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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지평선을 찾아서-얼하이 호의 수평선

찰라777 2009. 12. 9. 11:37

<잃어버린 지평선>을 찾아서①

 

다리 얼하이 호의 수평선

 

▲쿤밍에서 09:30에 출발하는 리장, 다리행 버스 

 

 

다비드 넬이 갔던 길을 따라가다

 

쿤밍에서 오전 9시30분발 리장행 버스를 탔다. 이 버스는 다리를 거쳐 리장까지 가는 버스다. 버스가 쿤밍 시내를 벗어나자 한가로운 농촌 풍경이 펼쳐진다. 쿤밍에서 다리까지는 약 400km에 이르는 오지의 길이다. 이 길은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영혼의 도시 라싸에 도착한 프랑스인 여성 여행가 알렉산드라 다비드 넬이 지나갔던 길이기도 하다.  

 

다비드 넬은 1868년 파리에서 태어나 1969년 세상을 뜨기까지 그 누구도 몰랐던 미지의 정신세계를 탐험하고 연구하는데 전 생애를 바쳤던 여행가다. 그녀는 인도로 건너가 산크리스트어와 티베트어에 심취하여 인도와 아시아 구도여행을 계속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당시에는 이방인의 방문을 허용하지않았던 금단의 땅 티베트를 여행하기로 결심을 한다. 

 

1923년 가을 중국 운남성의 한 마을에 도착한 그녀는 어느날, 노새와 야크와 짐을 버리고 안내인조차 따돌리고 걸인으로 분장한 채 용덴이라는 티베트인 양아들과 단 둘이서 길을 떠났다. 이전까지 알려지지 않은 길을 따라 다섯달에 걸친 기나긴 행군 끝에 1924년 2월 마침내 신비에 싸인 티베트의 경계선을 넘어 라싸로 들어가는 데 성공했다. 

 

10여년 동안 무려 다섯번의 시도 끝에 성공한 놀라운 쾌거였다. 그 당시 상황으로보아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어려운 여정이었다. 그리고 1927년 다비드 넬은 '영혼의 도시 라싸로 가는 길'이란 티베트 여행기를 발표했다. 1992년 12월 7일 14대 달라이 라마도 이 책을 극찬하며 추천사까지 썼다.

 

2005년 4월 25일 나는 다비드 넬이 걸어서 갔던 길을 70년이 지난 후 버스를 타고 아내와 단 둘이서 가고 있었다. 그리고 샹그리라, 더친을 거쳐 매리설산을 넘어 티베트로 가려고 한다. 그러나 이 길은 아직 공식적으로 중국정부에서 육로를 통해서 티베트 여행이 허가되지않는 길이다.

 

 

지평선이 없는 산과 계곡

 

버스는 점점 더 인간의 손때가 묻지않는 아득한 장소로 빠져들어가고 있었다. 먼지가 풀풀 휘날리고 산세가 점점 깊어져갔다. 운남성 서쪽은 티베트가 가까워질수록 험한 산세와 계곡이 계속 이어지는 신비의 땅이다. 그곳에 지평선이란 없다.

 

나는 배낭에서 제임스 힐톤의 <잃어버린 지평선>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잃어버린 지평선은 지상에 마지막 남은 유토피아 샹그리라에 대한 이야기다. 나는 이 책을 티베트여행을 계획하면서부터 읽고 또 읽었다.

 

"그 장려한 산맥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이와 같은 장소, 아득히 멀어 접근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더욱이 비인간적인 장소가 이 지상에 아직도 남아 있구나 하는 만족감이 가슴을 조여오는 듯 절실하게 느껴졌다. 산정은 차디차게 빛나고 있었다. 형언을 못할 만큼 숭고하고 먼 자태 그리고 그것들이 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더욱더 위엄을 안여주고 있었다...."(잃어버린 지평선 60P 중에서)

 

세계의 지붕 티베트로 가는 길은 그 어는 방향에서 가든지 힐톤이 서술한 내용과 같다. 제임스 힐톤의 문체는 서정적이면서도 수려하고 화려했다. 고독에 빠져 있는 듯 하면서도 모험적이었다. 신비한 탐험정신이 곳곳에 배어 있었다. 내 옆 좌석에는 아일랜드에서 왔다는 남자 여행자(사진)가 홀로 앉아 있었다. 그는 리장을 거쳐 샹그리라에 가기 위해 중국에 왔다고 한다.

 

그는 내가 읽고 있는 책의 커버를 보더니 오래전에 영국에서 이 영화를 보았다고 했다. 창밖을 내다보는 그의 눈초리는 희망과 우수에 젖어 있었다. 그는 최고만을 지향하는 서구사회에 염증을 느낀다고 했다. 그는 삶이 지치고 타성에 젖어들라치면 중국땅으로 여행을 온다고 했다. 중국 중에서도 샹그리라로 가는 길을 특별히 좋아 한다고 했다.

 

"잘 알려진 거봉보다 겨우 2,3천 피트 정도 낮기 때문에 등반대에 의해서 영원히 정복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신기록을 목표하는 사람에게는 크게 매력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콘웨이는 그런한 타입의 사람과는 정반대였다. 그는 최고를 이상으로 하는 서구의 사고방식에 자주 비속함을 느끼고 있었으며, 또한 "최고의 것에 최고의 지위를"이라는 것은 "높은 것에 많은 것을"이라는 것보다 합리적이 아니며, 더욱더 진부한 명제라고 생각하고 있었다....."(잃어버린 지평선, 60P 중에서)

 

최고는 더 이상 갈때가 없는 막다른 골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은 최고를 지향하지않는다. 그저 발길 닿는대로 흘러가는 것이다. 거기에 생각의 자유가 있다. 여행은 차창에 스쳐 지나가는 풍경처럼 정지되지 않는 자유가 있다. 이 서양인도 아마 그런 자유를 느끼기 위해 샹그리라로 가는 길을 자주 가는 지 모르겠다.

 

이 샹그릴라(香格里拉)의 어원은 장족언어의 한 갈래인 방언에서 온 것이다. 그 가운데 "香"과 "格"은 중디엔(中甸)지역의 옛 장족의 발음이라 한다. 현지 장족의 마음속에 "香格里拉"는 "마음속의 해와 달"이라는 의미로 자리 잡고 있다. 어쨌든 우리는 점점 더 상그리라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다리로 가는 길에서 만난 휴게소와 화장실 . 이곳에서 점심을 먹었다.

 

 

버스는 12시경에 어느 휴게소에서 잠시 멈추었다. 휴게소에서 우리는 뷔페식 중국요리로 점심을 먹었다. 화장실에서는 돈을 3角을 받았다. 별로 깨끗하지도 않는 화장실인데 돈을 받는다. 우리나라 화장실처럼 깨끗하다면 돈을 주어도 아깝지 않을 텐데… 그래도 이 화장실은 비교적 깨끗한 화장실이다. 윈난성의 시골 화장실은 대부분 문이 없다. 그리고 정화처리가 되지 않아 냄새가 지독하게 풍긴다.

 

버스는 오후 2시에 샤관에 도착했다. 리장행 버스는 대리까지 직접 가지 않고 샤관에서 승객을 내려주고 떠난다. 사관은 쿤밍에서 400km 떨어진, 얼하이 호 남쪽 끝에 있다. 한때는 미얀마로드의 중요한 거점 도시였고, 지금도 윈난 서북지역 교통의 요충지다. 샤관은 다리시의 시청소재지다. 그래서 '다리스大理市'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것 때문에 여행객들은 대리에 도착을 한 것으로 혼란을 겪기도 한다.

 

우리는 아일랜드에서 온 여행자와 헤어져 샤관에서 하차를 했다. 혹 리장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 런지도 모른다며 우리는 웃으면서 굿바이 악수를 했다. 여행자들은 이렇게 곳곳에서 만나고 헤어지고 또 만나는 것이다. 우리는 시외버스 정류장으로 가다가 호주에서 온 여성배낭여행자와 어울려 택시를 타기로 했다. 택시운전수는 다리까지 택시요금이 20위안이라 했다. 해서 브리즈번이 고향이라는 호주 아가씨와 우리는 합승을 하기로 했다.

 

그녀는 현재는 애들레이드에 거주를 하고 있는데 윈난성을 돌아보고 싶어 홀로 여행을 떠나 왔다고 했다. 그녀도 리장으로 바로 가려고 하다가 대리를 잠간 둘러보기로 마음을 바꾸었다고 한다.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그녀는 커다란 배낭을 등에 메고 있었다. 우리는 별로 말이 없이 그냥 택시의 차창에 비추이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다리에 있는 한국인 게스트하우스 다리문의 집

 

 

바다처럼 넓은 얼하이 호에 도착하다

 

대리에 도착을 하니 거리가 꽤 혼잡했다. 때문 봄인지라 무슨 축제가 열린다고 했다. 호주 아가씨는 자기가 정한 게스트 하우스로 간다고 했다. 우리는 한국인이 경영하는 게스트 하우스로 가기로 했다. 그 놈의 김치가 먹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김치는 한국인에게 마약과도 같은 것이다. 호주 여행자와 헤어져 다리 문(文, No.3 게스트 하우스)의 집으로 갔다. 다리문은 한국인이 경영하는 게스트 하우스다.

 

다리문의 집에 도착을 하니 이미 한국인들이 몇 명 묵고 있었다. 중국유학생 두 사람과 한국인 신혼부부 한 쌍을 만났다. 다리 문은 턱수염을 길게 기른 한국인이다. 그는 사람이 좋아 보였다. 그곳에는 다리 문 말고 또 한사람이 털보가 있었다. 그는 캐나다에서 왔다는 한국인 여행자였다. 어쨌든 한국인을 만나니 반가웠다. 방을 정하고 밖으로 나오니 다리 문이 말을 거었다.

 

"혹 얼하이 호에 가시지 않으시렵니까?" 

"얼하이 호? 물론 가야지요."

"마침 오늘 얼하이 호를 가는데 함께 가시지않으시렵니까?" 

 

 

 ▲바다처럼 넓은 얼하이 호수

 

 

마침 부산에서 온 5명의 한국인이 얼하이 호수를 가는 데 달밤의 경치가 죽여준다고 했다. 남조풍정도에서 하룻밤을 묵으며 얼하이 호의 경치를 만끽하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다리문을 따라 얼하이 호를 가기로 했다. 부산에서 온 여행자 5명, 거기에 북경대학생과 한국인 신혼부부, 그리고 베이징에서 연수를 받고 있는 다른 여행자 두 사람이 합세를 하여 12명이 얼하이 호수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여행자는 다리 문까지 하여 13명이 되었다. 다리에 오면 얼하이 호수를 빼 놓을 수 없다. 바이족이 세운 남조국은 일찌기 이 얼하이 호와 함께 발전을 해왔다. 얼하이 호수는 바다처럼 넓었다. 잃어버린 지평선에서 때아닌 수평선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