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섬진강일기

구례구역에 내리면 누군가 기다려주는 사람이 있을 것만 같다 ②

찰라777 2010. 8. 28. 11:06

기차바퀴 리듬에 저절로 열려지는 마음의 창

 

 

▲책을 읽다가 창밖을 바라보며 사색에 잠겨있는 옆자리 승객 

 

옆 좌석에는 초등학교에 다니는 소녀와 어머니가 책을 읽고 있었다. 책을 읽고 있는 차창 너머로 푸른 들판이 펼쳐지고 멀리 운해에 싸인 지리산이 보였다. 낮은 구름, 푸른들, 평화로운 농촌 풍경이다. 기차가 곡성역을 출발하자 나는 황승연 씨의 소설 '매천야록'을 배낭에서 꺼내들었고, 아내는 법정스님의 '버리고 떠나기'를 읽기 시작했다.

 

매천 황현 선생은 광양에서 태어나 지리산 기를 받아 대성한 조선말기의 대학자이다. 그는 과거 시험에 두 번이나 급제를 하고도 관직을 맡지 않고 지리산에서 후학들을 가르치다가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절명시(絶命詩) 네 수를 남기고 자결한 절개 높은 학자이다. 언젠가 시간을 내어 매천 선생을 발자취를 더듬어 볼 생각이다.

 

기차가 전주에 도착하자 소녀가 있는 자리에 새로운 중년 부인 두 사람이 올라왔다. 그들은 서로 반가워하며 소리를 질렀다. 세 여인은 친구 사이인데 한 사람은 여수에서 타고, 두 친구는 전주에서 탔는데 좌석을 함께 잡은 것이라고 했다.

 

"아하,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한 좌석을 잡을 수가 있지요?"

"인터넷에 예약을 할 때에 '구간동행'신청을 하면 되요."

''구간동행이라... 연인들이 중간에서 도킹을 할 때에 그 방법을 쓰면 좋겠군요."

"대길이지요."

 

기차를 타고 가다보면 이렇게 옆 사람과 대화의 장이 열린다. 그 만큼 마음의 여유가 있는 것이다. 서대전을 지나는데 12시가 다 되었다. 아내는 미리 준비해온 김밥을 꺼냈다. 우리는 김밥으로 점심을 간단하게 먹었다.

 

기차바퀴 소리를 리드미컬하게 듣다 보니 졸음이 왔다. 아내와 나는 눈을 감고 졸음을 받아 들였다. 한 숨을 자고나니 기차는 어느 듯 영등포역에 도착을 하고 있었다. 거미줄 같은 전선이 뒤엉겨 있고, 성냥갑 같은 콘크리트 건물이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갑자기 눈에 눈곱이 끼는 것처럼 시야가 흐려졌다. 기차가 한강 철교를 지나는데 자동차들이 개미처럼 줄을 이어 지나갔다.

 

 

눈에 눈곱이 낄 것만 같은 서울의 거리

 

▲복잡한 용산역사

 

▲거미줄처럼 어지러운 전선과 회색빌딩

 

사람의 마음은 참으로 간사하기 그지없다. 서울에 살 때에는 이런 복잡한 거리도 무심코 지나치고, 의례 그러러니 하고 생각했는데, 섬진강에서 몇 달 살다보니 모든게 답답하게만 보이니 말이다.

 

용산역에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출구를 빠져 나오니 천장에 프레임이 거미줄처럼 얽혀있고, 오가는 인파로 가득하다. 자칫 잘못하면 옆구리를 다치거나 부딪치기가 일쑤다. 우리는 왕십리로 가는 전철을 타기 위해 다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플랫폼으로 내려갔다. 마침 왕십리로 가는 전철이 기다리고 있었다. 헐레벌떡 뛰어가 전철을 탔다. 왕십리로 가는 기차는 드문드문 있기 때문에 놓치면 한참을 기다려 한다.

 

왕십리로 가는 전철에서 한강을 바라보니 강변 양쪽에 아파트들이 높은 성벽을 이루며 강변을 막고 있다. 섬진강변에 푸른 벚나무들이 도열해 있는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이다. 그래도 전철이 왕십리역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땅 위로 가기 때문에 덜 답답하다.

 

왕십리역에 다가오자 전철이 땅속으로 들어갔다. 몇 십년동안 타고 다녔던 지하철이지만 산과 들이 펼쳐진 섬진강변에서 생활을 하다가 거대한 땅굴 같은 지하 속으로 들어가니 갑자기 숨이 턱턱 숨이 막히는 것 같다. 인간이란 이렇게 간사한 것이다. 환경의 지배를 받는다고는 하지만.

 

 

▲2호선을 갈아타는 혼잡한 왕십리역 

 

 

  ▲강변역에 어지럽게 버리진 담배꽃초와 널부러진 선정적인 삐라

 

  

강변역으로 가는 2호선 지하철을 타기위해 지하도를 이리저리 끼어 다니다 보니 벌써 심신이 다 지쳐 버렸다. 2호선 전동차가 굉음을 내며 다가왔다. 2호선을 승객들이 꽉 차 인간 콩나물시루를 연상케 한다. 강변역에서 내려 밖으로 나가 건널목에서 신호등을 기다리는데 사람들이 담배꽁초를 불을 끄지도 않고 마구 버렸다. 건널목에는 담배꽁초가 지천을 이루고 있다.

 

"문화국민이 되기에는 아직 멀었어요."

"그러게 말이요."

 

아내가 눈살을 찌푸리며 담배꽁초를 바라보았다. 올림픽이나 월드컵 경기가 치러질 때에는 잘도 쓰레기를 치우더니 남이 보지 않는 데서는 저렇게 담배꽁초를 함부로 버리다니. 길 위에는 담배꽁초뿐만 아니라 '키스방' 등 밤을 유혹하는 선정적인 삐라가 여기저기 흩날리고 있다. 부끄러운 일이다. 선진 문화 국민이란 남이 보지 않는 데서도 질서를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한여름을 다 보낸 것 같은 찜통더위

 

서울에서 하루 밤을 자고, 다음날(8월 11일) 우리는 네팔화가의 전시회 관람 겸 취재차 세종문화회관 광화랑으로 갔다. 세종문화회관과 교보문고 사이 지하에 있는 광화랑에는 <가네시 전>을 열기 위해 네팔에서 온 밀란 석가 교수 부부와 그를 초청한 이근후 박사, 그리고 네팔 문화를 사랑하는 많은 관람객들이 이미 와 있었다. 광화랑은 마치 찜통처럼 더웠다. 선풍기 한 대가 접수대에 덜덜 거리며 돌아가고 있을 뿐, 꾸불꾸불한 지하전시장은 찜통 그대로였다.

 

오픈식을 하는 동안 네팔 대사를 비롯하여 모든 관람객들이 땀으로 멱을 감았다. 오픈식을 취재하며 사진을 찍는 내 등에도 땀이 작은 시냇물을 이루듯 흘어 내려갔다.

 

 

▲한 여름을 다 보낸 것 같은 찜통더위속 광화랑 전시회. 서울시의 그 많은 문화예산은 다 어디에 쓸까?

 

"한여름을 이곳에서 다 보낸 것 같군요."

 

어떤 관람객이 전시회를 돌아보며 이마에 흘려 내리는 땀을 닦으며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서울의 심장하고도 서울시의 대표적인 문화회관인 세종문화회관 전시장이 냉방장치기 없는 찜통더위라니 서울시의 그 거대한 문화예산을 다 어디에다가 쓸까? 개인이 운영하는 아주 작은 갤러리만도 못한 광화랑이다. 네팔에서 온 밀란 부부와 네팔대사 그리고 한국에 있는 많은 네팔 관람객들에게 부끄럽고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로만 문화시민을 외쳐서는 안 될 일이다.

 

빨리 구례로 가고 싶어요!

 

"빨리 구례로 돌아가고 싶어요."

"내일 아침에 가질 않소?"

"생각 같아서는 오늘이라도 당장 떠나고 싶어요."

"허허, 당신도……"

 

광화문에서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며 아내는 빨리 서울을 벗어나고 싶다고 했다. 이런 심정은 누구나 다 같을 것이다. 더구나 난치병으로 15년 동안 고생을 하다가 심장 이식 수술까지 한 아내의 입장으로서는 더욱 절실 입장하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제쳐두고 서울을 떠나 섬진강으로 왔지만……

 

서울에서 이틀을 보내고 우리는 오전 10시 31분 용산역에서 구례로 가는 기차를 탔다. 기차가 광명시를 빠져 나가자 푸른 들판이 조금씩 나오기 시작하더니 경기평야가 시원하게 펼쳐졌다. 같은 시간이 걸린 데도 서울에서 구례로 가는 기차는 더 빨리, 경쾌하게 달려가는 것 같았다. 오후 2시 40분, 기차는 구례구역에 정차를 했다.

 

▲용산에서 구례구로 가는 새마을호를 타는 순간 눈곱이 벗겨지는 것 같아.. 

 

"구례구역에 내리면 누군가 기다려 주는 사람이 있을 것만 같아요."

"하하, 그래? 누가 기다려 줄까?"

 

그렇다! 구례구역에 내리면 누군가가 기다려 주는 그리운 사람이 있을 것만 같다.  예절바르고 인심좋은 구례 사람들뿐만 아니다. 널찍한 주차장에는 서울로 갈 때에 주차해 놓은 6592 자동차가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동차를 타고 구례구역을 빠져 나오니 지리산과 섬진강이 우리를 기다려주고 있고, 섬진강변에 늘어선 벚나무들이 도로 양편에 도열하여 우리를 환영해주고 있다. 신호등이 없는 작은 신작로 길이 우리를 인도해 준다.

 

 

▲이틀만에 다시 찾아온 구례구역이 정겹게 느껴진다

 

 

수평리에 들어서니 계족산과 백운산이 너그러운 표정으로 우리를 포근하게 안아준다. 중평마을 앞의 팽나무가 너울너울 춤을 추며 우리를 반기고 마을사람들이 손을 흔들어 준다. 개울가 작은 집에 들어서니 절구통에 피어난 수련과 물옥잠화, 텃밭에 핀 채송화고 미소를 머금고 있다. 텃밭에는 부추와 파, 콩, 열무들이 자라고, 청개구리가 이리저리 뛰며 주인을 반기고, 검은 고양이와 흰 고양이도 뒤 안에서 뾰조롬히 내다보며 야옹~ 하고 인사를 한다.

 

 

 

 ▲나를 기다려주는 지리산과 섬진강, 청개구리 친구들

 

  

구례구역에 내리면

누군가가 기다려 주는 사람이 있을 것만 같다.

사람만이 아니다.

 

섬섬옥수 흘러가는 섬진강

어머니의 품 같은 지리산

끝 간 데 없는 벚꽃 터널과 샛노란 산수유

골골이 흘어내리는 계곡의 맑은 물

구례장터의 산나물과 생선들…

수평리 마을 앞의 팽나무

개울가 돌담장과 작은 오두막

그 집안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식구들-

검은고양이, 흰고양이, 청개구리 친구들

잠자리와 나비, 지네, 모기, 파리, 말벌, 귀뚜라미, 여치……

 

구례구역에 내리면

모두가 모두를

귀하게 여기고

예절 바르고 그립게 여긴다

사람만이 아니다

 

구례구역에 내리면

누군가가 기다려 주는 사람이 있을 것만 같다.

사람만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그리운 친구들을 가다고 있는 구례구역에서 내린다.

 

 

(2010.8.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