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섬진강일기

여보, 우리 다시 희망을 이야기해요!

찰라777 2011. 11. 22. 07:26

 

여보, 우리 다시 희망을 이야기해요!

 

1년 동안 집수리에 매달렸던 멕가이버 생활

 

전세대란은 비단 수도권뿐만 아니라 지방에까지 그 파급효과가 크다.

서울에 살고 있던 나는 작년 6월 지리산 자락의 빈농가를 세 들어 귀촌을 했다.

결코 쉽지만은 않은 결단이었다.

평생 살아왔던 서울을 떠나온다는 것은 말이 쉽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렇다고 꿈같은 전원주택을 지어서 이사를 오는 것도 아니다.

낡은 농가와 인연이 닿아 이사를 오게 된 것이다.

허물어져 가는 빈농가를 수리해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살아본 자만이 안다.

 

 

▲페인트를 칠하며 집을 수리했던 추억, 나는 멕가이버처럼 1년 내내 손수 집을 수리했다.

 

 

나는 지난 15년간 아내의 난치병을 치료하느라 경제사정이 어려워졌다. 설상가상으로 심장병으로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던 아내는 3년 전에 심장이식이란 엄청난 시련을 겪어야 했다. 그동안에 쏟아 부은 의료비로 경제사정은 더욱 어려워졌다. 그런데 아내는 늘 물 맑고 공기 좋은 곳에서 살고 싶다고 했다. 아내는 평생 시골 전원생활을 꿈꾸어 왔다. 사실 아내의 건강을 위해서도 전원생활이 필요했다.

 

나는 살아가야할 어떤 돌파구를 찾아야 했다. 경제사정을 고려해서도, 아내의 건강을 위해서도… 그런데 마침 지인으로부터 이곳 지리산 자락 섬진강변에 빈농가가 있다는 소식이 왔다. 작년 3월 현지를 답사한 우리는 귀촌을 하기로 결심을 했다. 그리고 한 달에 10만원, 연 월세 120만원을 일시불로 지불하고 이사를 했다. 월세계약은 매년 일시불로 하기로 했다. 주인은 앞으로 10년은 이사를 계획이 전혀 없으므로 마음 푹 놓고 살라고 했다.

 

▲작년 6월 서울에서 지리산 자락으로 이사를 마치고

 

 

막상 이사를 하고 보니 도저히 그대로는 살 수가 없었다. 이사를 한 후 1년 내내 집수리를 했다. 그동안 집을 비워둔 탓에 모든 것이 낡고 삐거덕거렸다. 화장실과 보일러, 문, 도배, 부엌, 창문… 무엇 하나 손을 대지 않은 것이 없었다. 막힌 하수구를 뚫고 정화조도 손을 봤다. 집 구석구석 손이 안 가는 곳이 없었다. 겨울에는 보일러와 수도파이프가 얼어 터져서 냉방에서 새우잠을 자기도 했다.

 

마당에 작은 텃밭과 정원도 만들었다. 시멘트로 발라놓은 바닥에 흙과 돌을 리어카로 날라 와 세평 텃밭도 만들었다. 정말 지난 1년은 멕가이버 같은 생활을 해야 했다. 모든 걸 손수 수리를 해야 했다. 허구한 날 집수리를 하는 나를 보기가 딱했던지 일부러 나를 도와주러 온 친구들이 오기도 했다.

 

 

▲마당에 흙과 돌을 옮겨와 텃밭을 만들기 위해 리어카로 흙을 나르고

 

▲돌을 주어와 텃밭을 만들었다.

 

"야, 집수리 좀 작작하고 대강대강 살아가라. 그래봐야 집주인 좋은 일만 시키는 것 아니야?"

"글쎄, 허지만 살만하게는 고쳐서 살아야지. 그래도 이 집이 우리에겐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 그러니 멕가이버처럼 집도 스스로 고치고 늘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어."

"그러다가 주인이 집을 비워달라고 하면 어쩌지?"

"허허허,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돼. 집주인은 앞으로 10년 이내에는 전혀 이사를 올 계획이 없다고 했어."

"그걸 누가 보증해."

"집주인이 누차에 걸쳐 말했거든. 10년 이내로 절대로 이사를 올 생각은 없으니 마음 푹 놓고 살라고."

"그랬으면 정말 좋겠구나. 그래, 시골 생활은 좀 어때?"

"그럭저럭…… 도시보다 불편한 것도 많지만 우리에겐 좋은 것이 훨 많아. 아내의 건강도 날로 좋아지고 있고."

"그것 참 다행이구나. 그런데 도대체 여기서 뭘 해먹고 사나? 농사를 짓는 것도 아니고."

"다들 그런 말을 물어와. 그런데 말이야, 산골에 살다보니 일단 돈이 별로 들 게 없어. 야채는 텃밭에서 조달하고 동내 인심에 좋아 날마다 이것저것 떨쳐주고 간다네. 교통비 안 들고, 경조사비를 외면하니 몇 십만 원이면 한 달을 살아갈 수 있더군. 아내의 병원비만 아니면 크게 돈 들어갈 게 없어. 앞으로 농지를 임대하여 농사도 좀 지어볼 작정이야."

"흐음…"

 

그랬다. 세평 텃밭에서 먹을 야채를 조달했다. 체면을 차리지 않으니 돈이 별로 들게 없었다. 아내의 병원비는 얼마 안 되지만 국민연금으로 근근이 해결하고 내 용돈은 가끔 돌아오는 원고청탁으로 이럭저럭 견뎌내고 있다. 내년에는 정말 농지를 임대해서 농사를 지어볼 생각도 하고 있다.

 

▲손수 만든 텃밭에 야채를 심어 가꾸었다.

 

 

산골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남이 보면 꿈같은 낭만으로만 보인다. 그러나 낭만은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한다. 우리는 지네에게 몇 번이나 물리고, 모기와 파리 등 벌레와의 전쟁을 치러야 했다. 집수리 등 웬만한 일거리는 읍내에서 불러와야 하는데, 돈이 안 될 것 같으면 잘 오지 않고 또 비싸다. 서투른 망치질을 하다가 손을 다치고, 텃밭을 만들기 위해 돌과 흙을 나르다가 아내는 어께까지 다쳐 지금까지 치료를 받고 있다.

 

동네 사람들이 집 구경을 오더니 이 집이 이렇게 좋은 집인 줄은 예전에 미처 몰랐다고 한다. 집에 생기를 불어 놓고 살만한 집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사실 아무리 좋은 집이라도 사람이 몇 달만 살지 않으면 금방 망가지고 만다. 사람이 살면서 습도와 온도, 그리고 수시로 망가진 부분을 수리를 해주어야 한다.

 

 ▲텃밭에서 자란 무공해 배추

▲무공해배추로 김장을 하는 아내(작년 11월)

 

 

그래도 텃밭에서 직접 기른 무공해 야채를 반찬으로 밥을 먹게 되다니 살맛이 났다. 올해로 심장이식을 한지 만 3년이 된 아내는 아직도 회복하고 있는 중에 있다. 맑은 물, 신선한 공기, 따스한 햇살이 비치는 텃밭을 일구며 겨우 살아가는 재미를 느끼고 있다. 힘이 들지만 이제 겨우 산골 동네에 사는 맛을 느끼고 있다. 거기에 아내의 건강도 날로 좋아져 가고 있으니 불편한 환경이지만 살맛이 난다. 나는 멕가이버로, 아내는 농사를 짓는 농군으로 살아온 생활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

 

 

집수리 다 끝내고 나니 비워 달라?

 

그런데 지난여름 갑자기 집주인으로부터 집을 비워달라는 전화가 왔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막혔다. 갑자기 내려진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우리부부는 한동안 하늘만 쳐다보며 침묵을 지켜야 했다.

 

이제 집수리를 끝내고 겨우 살만하니 집을 비워 달라?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공지영의 '지리산 행복학교'를 읽으며 쓰러져 가는 빈집을 새집으로 고쳐 놓으니 집주인이 집을 비워달라는 내용을 읽으며, 세상에 이런 일이 다있나 하고 분개를 했었는데, 내가 딱 그런꼴을 당하게 될 줄이야!

 

당초계획은 이 집으로 이사를 오면서 한 5년 정도 살면서 적당한 집을 하나 장만해서 이사를 갈 계획을 하고 있었다. 지리산 자락에 작은 집을 장만하여 이사를 간다는 우리들만의 청사진을 그리며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보람이 있는 일인가? 그것은 우리가 오래전부터꾸어왔던 꿈이었다.

 

▲1년 반동안 집수리를 하고 또 하며, 낭만은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한다는 말이 생각났다.

 

 

이렇게 빨리 집을 비워달라고 할 줄이야 그 누가 알았겠는가? 문득 집수리 작작하고 살라던 친구의 말이 생각났다. 어디로 이사를 가란 말인가? 산골에 빈집은 더러 있지만 살만한 집은 찾기가 힘들다. 설사 빈집을 찾더라도 대폭 수리를 해야 하는 시간과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전화로 통지를 해온 집주인의 사연은 이해를 할 수 없는 이유였다. 진주에 직장을 구해 구례에서 진주까지 출퇴근을 해야 하므로 집을 비워달라는 엉뚱한 이유였다. 이곳에서 진주까지는 승용차로 거의 두 시간 가량 걸린다. 이거야 정말……

 

장가가는 아들 전세자금 마련 때문에

낙향 할 수밖에 없다는 집 주인의 딱한 사정을 듣고 보니....

 

주인에게 이사를 갈 집을 마련 할 때까지 좀 기다려 달라고 했다. 금년 겨울이 지나고 내년 봄까지만 연장해 달라고 했다. 나는 집을 지어 이사를 갈 때까지는 집을 비워 줄 수 없다고 했다. 그랬더니 주인은 도저히 안 된다 했다. 이사를 할 수밖에 없는 긴급한 사정이 생겼다고 하며 좀 만나자고 했다. 서울에서 집주인을 만났다. 부인과 함께 온 집 주인은 자신들이 시골로 이사를 갈 수 밖에 없는 처지를 구구절절 설명하며 우리에게 오히려 통사정을 했다.

 

▲텃밭에서 손수 키운 야채를 캐는 아내는 전원생활의 꿈을 키워가고 있다.

 

 

그런데……집주인의 사연을 듣고 나니 정말 우리보다 더 딱했다. 평생 군인 생활만 해왔던 집주인은 금년에 수도권에 작은 아파트 한 채를 장만하여 이사를 갔다고 했다. 그런데 아들이 갑자기 장가를 가게 되었다고 한다. 아들이 군 장교로 복무를 하고 있으므로 평소에는 설사 결혼을 하더라도 전혀 집 걱정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사택에서 살면 되니까.

 

그런데 며느리 될 사람이 평택에서 음악 학원을 하고 있어 아들을 따라서 살 수 없는 처지라는 것. 그래서 하는 수없이 결혼을 하는 아들에게 전세를 얻어 줄 돈을 마련하기 위해 자신들이 살고 있는 집을 전세를 놓아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들은 살 집이 없어 불가피하게 낙향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

 

아들을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하고 낙향을 해야 한다니… 이 얼마나 기가 막힌 사연인가? 아마 이런 사연은 한국에만 있는 특유한 일일 것이다. 자식 앞에 장사는 없다는 말이 과연 실감이 난다. 그들도 결코 지리산 산골로 내려오기 싫다고 했다. 부인의 스타일로 보아 시골에 살아갈 타입은 아닌 것 같이 보였다. 그러나 아들을 위해서 하는 수 없이 이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는 그들을 바라보자니 갑자기 서글픈 생각이 들기도 했다.

 

"오직했으면 아들에게 며느리 될 사람과 해어지라는 말까지 했겠습니까? 그러나 그럴 수도 없으니 이를 어찌합니까?"

 

그는 참담한 표정으로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 연민의 정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전월세 계약은 한 달을 계약하든 1년을 계약하던 법률상으로 2년까지 유효하다. 그러므로 나는 내년 11월까지 이 집에서 살 권리가 있다. 그러나 이 부부의 사정을 듣고 나니 집을 비워 줄 수밖에 없었다. 아들을 위해 낙향을 하는 이 부부의 심정은 얼마나 참담하겠는가? 전세대란이 서울 수도권에서 이곳 지리산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집도 절도 없으면 어디로 가지?

 

▲계족산에서 바라본 수평리 들판과 내가 살고 있는 동네 중평마을

 

 

집 주인은 11월 말까지 집을 좀 비워달라고 하는데, 우리는 아직 이사를 갈 집을 구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지리산 자락에 살집을 찾아 이곳저곳을 헤매고 있다. 그러나 아직 마땅히 살만한 집을 찾지 못하고 있다. 빈집은 더러 있지만 대폭 수리를 해야 한다. 전세대란의 여파인지는 몰라도 요즈음 이곳 지리산 자락으로 귀촌을 하려는 사람들이 부쩍 늘고 있다고 한다. 동네 앞 가게에는 빈집이나 세들 집이 있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우리들의 딱한 사정을 듣고 평소 잘 알고 지내는 미타암 스님께서 집을 구할 때까지 절에 와서 있으라고 했다. 그렇게 하려면 짐을 이삿짐센터에 맡겨야 한다고 했더니, 스님께서는 그 짐도 절 한 쪽에 컨테이너 박스가 있으니 그곳에 옮겨 놓으라고 했다. 집도 절도 없으면 정말 어디로 가야 할까?

 

끝이 보이지 않는 전세대란은 과연 어디까지 갈 것인가? 그 파장이 이곳 산골 동네인 지리산까지 미치고 있으니 말이다. 오늘도 전세대란 때문에 잠을 설치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인간이 살아가는 데는 의식주 이 3대요소가 해결되어야할 기본적인 문제다. 그중에서도 사람이 거처하는 주거 문제는 살아가는 데 가장 핵심적인 요소이다.

 

▲텃밭에 싱싱하게 자라며 김장을 기다리고 있는 배추와 무

 

 

텃밭에는 아직 배추와 무가 싱싱하게 자라나고 있다. 저 배추와 무로 김장도 해야 하는데 ……. 나비 한마리가 평화롭게 텃밭을 유희하고 있다. 나비는 집 걱정이 없는 듯 태평스럽게 정원을 날고 있다.

 

텃밭, 거실, 방, 창문, 보일러실, 화장실, 창고, 커튼……. 깨진 유리창을 갈아 끼우고, 서투른 솜씨로 못질을 하다가 손을 다친 추억, 천장을 걸레로 닦아내고 페인트칠을 했던 기억. 그 때 아내와 나는 이마에 땀을 훔치며 서로 웃으며 말하곤 했다.

 

"여보, 난 미켈란젤로가 되었나 봐. 이렇게 페인트칠을 잘하다니 말이야."

"호호호, 다빈치나 고흐라고 해도 나무랄 사람이 없을 것 같아요."

 

▲천장에 페인트를 칠하며 미켈란젤로가 천지창조를 그렸던 심정이 되기도... 

 

 

잠을 자다가 지네에게 몇 번이나 물려 달걀을 풀어 소금을 섞어서 바르고 먹던 추억, 청개구리가 얼굴에 폴딱 뛰어와 차가운 느낌에 질겁하며 일어났던 일들도 추억의 한 토막으로 남게 되었다. 녀석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창문마다 방충망을 치고, 난방 테프로 틈새를 막았다. 그래도 녀석들은 어디론가 끊임없이 들어왔다. 이제는 녀석들과 더불어 살아간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그동안 집을 수리하느라 손때가 묻은 정든 집안을 둘러보자니 가슴이 먹먹해진다. 이 집에 이사를 와서 대문에서 문고리에 이르기까지 내 손이 가지 않는 곳이 없다. 집을 수리하는데 알게 모르게 비용도 많이 들어갔다. 그러나 돈이 문제가 아니다. 1년 반 동안 손때가 묻은 집을 돌아보자니 괜히 마음이 서글퍼진다. 집안에 있는 가구도 하나하나 중고제품으로 채워 넣었다.

 

▲세면장 빨래 바구니에 앉아있는 청개구리는 나와 가장 친한 친구였다.

 

 

처음엔 간단한 살림만 하려고 했다. 법정스님처럼 무소유 정신으로… 그러나 법정스님은 "무소유란 불필요한 것을 소유하지 않는 것이다"고 했듯이 세간을 사는 우리에겐 이것저것 여러 가지가 필요했다. 냉장고, 세탁기, 텔레비전, 장롱, 소파, 식탁, 밥솥, 침대, 책상, 책장…… 이렇게 하나하나를 채워 넣다보니 집안에 가득 채워지게 되었다.

 

물론 이런 가구들과 살림살이는 거의가 서울 친구들이 쓰지 않는 것들로 채워졌다. 어떤 친구는 텔레비전을, 또 다른 친구는 에어컨디션을, 전축과 라디오를, 소파를, 식탁을, 카펫을, 심지어 도마와 칼, 선풍기까지 보내 온 친구도 있었다. 책장은 순천 친구의 아파트에 버려진 것을 옮겨왔다. 벽돌과 판자를 사다가 선반과 책꽂이를 만들기도 했다.

 

그런데 집을 아직 구하지 못하고 있으니 이 많은 살림살이를 어떻게 처분해야 할지… 아내는 화분과 냉장고는 혜경이 엄마 집에, 장롱과 침대, 책장 등은 마을에 필요한 사람을 주자고 했다. 물론 찬성이다. 그리고 나머지 살림은 화엄사 뒤 미타암에 있는 컨테이너 박스에 넣어두기로 잠정 결정을 했다. 미타암 각초 스님께서 우리의 사연을 듣고 나더니 흔쾌히 승낙을 하여 주셨다.

 

"정말 집도 절도 없으면 꼼짝없이 노숙자 신세가 될 수밖에 없군요. 허허."

"허허허, 그러게 말이요. 너무 염려 말고 집을 옮겨 놓으세요. 더 좋은 일이 생기려고 그런 것 아니겠어요. 그리고 집을 구할 때가지 절에서 머무세요."

"스님 감사합니다."

 

스님과 나는 찻잔을 앞에 두고 하늘을 바라보며 그냥 웃었다. 그래 웃어야지. 모든 일은 스쳐 지나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도... 총 맞은 것처럼 …… 가슴이 아파……

 

▲문주란 잎사귀 사이에서 둥지를 틀고 있는 청개구리. 녀석의 신세가 나아보여...

 

 

살림살이가 뿔뿔이 흩어지는 수난을 당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를 옮기는 문제와 나중에 필요하면 다시 구해야 하는 어려움이 남아 있다. 그 보다도 마음이 괜히 아프다. 가장 가슴을 아프게 하는 것은 손수 늘린 텃밭에 심은 나무들을 보는 것이다.

 

아내와 나는 장맛비가 내리는 여름 내내 비지땀을 흘리며 리어카에 흙과 돌을 날라 마당에 텃밭을 만들었다. 그리고 아내는 틈만 나면 섬진강 변을 드나들며 나무 묘목을 사다 텃밭에 심었다. 매화, 영산홍, 호랑가시나무, 산수유, 찔레나무… 이웃집 혜경이 엄마가 준 수국, 채송화, 도라지, 취나물, 더덕… 건너집 수정이 엄마 집에서 가져온 매발톱, 국화, 꽃잔디…  흙 한 줌, 나무와 꽃 하나하나가 모두 아내 손길과 나의 땀이 배어 있는 것들이다.  꽃이 피어나자 나비와 벌이 찾아왔으며, 청개구리가 여기저기 둥지를 틀었다.

 

 

▲아내와 전원생활의 꿈을 키어왔던 텃밭

 

 

무엇보다도 우리들에게 늘 다정하게 대해 주었던 마을 인심에 우리는 그만 반하고 말았다. 사실 이곳 지리산 자락은 우리와는 전혀 인연이 없는 타향이다. 그런데도 먼 옛날부터 살았던 것처럼 정이 넘쳐흐르는 이곳을 우리는 제3의 고향으로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이사를 오자말자 주민등록을 이곳으로 옮겼다. 한 5년은 넘게 살 생각으로……

 

마을 사람들은 날마다 아침저녁이면 문 앞에 고추, 가지, 감자, 된장, 오이, 야채, 호박, 밤, 감, 쌀 등을 누군가 갖다 놓고 갔다. 처음에는 누가 그랬는지 몰랐는데 1년을 넘게 살다보니 "이건 누구누구가 갖다 놓은 거야." 하며 저절로 알게 되었다.

 

더욱이 혜경 엄마와의 추억은 절대로 잊어버릴 수가 없다. 그녀는 아내를 언니처럼 따랐다. 새로운 음식을 만들면 늘 냄비에 담아 가져왔으며, 배추와 무, 야채를 심고 기르는 법을 수실 가르쳐 주었다. 우리가 장기 외출을 하면 텃밭과 화분에 물을 주었다. 우린 집 열쇠 하나를 아예 그녀에게 맡기고 다녔다. 그녀는 우리가족이었다. 그런 혜경 엄마에게 아내는 무엇이 던지 다 해주고 싶다고 했다. 그녀에게 아내는 따뜻한 상담역이기도 했다.

 

 ▲우리가 이곳 섬진강 자락에 귀촌하여 농촌생활의 사부이자, 상담역이며

가장 절친한 친구가 되어준 혜경이 엄마의 해맑은 미소

 

 ▲혜경이 엄마와 함께 녹차따기 체험을 하는 아내

 

 ▲녹차덕은 방법을 가르켜 주는 혜경이 엄마

 

▲텃밭을 만들 때 리어카로 함께 흙을 나르는 일을 도와 주었던 혜경이 엄마. 

 

▲배추모종을 하는 방법을 가르켜 주는 혜경이 엄마

 

 

"언니, 언니가 가버리면 나는 어쩌지."

"그게… 그러게 말이야. 나도 정말 떠나기 싫어."

 

두 여자는 요즘 눈만 마주치면 금방 눈에 눈물이 고일 것만 같은 표정을 지었다. 혜경이 엄마는 우리보다 더 우리가 살집을 구하는데 열을 올렸다. 그런 두 여자를 바라보는 나의 가슴은 착잡하기만 하다. 그래서 이 마을에 집을 지으려고 그렇게 터를 찾았지만 아직까지 구하지 못하고 있다.

 

빈터는 많은 데 팔지 않는다. 아들이, 딸이 나이가 들면 낙향을 하여 살 거라는 것이 그 이유다. 따지고 보면 그 말이 맞다. 그리고 도 한 가지 시골사람들은 토지에 대한 애착이 그 누구보다도 많다. 땅을 팔면 그 집이 망하는 것으로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빈집은 많은데 살만한 집은 없다. 빈집은 엄청나게 수리를 해야 하고, 수리를 해 놓으면 언제 또 나가라고 할지 겁이 나기도 하다.

 

"왜 꼭 이 마을에서만 살려고 하느냐고?"

"몰라서 물어요? 정을 붙이려면 얼마나 어려운지를. 그리고 난 혜경이 엄마와 마을 사람들, 이 마을에 너무 정이 들고 말았어요."

"허긴……."

 

 

▲그동안 너무나 정이 듬뿍 들어버린 수평리 마을

 

 

아내와 나는 집 문제로 언쟁 아닌 언쟁을 하기도 했다. 아내는 어떻게 하던지 이 마을에 살려고 발버둥을 쳤고, 나는 다른 곳도 알아보자고 했다. 짧은 시간에 수없이 많은 집터와 집을 보아왔지만 아직 마땅한 집을 구하지 못하고 있다. 집을 비우고, 구하는 일이 너무 급작스럽게 다가온 탓이 크다.

 

아내와 나는 정든 텃밭을 바라보다가 그만 허탈하게 하늘을 바라보며 웃어야 했다. 정말 요즈음 심정은 백지영의 노래 "총 맞은 것처럼"의 노랫말과 똑 같은 처지에 놓여 있다. 총 맞은 것처럼 정신이 너무 없어 그냥 웃음만 나왔다.

 

이 나무들과 어떻게 헤어져야 하나. 구멍 난 가슴에 나무를 심고 꽃씨를 뿌리던 추억이 흘러넘친다. 정말 참아보려 해도 가슴을 막아도 손가락 사이로 허공 사이로 추억이 스며든다. 심장이 멈춰도 이렇게 아프진 않을 것이다. 어떻게 날 좀 치료해줘. 가슴이 뻥 뚫려 채울 수가 없네. 그래서 나는 요즈음 백지영의 "총 맞은 것처럼"이란 노래를 곱씹으며 마음을 달래보기도 한다.

 

"총 맞은 것처럼 정신이 너무 없어/웃음만 나와서 그냥 웃었어/그냥 웃었어 그냥/허탈하게 웃으며 하나만 묻자 했어/우리 왜 헤어져 어떻게 헤어져 어떻게 헤어져 어떻게/구멍 난 가슴에 우리 추억이 흘러 넘쳐/참아보려 해도 가슴을 막아도/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심장이 멈춰도 이렇게 아플 것 같진 않아/어떻게 좀 해줘 날 좀 치료해줘....." 지금 아내와 나의 심정을 가장 잘 대변해 주는 노랫말이다.

 

여보, 우리 이제 다시 희망을 이야기 해요."

 

그러나 우리보다 더 딱한 처지에 있는 집주인에게 집을 비워주기로 약속을 했으니 이 집의 모든 것들과 머지않아 이별을 고해야 한다. 그리고 딱히 이사를 갈 집을 마련하지 못하면 우리는 꼼짝없이 절에 들어가 겨울 을 나야 할 판이다.

 

그래, 하늘을 보고 웃자. 지난 1년 반 동안 지리산 여행 잘했다고 생각하자. 인생은 어차피 여행의 연속이 아닌가? 지난 1년 반 동안의 지리산 산골여행은 정말로 즐거웠으며, 우리 인생에 새로은 청량제와 이정표 역할을 해주었다.

 

봄에는 섬진강변에 피어오르는 매화, 벚꽃, 배나무 꽃, 밤꽃의 향기에 취했으며, 지리산의 진달래, 철쭉, 원추리의 미소에 넋을 잃었다. 겨울이면 노고단의 상고대와 눈꽃에 마음을 씻어냈다. 산에 올라 나물을 캐고, 두릅을 따 싱싱한 반찬을 해 먹었으며, 손수 찻잎을 따서 녹차도 만들기도 했다. 쑥을 캐서 쑥국을 끓여 먹고, 산딸기를 따서 디저트로 먹기도 했다.

 

▲봄이오면 벗꽃터널을 이루는 섬진강변

 

 

그리고 이 집에 머물며 다녀간 수많은 친구와 지인들에게 시골 사는 맛을 느끼게 해 준 것만으로도 만족하자. 멀리 호주와 캐나다에 살고 있는 외국인 친구들도 찾아왔다. 그들은 우리가 사는 집 주변의 소박한 풍경에 취해 원더풀을 연속 토해 냈으며, 김치와 쌀밥을 먹으며 구들방에서 잠을 자며 신기해 했다. 집착을 버리고 다시 새로운 집터를 찾아보자. 사람이 가장 중요한 것은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닌가?

 

 ▲캐네디언 커플 줄리안과 사만타

▲멀리 호주 멜버른에서 온 존과 지나맘이 시골풍경을 부며 신기해 하고 있다.

 

 

"여보, 우리 이제 희망을 이야기해요. 지난 1년 반 동안 여행 잘했다고 생각하고……."

"그래야지요. 허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가슴이 아파요."

"허긴, 그러나 한 생각 바꾸면 또 다른 세상이 기다리고 있지 않겠소? 세상은 죽고 사는 문제가 가장 큰 문제인데 이건 죽고 사는 문제는 아니지 않소?"

"허지만 어깨까지 빠지며 힘들게 만들었던 저 텃밭, 1년 반 동안 집수시를 하며 당신의 손때가 묻은 이 집과 해어 저야 한다니 그냥 가슴이 저려 와요."

"그래도 하늘을 보고 웃어야 해요. 우리 다시 새로운 삶과 희망을 이야기 하며."

"그래야지요."

 

▲지리산 노고단에서 바라본 섬진강 운해.

지리산과 섬진강을 바라보며 다시 희마을 이야기하자고 다짐했다.

 

 

아직 살아서 지리산자락의 맑은 공기를 마시고 있으니 우리는 여전히 희망이 있지 않은가? 우리는 어머니의 품처럼 길게 누워있는 지리산과 굽이굽이 흘러가는 섬진강을 바라보며 다시 희망을 이야기 하기로 했다.

 

태국의 물난리, 터키의 지진으로 집을 잃고 수많은 생명이 죽어가는 것에 비하면 우리는 그래도 행복하지 않은가? 그래, 툴툴 털어버리고 이제 다시 희망을 이야기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