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섬진강일기

설 맞이 목욕재계

찰라777 2011. 2. 2. 10:36

목욕재계하고 설을 맞이하는 동네 어르신들

 

 

 

▲목욕재계하고 설을 맞이하시겠다는 동네어르신들과 함께 간 남원의 어느 목욕탕.


 

동네 노인회장이 남원으로 목욕을 가는데 함께 가자고 했다. 1년에 한 번씩 동네 어르신들을 모시고 가는 목욕이라고 했다. 목욕재계를 하고 설을 맞이하는 행사라는 것. 느낌이 신선했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 날씨가 너무 추워 수도가 어는 바람에 온수를 가동하지 못하여 며칠째 목욕은커녕 세수도 제대로 못하고 있어 머리와 온 몸이 근질근질하던 차였다.

아내의 병원 때문에 한 달 반이나 집을 비운 사이에는 수돗물을 조금씩 틀어 놓은데다가 이웃집 혜경이 엄마가 수시로 집을 봐주어 수도가 얼지 않았는데 1월 28일 날 밤 물을 틀어 놓는 것은 깜박 잊어 버려 영하 10도(체감온도 -15도)에 그만 수도 파이프가 순식간에 얼어버렸다.

 

 

▲수도 파이프를 녹여보지만 속수무책. 일단 천으로 덮어두었다.

 


완풍기와 드라이기로 수도파이프를 녹여 보았지만 속수무책이다. 마당에 있는 원선에서 부엌과 화장실로 들어오는 파이프를 너무 얇게 묻어서 파이프전체가 얼어버린 모양이다. 전에 이집에 살았던 시안이 아빠는 파이프 동선을 따라 그 위에다 장작까지 피워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고 한다. 날씨가 풀리기만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 동파된 파이프를 녹이는 것을 포기하고 날씨가 풀리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동파되어 나오지 않는 수돗물

 


물을 조금씩 길어다가 한바가지 떠서 양치하고 눈, 코, 입을 씻는 토끼세수를 할 수밖에 없다. 물이 어찌나 차갑던지 물을 묻힌 곳은 얼어버릴 것만 같다. 그런 처지에 노인회장님이 목욕을 가자고 하시니 아주 적절한 시기에 목욕을 할 수 있는 기회다. 봉고차 한 대를 빌려 남원으로 가서 목욕을 하고, 점심까지 먹고 온다고 했다. 회비는 1인당 만원.

 

우리 동네는 젊은이는 물론 중년의 나이도 거의 없고 거의가 70~90세 사이의 노인들만 살고 있다. 이곳에 이사를 오던 날부터 이장님께서 노인회에 가입을 하라고 권유하셨는데 아직은 노인이라는 생각을 하기에는 너무 뭣하고 해서 가입을 하지 않고 있었다.



▲마당의 수도 꼭지을 보호하기 위하여 천으로 싸고 그 위에 바람막이 박스를 덮어 두었다.

 

 

유홍준 교수가 사는 동네는 60을 넘어도 청년회에 가입을 하라고 한다는데, 우리 동네는 그와 정반대이다. 청년과 중년층이 없다보니 그럴 수밖에 없는 처지이다. 동네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선 나이를 가리지 않고 어울려야 하지 않겠는가.

 

정각 9시에 출발을 한다고 하여 노인정으로 나가니 동네 어르신들이 벌써 나와 계신다. 오늘은 할아버지 어르신들만 가는 날이라고 한다. 할머니 어르신들은 하루 전에 이미 다녀오셨다고 한다. 산골 날씨가 워낙 춥다보니 난방이 제대로 안된데다가 웃풍이 센 욕실에서 목욕을 하다가는 감기에 딱 걸리기 십상이다. 그래서 한겨울에는 집에서 목욕을 하기가 어렵다. 우리 집 말고도 수도와 보일러가 동파된 집이 많았다.

 

몸이 불편하여 거동이 어려우신 어르신들은 날씨가 너무 추워서 동행을 하지 못하고 해서 거동이 가능한 아홉 분의 어르신들과 남원으로 출발을 했다. 일행 중에 내가 가장 영계인 샘이다. 봉고차에 올라 인사를 하니 어르신들 모두가 매우 반겨주신다. 이거, 오늘 기쁨조 역할을 톡톡히 해내야겠는데…

 

 

▲꽁꽁 얼어붙은 동네 시냇물

 

 

동네를 출발하면 곧 섬진강이 나온다. 강물이 땡땡 얼어붙어 있다. 노고단에는 눈이 하얗게 쌓여 있다. 어르신들은 걸쭉한 농담들을 쏟아내며 쾌활하게 웃었다. 남원시내에 있는 녹주 찜질방이라는 곳에 도착했다. 목욕비용은 1인당 5000원이다.

 

“여긴 신발장이니 옷을 여기에다 넣지 말고 신발만 넣으세요.”

 

찜질방 직원이 신발장 앞에서 주춤거리는 어르신들을 보고 말한다. 팔순이 넘으신 어떤 어르신들은 신발장과 옷장을 구별하시기도 어려운 모양이다. 나는 신발장 번호를 찾아 열쇠를 끄르고 어르신 신발을 넣어 주었다. 눈이 어두우니 키 번호가 잘 보일 리가 없다. 옷장의 번호를 차는 것도 마찬가지다. 몇몇 어르신들의 키를 띠 주고 옷을 넣게 해드렸다.  


욕실로 들어가니 사람들이 꽤 많았다. 설을 새기 전에 목욕재계를 하러 온 사람들이리라. 자 이제부터 기쁨조 역할을 해낼 차례이다. 나는 간단하게 샤워를 하고 어르신들의 등을 밀어드리기 시작했다. 뒤늦게 사회복지사와 요양보호사 공부를 하고 노인요양원에서 봉사와 근무를 해본 나는 나이든 어르신들의 마음을 어느 정도 헤아릴 줄 알고 있다. 먼저 오늘 일행 중 가장 나이가 많으신 한 씨 어르신의 등부터 밀어드리기 시작했다.

 

“아니, 괜찮은데. 허허. 고맙구먼 잉.”

 

한 씨 어르신은 86세로 키가 작으신데 항상 웃는 얼굴을 하고 계신다. 먼저 샤워수건으로 비누질을 하고 다음에 때를 밀었다. 살갗이 얇으시니 살살 밀어야 한다. 등과 어께 안쪽 옆구리 등을 골고루 밀어드리니 아주 좋아 하신다. 요양보호사를 공부할 때에 배운 솜씨다. 어르신들은 때가 나오지 않을 것 같은 데도 뜨거운 물에 부른 살갗은 의외로 때가 많이 나온다.

 

 

▲섬진강 물도 얼어붙었다.

 

 

내가 사회복지사와 요양보호사를 공부하게 된 동기는 순전히 아내 덕분이다. 아내가 난치병으로 15년 가까이 않고 있다 보니 만약의 경우를 생각해서 이 공부를 하게 되었다. 아내가 심장이식을 기다리며 병원에 입원을 하고 있는 사이에 나는 병실에서 아내를 간호하며 인터넷으로 학점은행에서 사회복지사 독학사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이어서 내친 김에 요양보호사 자격증도 땄다. 여차하면 아내를 위한 요양보호사 역할도 할 겸…

 

그러나 두 가지 공부를 하면서 정작 나 자신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 공부였다. 그러니 뒤 늦게 공부를 하려면 이 두 가지 공부를 하라고 말하고 싶다. 특히 노인요양원에 가서 사회복지사 실습을 하면서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인생 공부를 하게 되었다. 부부가 나이가 들어 가면서 이 공부를 해도 좋을 것 같다. 둘 중 어느 한쪽이 언제 어떻게 될 줄 누가 알겠는가?

 

내가 실습을 했던 곳은 치매노인을 돌보는 요양원인데 치매 증상도 매우 다양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곳에서 어르신들 목욕을 시키는 방법도 배우게 되었는데 오늘 그 실습 턱을 톡톡히 보게 되었다. 나는 차례로 어르신들의 등을 밀어드렸다. 사람이 손길이 잘 닫지 않는 곳을 잘 닦아드려야 한다. 목 뒤, 등, 어께 뒤, 허벅지 안쪽 등.

“아이고, 고맙구먼.”

 

"때밀이 값 드려야 것는 딩.” 


하하. 이러다가 돈 벌겠다. 모두들 때밀이 값을 주시겠다고 하시니 말이다. 말씀만이라도 벌써 나는 부자가 되었다. 어르신들은 처음에는 미안해서 사양을 하는 척 하다가도 정작 등을 밀어드리면 매우 좋아하신다. 여섯 분의 등을 밀어드리고 나니 내 온 몸에 땀이 난다. 그러나 기분은 매우 상쾌하다. 오늘은 중녕이 여예가 기쁨조 역할을 톡톡히 한 샘이다. ^^


목욕시간을 1시간 반 정도 계획했으나 1시간 정도가 되니 어르신들이 한분 두 분 나가기 시작한다. 목욕도 기운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목욕을 하고 나온 어르신들에게 박카스를 한 병씩 돌렸다. 우리는 남원의 어느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곧장 동네로 돌아왔다. 목욕을 하고 나니 어르신들 얼굴이 훤해졌다. 섣달 금날 목욕재계하고 설을 맞이하겠다는 어르신들의 마음이 맑아 보인다. 새해에는 더욱 건강하고 행복한 날들을 맞이하시길 기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