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섬진강일기

남자의 바람끼를 잡아준다는 운조루의 호랑이 뼈

찰라777 2011. 4. 5. 20:16

 

호랑이를 채찍으로 잡았다는 류이주

  

▲운조루 솟을대문에 걸린 호랑이 뼈.

액운을 막아주고 남자의 바람 끼를 막아준다고 하는데...

 

 

조선시대 3대 명당 운조루를 지은 류이주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 '명당에도 임자가 있다'고 한다. 즉 자격을 갖춘 사람만이 명당을 차지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금환낙지남한 최고의 명당에 집을 지은 인물을 탐구해 보는 것도 운조루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류이주는 도대체 어떤 생각으로 그의 고향도 아닌 이곳 지리산 자락에 운조루를 지었을까?

  

류이주(柳爾冑)는 1726년 문화류씨 곤산군파 30대 류영삼(柳榮三1675~1735)과 영천 최 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선조들은 본디 지금의 대구 비행장 가까이서 살았다. 힘이 장사인 그는 청운의 꿈을 품고 서울로 올라가 스물여덟 살 나던 해인 1753년(영조 29년)에 무과에 급제를 했다.

 

<조선실록>에 보면 영조 31년 홍봉환의 천거로 무관에 특채된 그는 '새재'에서 채찍으로 호랑이를 쳐 잡을 정도로 힘이 장사였다. 그가 정말로 호랑이를 채찍으로 잡았을까? 그러나 이 전설적인 이야기는 솟을대문에 걸어 놓은 호랑이 뼈가 말해주고 있다.

 

▲호랑이 머리 뼈를 도난을 당해 대신 말뼈를 걸어 놓았다.

  

 

솟을대문(행랑채의 지붕보다 높이 솟게 지은 대문) 위에는 두 개의 뼈가 걸려 있다. 대문에 웬 뼈일까? 대문 안 쪽에 평상에 앉아 쑥을 다듬고 있는 할머니에게 입장료 천원을 내고 대문에 걸려 있는 뼈의 내력을 물어 보았다.

 

"할머니 저 대문 위에 걸린 뼈는 무슨 뼈지요?"

"호랑이 뼈와 말뼈여."

"호랑이 뼈요? 그걸 어디서 났어요?"

"우리 조상 류이주 어른이 채찍으로 잡았다네."

"호오, 그렇군요. 그런데 대문에 왜 호랑이 뼈를 걸어 놓지요?"

"호랑이 뼈는 액운을 막아 주는 것인디, 호랑이 뼈를 간직하고 있으면 바람 난 남편의 첩도 떨어져 나가버려. 옛날 어르신들이 다 때주고 째 끔밖에 안 남았지. 그런데다가 호랑이 머리뼈는 도둑을 맞아 한쪽에는 호랑이 뼈 대신 말 뼈를 걸어두었어."

  

▲9대종부 이길순 할머니가 다듬어 놓은 쑥과 나물 

 

운조루 9대 종부인 이길순(76세) 할머니는 쑥을 다듬으며 지나간 말처럼 말한다. 류이주가 채찍으로 잡았다는 '호랑이 머리 뼈'를 이곳 솟을대문에 걸어 두었다는 것. 평북절도사(지방 병마를 지휘하던 무관벼슬)로 부임하던 류이주는 삼수갑산(함경도에 있는 지세가 험한 三水와 甲山)을 넘다가 호랑이를 만났다.

  

힘이 장사였던 무관 류이주는 두려워하지 않고 채찍으로 호랑이를 때려잡았다. 그가 잡은 호랑이 가죽은 영조대왕에게 바치고, 뼈는 잡귀가 침범하지 못하게 운조루의 홍살문(궁전, 관청, 릉 같은 곳에 두 기둥을 세우고 위에 붉은 살을 세운 문)에 걸어 두었다. 이 일로  류이주는 영조대왕으로부터 '박호장군'이란 칭호를 얻게 되었다.

 

호랑이 뼈는 남자의 바람 끼를 잡아준다?

 

호랑이 뼈는 귀신을 쫓아내고 액을 막아주며 남편의 바람 끼를 잡는데 효험이 있다고 소문이 나면서, 인근마을은 물론 타지에서 온 여인들이 조금씩 갉아가는 바람에 조금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 그러나 내 눈에는 호랑이 뼈인지 말뼈인지 구분이 잘 안 간다. 호랑이 머리 뼈는 도둑을 맞아버리고 지금은 '말머리 뼈'로 대신하고 있다고 한다. 

 

6.25를 거치며 빨치산의 피해도 벗어났던 운조루가 도둑과 강도로 몸살을 앓고 있는 것이다. 10대손인 유홍수(柳鴻洙,1954~)씨는 문화재를 훔치러 온 강도를 만나 둔기로 머리를 맞은바람에 2년동안이나 병원 신세를 지고 지금도 고생을 하고 있다. 집안의 도둑이 적보다 더 무섭다더니 이를 두고 한 말일까? 머지않아 운조루의 기둥도 떼어가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사진 : 안채에 걸린 호랑이 그림)

  

류이주는 마흔 두 살의 나이에 수어청 파총 성기별장(조선시대 용호영 종이품 무관벼슬)이 되어 남한산성 쌓는 일에 동원되었다가, 그 이듬해 전라도 병마우후(조선시대 종삼품 무관벼슬)가 되어 낙안군수(1771)가 되었다. 그는 금주령을 위반한 죄목으로 삼수(三水)로 유배되었는데, 이듬해 풀려나 구례군 문척면 월평으로 이사를 왔다.

 

'조선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낙안군수 때 낙안세곡선이 한양으로 가던 길에 침몰한 책임 때문에 귀양 갔던 것으로 나타난다. 영조말엽 사색당쟁에 휘말려 류이주를 추천했던 홍봉환이 시파(時派-영조 때 사도 세자를 두둔한 당파)로 세손인 정조를 옹호하다가 벽파(僻派-영조 때 사도세자를 무고하여 비방한 당파)에 몰려 1771년 청주로 귀양을 갔고, 홍봉환의 추천으로 특채가 된 류이주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는 몸을 피해 구례군 문척면 월평으로 왔다가 토지면 구룡정리로 이사를 하여 지금의 운조루터와 인연을 맺는다. 구룡정리에 몸을 피해 살던 1775년 그의 조카인 덕호를 이곳 토호였던 이시화(1725~1784)의 딸과 혼인을 시켜 사돈 간이 된다.  처음 그가 살던 구룡정은 오늘날 금환낙지의 중심지라는 '용정'을 뜻한다.

 

수원화성을 쌓은 축성의 명장 류이주

  

  영조가 죽고 정조가 등극을 하자 류이주는 함흥 오위장(五衛將)으로 재등용(1776)되어 함흥성을 쌓는데 그의 능력을 발휘한다. 류이주는 수원화성, 남한산성, 상담산성, 낙원읍성 등 정조 때 성과 궁궐 공사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던 무관이었다(사진: 상당에 모셔 놓은 류이주 영정).

 

 류이주는 수원 유수로 재직하면서 수원성을 쌓을 때에 정조의 마음에 흡족할 정도로 축성을 잘 했다고 한다. 당시에 정조는 신하들이 "성을 튼튼하게 쌓으면 되지 왜 이렇게 아름답게 쌓습니까?" 하고 묻자, "아름다움이 능히 적을 이길 수 있느니라" 하고 대답을 했을 정도로 류이주는 성을 아름답게 축성을 했다. 여기서 우리는 건축을 사랑하는 류이주의 정신을 엿볼 수 있다.

 

그 뒤 삼수(북한 양강군-압록강연안에 있음)부사가 된 류이주는 조카인 덕호를 양자로 입양시키고, 이시화의 땅이었던 지금의 '운조루' 자리를 집터로 양여 받는다. 산사태의 위험이 있고, 고인돌마저 널려있어 이곳 사람들조차 개간을 꺼리는 자리에 그는 집을 짓기 시작한다. 1776년 9월 16일 상량식을 가진 운조루는 6년 후인 1782년 류이주가 용천(북한 평북군-평안북도 북서부)부사로 있을 때 완성을 한다. 류이주는 운조루 터를 닦으면서 "하늘이 이 땅을 아껴두었던 것으로 비밀스럽게 나를 기다린 것"이라고 기뻐했다. 

 

운조를 지은 류이주는 부와 명예를 동시에 누리게 된다. 운조루에 남아있는 문서에 따르면 구례로 처음 옮겨왔을 때 노비는 5명이었으며, 용천부사를 지내고 경상도중군으로 있던 1786년 그 집 노비수효는 11명으로 늘었다. 풍천부사를 지내던 시절인 1792년의 노비는 9명이었고, 이듬해 재산상속 문서에는 21명으로 늘었다. 그 이후로 운조루 역대 주인들이 벼슬을 할 때 하사 받은 노비들이 더 늘어났고, 운조루 주변에는 스물다섯가구의 노비들이 살았다.

  

 

▲운조루로 들어가는 솟을대문

   

 

그러나 운조루는 1944년 노비들을 모두 해방시켜 양민으로 살도록 방면 했다. 노비해방은 6.25 전쟁을 거치면서도 운조루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의 하나가 된다. 좌익에 가담했던 일부 노비들이 은혜를 입은 운조루 만큼은 지주와 부자들을 징벌하는데 손을 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운조루의 '타인능해'정신과 함께 운조루가 살아남은 가장 큰 이유가 된다.

 

풍류 정신이 깃든 운조루

 

류이주는 그가 처음 이사와 살았던 '구만들'의 지명을 따 호를 귀만(歸晩)이라 했으며 그의 집을 '귀만와'(歸晩窩)라고도 불렀다. 여러 채가 연결되어 점자 모양을 갖춘 이 집은 안채, 사랑채, 행랑채, 누마루채 및 방마다에 당호와 방의 별칭이 붙어 있으나 전체를 일러 '운조루'라 한다.

 

  ▲운조루 구조

 

 

운조루의 택호는 '구름 속의 새'처럼 '숨어사는 집'이란 뜻과 함께 '구름 위를 나르는 새가 사는 빼어난 집'이란 뜻도 지니고 있다. 본디 이집의 이름은 중국의 도연명(陶淵明)이 지은 귀거래혜사(歸去來兮辭)에서 따온 글귀이다. 도연명이 귀거래혜사를 읊은 사연은 다음과 같다.

 

도연명이 41살 나던 해 평택 현령 벼슬을 살고 있었다. 부임 80일 만에 때마침 군에서  행정시찰을 온다고 하자 현의 관리로 관복을 차려입고 나가 독우를 맞이할 처지가 한스러웠다. 도연명은 '나는 오두미의 녹을 위해 허리를 굽혀 시골의 소인배들을 섬길 수는 없다'고 선언, 관복을 벗어던지고 고향에 돌아가면서 <돌아가자! 전원이 황폐해가고 있거늘 어찌하여 돌아가지 않는가>로 시작되는 귀거래혜사를 읊었다. 

 

▲안채에 걸린 운조루 현판

 

류이주는 도연명의 귀거래혜사 가운데서 '구름은 무심히 산골자기에 피어오르고, 새들은 날기에 지쳐 둘우리로 돌아오네(雲無心以出岫 鳥倦飛而知還)'의 문구에서 첫머리 두글자를 취해 그의 집 이름을 삼았다. '구름 위를 나는 새가 사는  빼어난 집'이란 뜻이다. 운조루의 이름을 음미해 보면 한 때 류이주가 벼슬을 버리고 오미동을 찾아 숨어 살겠다는  그의 심정을 읽을 수 있다.

 

▲노란 산수유에 둘러싸인 운조루 뒤뜰

 

운조루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검소하고 겸손하다. 운조루는 나눔과 베품의 타인능해 정신, 분수에 맞는 생활정신, 풍류정신, 인간존중의 정신, 100년 동안 일기를 써온 기록의 정신, 선정을 베푸는 정신, 건축을 사랑한 정신, 선비정신, 효도정신, 굴뚝을 낮게 하는 겸애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 이러한 10대 정신이 깃들어 있기에 운조루는 사라지지 않고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