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섬진강일기

시간의 부자, 시간의 빈자 사이를 오가며

찰라777 2011. 3. 9. 08:52

 

시간이 가난한 사람들

 

 

▲시간의 부자들이 가는 길-섬진강 매화로

 

▲시간의 빈자들이 가는 길-서울 거리

 

 

구례에서 모처럼 서울에 한 번씩 올라가면 마음부터 바빠진다. 대전을 지나면 서울까지 도로 옆에는 거의 아파트와 빌딩들이 도열해 있다. 대전을 지나면 경부선과, 호남선이 만나고 차들이 홍수를 이루기 시작한다. 하늘로 치솟아 오른 빌딩과 바쁘게 움직이는 자동차들은 사람의 마음을 바쁘게 하는 그 무엇이 있다.

 

 

시골에서는 사람들은 동네 골목을 걸어서 다니거나,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 더구나 거의 나이 드신 어르신들이 살고 있어서 모두가 무척 느리다. 마음은 열려있으며, 시계바늘은 느리게 돌아간다. 사람들은 자주 마을회관에 모여 환담을 나누고, 음식을 나누워 먹는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가 '시간의 부자'이다.

 

 

그런데 서울에 도착하면 우선 시간부터 모자란다. 그냥 분위기가 자체가 그렇게 만든다. 사람들은 모두 바쁘게 움직였으며, 자동차를 타고 다니거나 뛰어 다닌다. 서울 톨게이트에는 차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서 있다. 서울 사람들은 모두가 '시간이 가난한 사람'들이다. 아니 서울에 사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시골에 사는 사람들도 서울에 오면 모두가 시간이 가난한 사람이 되고 만다. 이건 나 역시 마찬가지다.

 

 

▲지하철의 광고도 사람의 마음을 바쁘게 한다.

 

 

첫날은 도착하자마자 아산병원에 먼저 들렸다. 아내는 이번에 10여 일 간 외래 진료와 물리 치료를 받기로 되어 있다. 병원에 도착하니 왜 또 아픔 사람들이 그리도 많은지. 병원에 도착하면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큰 병 없이 살아가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라는 것! 이보다 더 행복한 삶은 없을 것이다. 서울 아산병원은 하루에 5만 명이 넘는 환자와 환자 가족들이 오고 간다고 한다. 병원에 근무하는 직원만도 7천명이 넘는다니, 이건 병원 도시다.

 

 

병원에 온 사람들도 모두 바빠 보였다. 어떤 사람들은 울면서 병원에 도착하였으며, 어떤 사람들은 피투성이가 되어 응급실로 실려 갔다. 병원에 도착하면 하여간 모두가 환자처럼 보인다. 병원은 희로애락이 극적으로 교차하는 곳이다. 입원과 퇴원, 회복과 죽음, 수술실의 고통… 병원에는 가장 슬픈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있다. 병원에서는 매일 이 지구상에서 '마지막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 최후의 시간을 산자와 죽은 자가 마지막으로 보내는 시간만큼 더 슬픈 일은 없을 것이다.

 

 

 

만남의 시간들

 

 

다음날은 이태리에서 모처럼 몇 년 만에 한국에 온 호야님을 삼청동 옴 레스토랑에 만났는데, 호야님도 어찌나 바쁘던지 겨우 시간을 쪼개서 만날

 

수 있었다. 호야님은 국제적으로 바쁜 사람인 것 같다. 한국에 오기 전에 러시아 여행을 갔다가 곧 바로 서울로 날아왔다고 한다. 그러나 어쨌든 그렇게 바쁜 일정 속에서도 호야님을 만나다니 그보다 더 즐거운 시간은 없었다. 호야님의 동생인 순아 님과 영주에서 올라온 아녜스님 그리고 아녜스님의 귀여운 딸 혜인이도 함께한 귀한 자리였다. 하여간 그 귀한 시간에 우린 네팔의 요리사들이 만든 난을 북북 찢어서 먹으며 짧은 시간에 그 동안에 쌓인 이야기들을 줄줄이 나누었다. 호야님은 이틀 후에 이태리로 귀국을 한다고 했다. 참으로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이 아름다워 보였다.

 

 

호야님을 만난 그 날 저녁에는 아내의 절친 생일날이었는데, 토평에 있는 '좋구먼'이라는 식당에서 저녁 초대가 있어서 우린 거기까지 가서 저녁을 먹었다. 식당이름이 참으로 괴짜였다. 우리는 한강에 떨어지는 낙조를 바라보며 세부부가 함께 저녁을 먹었는데, '좋구먼'이라는 식당 이름은 근사한데 비해 음식은 별루였다. 그러나 포도주를 한잔씩 하며 한강의 낙조를 바라보는 것은 참으로 멋졌다.

 

 

그 다음 다음날은 마포 합정동에 살고 있는 막역한 친구의 점심초대를 받고 세 부부가 함께 점심을 함께했다. 붕어찜 특식을 했으니 꼭 오라는 것. 친구는 월척이 넘는 붕어를 어디서 구했는지 도대체 멋진 붕어찜 요리를 밥상에 올려놓았다. 우리는 그 희귀한 요리를 먹으며 끝없는 이야기를 했다. 마침 효곡 마을에 사는 동네아저씨가 백운산에서 나온 고로쇠 물을 두 통을 주어서 그 물을 점심에는 합정동의 친구 집에서, 저녁에는 잠실근처의 '부부사랑' 모임에서 나누워 마셨다. 그런데 합정동에서 잠실까지 차를 몰고 가는데 2시간이 넘게 걸렸다. 이 시간이면 서울에서 대전을 가는 거리다. 서울은 그런 곳이다. 그러니 모두가 시간이 모자란 가난한 사람이 되고 만다.

 

 

 

남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

 

 

셋째 날은 수유리 4.19국립묘지 근처에 있는 향운사에서 거의 하루의 시간을 보냈다. 향운사의 두 비구니 스님이 주관하는 '자비공덕회'는 한 달에 한 번 '남을 위해 기도하는 모임'이다. 이날 사람들은 집에서 남을 위해 기도하며(기도를 정말로들 했는지는 모르지만) 모은 보시금을 털어서 가지고 온다. 그리고 그 성금을 부처님 전에 바치고 함께 남을 위해 기도를 한다. 정확히 10시 반에 시작하는 기도는 스님의 법문까지 해서 거의 오후 1시경에 끝난다. 그 성금은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쓰인다. 자비공덕회는 우선 네팔의 가난한 어린이들을 위한 학자금을 후원하고 있다.

 

 

기도가 끝나면 사람들은 점심을 먹는다. 점심요리는 매월 당번을 정해서 요리를 준비해 올 사람을 두 명을 지정하여 그분들이 음식을 준비해 온다. 향운사의 법당은 아주 작다. 북한산 백운대가 바라보이는 작은 주택을 개조한 암자인데 법당은 부엌겸, 마루겸, 식장으로 사용한다. 그래도 매월 정성스럽게 기도를 올리고, 정성스럽게 준비해온 요리를 먹으며 백운대를 바라보는 시간이 매우 기쁘고 마음 뿌듯하다.

 

 

명조, 지상 두 비구니 스님은 포대화상처럼 항상 맑은 웃음을 지으며 사람들을 맞이한다. 두 스님은 물질적으로 매우 가난하다. 두 스님을 만날때마다 나는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나니"란 성경구절이 떠오른다. 가난하기에 두 스님의 미소는 더욱 부자처럼 보이는 것일까?

 

 

도대체 인생에 있어서 나를 위해 기도 하는 시간도 없는데 남을 위해 기도를 하다니! 이 얼마나 위대한 시간인가? 그래서 이 위대한 시간을 맞이하기 위해서도 아내와 나는 매월 넷째 토요일에는 서울에 가고 있다. 물론 아내의 병원을 간다든지 하는 서울에서 볼일도 볼 겸 오는 것이지만 하여간 하늘로 멋지게 솟아오른 백운대를 바라보며 남을 위해 기도를 하는 선량들과 함께 점심공양을 먹는 것은 참으로 멋진 시간이다. 아마 그 바쁜 서울의 일정 중에서도 가장 느리게 시간의 여유를 누리는 순간일 것이다.

 

 

법정스님 1주기에 모인 사람들

 

 

하여간……

이번 서울 체류는 11일간이나 계속되었다. 그 동안 아내는 이틀 걸러 병원에 다녔고, 나도 대장에 이상이 생겨 병원에 두 번이나 가서 진찰을 받고 약을 타왔다. 서울에 오면 바쁘기도 하지만 괜히 아픈 곳도 생기는 것 같다.

 

 

서울에 머무는 동안 가장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낸 날은 법정스님 1주기 추모제의 날이었다. 나는 그날(2월 28일) 홀로 길상사로 갔다. 스님은 모두의 영원한 스승이자 귀한 말씀을 조옥 같은 옥필로 남기고 떠난 이 시대의 선인이다. 또한 스님의 이 시대에 내가 가장 존경했던 분이시기도 하다. 길상사에는 많은 사람들이 왔으며, 언론기관의 기자님들이 취재 경쟁을 벌이기도 했다.

 

 

이미 법정스님의 추모제를 기사로 써서 오마이뉴스에 올리기도 했지만, 스님이 입적을 하신지 엊그제 같은데 벌써 1년이 지났다니 믿기지가 않는다. 스님의 그 날카로운 눈초리와 간결한 법문이 '죽비'가 되어 지금도 쏟아져 내리고 있는 것만 같은데 말이다.

 

 

그날 송광사 방장 보성스님의 추모법문은 끝내 눈물샘을 자극하고 말았다. 시자들의 부축을 받으며 추모장으로 들어온 보성스님은 벼락 치는 할! "출가자는 그래야 해!"라는 소리로 대중을 놀라게 했지만 눈물샘은 자극한 내용은 그 안에 담긴 법문이다.

 

 

"……하루는 (법정스님이 쌍계사에서) 20리 떨어진 구례 장터에 (걸어서)가서 찬거리를 사고, 아는 집에 가서 고추장도 좀 얻었다. 그걸 가지고 (걸어서) 오느라 법정스님은 그만 공양 시간에 조금 늦고 말았다. 그때 효봉스님이 '법정아, 이리 좀 들어오너라'라고 하더니 '오늘은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그만 점심을 먹지 말자'고 하셨다."

 

나는 이 말을 듣자 갑자기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쌍계사와 구례읍 중간지점인 간전면에 귀농하여 살고 있는 우리 마을에서 구례장터까지는 8km 정도의 거리이다. 보성스님께서 20리라고 하신 것은 시간과 거리의 개념을 계산하지 않는 먼 거리를 표현하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하동 쌍계사에서 구례읍까지는 40리가 넘는 거리다. 구례 장을 보러 차를 몰고 갈 때마다 나는 걸어서 장을 보러 갔을 법정스님을 생각하게 된다. 추은 겨울날 음식을 탁발하기 위해 팔십 리 길을 홀로 길을 걸어가는 스님의 모습이 눈에 어른거리기도 한다. 아아, 법정 스님이 그립다!

 

 

먹기 전쟁, 소리 전쟁의 거리에서

 

 

 

 

 

길상사를 나오는 나는 무교동 북어국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찾아온 무교동 북어국집은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 장소, 그 넓이, 그 맛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2시가 넘었는데도 나는 줄을 서서 한참을 기다리다가 겨우 식탁 한 코너를 차지하고 북어국을 맛있게 먹었다. 한마디로 먹기 전쟁이다.

 

 

북어국집은 자리에 앉으면 30초 만에 반찬이 나오고, 또 다른 30초 만에 펄펄 끓는 북어국이 나온다. 사람들은 단 5분도 안 되어 북어국을 호르륵 마시고는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 아니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눈치를 해서도 더 이상 오래 앉아 있을 수가 없다. 나도 단 5분만에 북어국을 호르륵 마시고 무교동 거리로 나왔다. 무교동 먹자골목을 옛날 그대로 있는 곳이 많았다. 부민옥, 남포면옥, 용금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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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친김에 무교동 거리를 거닐다가 명동거리를 걸어보기로 했다. 명동은 역시 예나 지금이나 활기찬 거리다. 사람들이 명동거리를 가득 메우며 북적거리고 있었다. 쇼핑가마다 너무 시끄러워서 잘 알아들을 수도 없는 음악들을 크게 틀어 놓고 있었다. 쇼윈도에서 춤을 추는 사람, 미끼마우스나, 강아지, 고양이 인형을 둘러쓰고 호객을 하는 모습도 우스꽝스럽게 보였다. 명동은 명동이다. 먹기 전쟁, 소리 전쟁… 서울은 그런 곳이다.

 

 

나는 현란한 명동거리를 거닐다가 명동 성당으로 갔다. 소음이 사라지는 높은 곳에 명동 성당이 위풍당당하게 자리 잡고 있다. 두 팔을 벌린 예수님은 부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 있는 예수님 상과 흡사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마태 11:28)" 예수님은 그렇게 외치고 계셨다. 나는 성당 안으로 들어가 성수를 이마에 찍고 '성부와 성자 성신의 이름으로" 기도를 올렸다. 마음이 다소 편안해지고 시간이 느리게 흘러갔다. 크리스마스 날이면 해마다 찾아갔던 곳이다.

 

 

샤갈 전을 관람하는 사람들

 

그 바쁜 와중에서도 우리는 서울 시립미술관에서 열리는 '샤갈 전'을 관람했다. '색채의 마술사 샤갈'의 여러 그림중에서도 내가 가장 보고 싶었던 것은 하늘로 둥둥 떠다니는 '도시 위에서'란 그림이다. 프랑스를 몇 번이나 여행했으면서도 그의 그림을 볼 시간이 없었는데 서울에서 샤갈의 그림 원본을 볼 수 있다는 것은 큰 행운이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저렇게 행복한 모습을 화폭에 담을 생각을 했을까? 샤갈의 그림은 거의가 행복하게 보여서 좋았다. 고흐의 그림은 그의 파란만장한 삶처럼 슬프게만 보이는데 샤갈의 그림은 98세까지 장수했던 그의 삶만큼이나 따뜻하고 행복하게 보여서 그림을 보는 나 역시 행복한 시간을 가졌다.

 

 

나는 전시장을 돌아보고 매장에서 '도이 위에서'란 그림 액자를 팔만 육천 원이나 주고 아내의 생일선물(사실은 내가 좋아서 샀지만)로 샀는데, 아내가 눈과 마음으로 보았으면 되었지 그렇게 큰 돈(우리로서는)을 주고까지 살 필요가 있느냐고 하는 바람에 다음 날 다시 미술관까지 가서 그림을 돌려주고 환불을 받아야 했다. 선물을 받는 당사자가 싫다는데 굳이 고집을 피울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지하철을 타고 덕수궁 까지 가서 그림을 돌려주고 대신 엽서로 된 그림을 6천원을 주고 무려 네 장이나 샀다. 도시위에서, 유대인 예술극장의 소개, 곡예사, 잔디위의 시인 등.... 나는 말과 돼지가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집 앞 마당에서 한가롭게 잔디에 누워 있는 시인의 그림이 있는 집이 좋았다. 언젠가는 나도 섬진강변에 저런 집을 하나 지어보겠다고 생각했다.

 

 

샤갈의 그림 넉 장을 사들고 환불을 받은 돈으로 이태원에 있는 '타이가든'이란 레스토랑에서 아내와 영이, 경이 우리 네 식구가 아내를 위한 맛있는 음식을 먹고 나니, 아내도 좋아하고 아이들도 좋아하고 해서 그림을 산 것보다 더 행복했다. 그것은 '폰더 시의 위대한 결정' 보다도 더 위대한 결정을 했다는 생각이 들어 타이 음식을 먹다가 나는 피식 웃음이 절러 나왔다.

 

 

서울을 떠나기 하루 전날(3월 6일)에는 CGV강변에서 '블랙스완'이란 영화를 보았다. 조조할인 표는 몇 년 동안 보았던 포인트로 무료 관람을 하게 되었는데, 생각ㅂ다 영화가 좋았다. 영화의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이 흐르는 은막위에 펼쳐지는 나탈리 포트만의 연기는 과히 슈퍼 급이었다. 그러나 흑조의 마지막 장면은 너무 슬펐다.

 

 

 

다시 시간의 부자로 돌아오다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곳 섬진강변의 우리집 마당에 자전거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그렇게……

열하루가 지나갔다. 그러나 열하루 내내 나는 시간이 가난한 사람이었다. 별루 중요한 일들도 아닌데 왜 그리 부산을 떨고 바빴는지 모른다. 인간이 만든 문명의 이기들과 빌딩의 스카이라인, 서울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두 바쁘니 덩달아 바쁠 수밖에 없는 곳이 서울이다.

 

 

그리고……

나는 다시 섬진강으로 돌아왔다.

자연스럽게 솟아오른 지리산 봉우리들은 중압감이 없었으며, 나를 본래의 느린 사람으로 되돌려 주었다. 굽이굽이 흐르는 섬진강은 나를 다시 시간의 부자로 만들어 주었으며, 시간의 부자가 된 나는 여기까지 꽤나 긴 장문을 쓸 수도 있게 해주었다. 시간은 섬진강처럼 느리게 흘러가고 있으며, 마을 사람들은 모두들 웃으면서 우리 부부를 반겨주었다.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곳 섬진강변의 우리집 마당에는 자전거가 집 떠난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마을 주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헌옷 수거의 날입니다. 집에서 입다가 남은 헌옷이 있으시면 마을회관으로 가지고 나오시기 바랍니다. 이상입니다."

 

 

아침 7시. 조용한 아침이다. 이장님의 방송이 고요한 마을에 울려 퍼진다. 수평리의 아침은 이장님의 방송 멘트로 시작된다. 마을은 이장님의 멘트로 봄잠을 깨고 기지개를 편다. 시간의 부자마을인 수평리는 넉넉하고 평화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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