타깝다. 고구려여, 위대한 광개토대왕이시여! 중국 연나라를 치고 북경까지 영토를 넓혔던 영웅을 중국에서는 호태왕으로 한낮 중국의 한 족장으로 취급하고 있으니.... 유리관 속에 갇혀있는 광개토대왕비가 울고 있는 듯 했다.

 

멀리 장수왕의 무덤이 보인다. 장수왕은 아버지의 무덤이 바라보이는 곳에 묻히기를 원했다고 한다. 지상에서 가장 큰 거석비석을 세우고 죽은 후에도 아버지의 무덤을 마주보고 싶었던 장수왕은 효자중의 효자가 아니었을까?

 

아아, 고루려여 영원하라!

 

광개토대왕릉에서 내려온 나는 우산나무 길을 따라 장수왕릉으로 향했다.

 

(2009.8.26 광개토대왕비에서 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