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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밤을 수놓은 '1만 시간의 질주'-이연화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연주회

찰라777 2009. 10. 2. 10:47

 

가을밤을 수놓은 '1만 시간의 질주'

이연화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연주회

 

 

▲예술의 전당 허공에 뜬 달. 베토벤의 월광소나타가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것만 같은 분위기다.

 

 

가을이 점점 깊어가는 계절, 지난 9월 30일, 나는 뜬금없이 예술의 전당에서 열리는 이연화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음악회로의 초대를 받았다. 심심풀이로 여행기를 올리는 블로그의 독자로부터 초대장이었다.

 

모처럼만에 가게되는 음악회! 가슴을 설레며 나는 아내와 함께 예술의 전당 콘서트 홀로 갔다. 밤하늘에는 추석을 향해 점점 커지는 달이 훤하게 걸려 있었다. 음악회날씨로는 기가 막히게 어울리는 가을밤이었다.

 

콘서트 홀 정문 야자수 밑에서 아내와 나는 블로그에서 알게된 '지희'라는 독자 분을 만나 "R"석 두 장의 표를 건네받았다. 처음으로 만난 분으로부터 음악회의 초대장을 받는 느낌은 묘하기도 하고 마냥 좋기만 했다. "선생님 글 잘 읽고 있어요. 관람 잘 하세요. 저는 일행이 있어요."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총총히 사라져 갔다.

 

콘서트홀 로비에는 이홍구 전 국무총리를 비롯해서 꽤 유명한 분들의 얼굴이 보였다. 8시 정각, 오늘의 주인공 이연화 피아니스트가 하얀 드레스를 입고 지휘자 금노상 씨와 함께 환상의 커플처럼 등장했다.

 

곧이어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1번 연주에 이어 2번의 연주가 이어졌다. 두 곡 다 베토벤의 청년시절에 작곡을 했다는 피아노 협주곡은 우아하면서도 베토벤 특유의 중후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물결치듯 피아노의 건반을 터치하는 이연화님의 손가락 끝에서 때로는 격정적이고, 때로는 서정적이며, 중후한 피아노의 선율이 음악 홀을 가득 채우며 청중을 점점 매료시켜가고 있었다.

 

협주곡 4번을 연주하기에 앞서 막간의 시간이 있었다. 커피를 한 잔 마시고 콘서트 홀 밖으로 나와 심호흡을 하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밤하늘엔 별이 총총히 빛나고 있었다.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가 금방이라도 하늘에서 쏟아져 내릴 것만 같은 그런 분위기였다.

 

청력을 상실한 음악가 베토벤! 시골에서 자라난 나는 어린 시절 베토벤의 전기를 읽고 크게 감명을 받은 바 있었다. 청력상실로 우울증에 시달리면서도 고통과 좌절을 딛고 일어서서 작곡활동을 멈추진 않았던 베토벤의 정신은 과연 '불멸의 영혼'이란 말이 어울린다.

 

피아노 소리를 조금이라도 감지하기 위하여, 피아노 공명판에 막대기를 대고 입에 물어서, 그 진동을 턱으로 느끼며 작곡과 연주에 몰두했다는 베토벤의 음악에 대한 지칠줄 모르는 정열! 그런 탓에 음악에 문외한인 나는 베토벤의 음악이라면 무조건 좋아하며 듣게 되었다. 내가 베토벤의 음악을 좋아하게 된 것은 그의 음악보다도 고난을 딛고 일어선 인간 베토벤의 영혼을 더 사랑하기 때문이다.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은 오케스트라의 1번과 2번에서 보여주었던 긴 서주 없이 곧 바로 독주자의 피아노 터치로 호쾌하게 시작되었다. 나는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5번을 유독 사랑하는데, 그것은 서주 없이 바로 폭발적으로 터져 나오는 호쾌한 피아노의 난타 때문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연화 피아니스트는 연주 삼매에 젖어들어 갔고, 청중들은 연주자의 손끝과 선율에 흠뻑 몰입되어 갔다. 연주자와 청중이 하나가 되어가는 찰나에 연주는 클라이막스에서 갑자기 멈추었다.

 

연주가 끝나자 우레 같은 박수와 함성이 음악 홀을 가득 메웠다. 어떻게 하면 저렇게 악보를 보지 않고도 한 음도 틀리지 않고 감동적인 연주를 할 수 있을까? 최근 화제를 모으고 있는 맬컴 글래드웰이 주장하듯 "1만 시간의 질주"가 피아노의 건반위에서 춤추고 있는 것을 보는 듯 했다. 어느 한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하루에 3 시간 이상, 1만 시간의 연습이 필요하다는 것이 맬컴의 주장이다. 그 시간을 날 수로 환산하면 대략 10년이 걸린다.

 

▲ 이연화 피아니스트의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연주는 가을 밤을 수 놓으며 '1만 시간의 질주'를 하고 있었다.

 

 

베토벤 소나타 전곡을 녹음하여 발매한 이연화 피아니스트도 1만 시간의 연습이 있었지 않았을까? 특히 피아노 협주곡 4번은 베토벤이 청각을 상실한 이후에 작곡을 하여 마지막으로 그의 피아노 연주로 초연을 한 곡이라고 한다. 건강악화로 협주곡 5번 황제는 연주를 못한 채 그는 세상을 떠났다. 흔히 청중들은 '황제'협주곡을 듣기를 좋아한다면, 연주자들은 4번 협주곡을 더욱 즐겨 연주할 정도로 연주자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는 곡이라는 것.

 

연주를 끝낸 이연화 피아니스트는 청중들의 그칠 줄 모르는 환호에 응답하여 월광 소나타를 앙코르 독주로 달구어진 청중들의 열기를 식히며 음악회는 막을 내렸다. 어느 날 뜬금없이 초대를 받았던 베토벤 음악회에서 집으로 돌아오며, 건반 위를 난타하는 이연화 피아니스트의 모습이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았다.

 

그것은 몇 시간의 연주가 아니라 몇 십년에 걸친 '1만 시간의 연습' 끝에 펼쳐지는 피아노 연주예술의 극치라는 생각이 든다.

 

(2009.9.30 예술의 전당 베토벤 피아노 협주 현장에서 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