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섬진강일기

수평리를 떠나 던 날

찰라777 2011. 11. 22. 06:55
수평리를 떠나 던 날

 

 

▲수평리 마을사람들과 백운산을 등산면서..

 

 

 

어제는 하루 종일 이삿짐을 옮기느라 바빴다. 수평리에 집을 지을 자금을 마려하기 위해 서울 집을 전세를 내 주었기 때문에 곧바로 이삿짐을 옮길 수가 없었다. 때문에 살림살이 중 서울로 올 짐과 지리산에 둘 짐을 구분하여 보관을 해야 했다.

 

 

 

서울로 보내는 짐은 수평리 등산대장 준모 형님 축사에 있는 컨테이너 박스에, 지리산에 남을 짐은 미타암 컨테이너 박스에 보관을 했다. 마침 준모 형 축사 옆에 빈 컨테이너가 있어 그곳에다 넣어 놓으라고 준모 형이 흔쾌히 수락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준모 형은 자신의 봉고차로 손수 짐을 옮겨 주었다. 짐을 옮기는데 개구리 집 김 선생 부부, 시안이 아빠와 그가 데려온 친구, 아랫집 종신이 아우, 선호 아줌마, 만수마을 하 선생, 혜경이 엄마, 광주에서 온 큰 처남, 처제가 합세를 해서 도와주었다. 정말 너무나 고마운 분들이다,

 

냉장고와 냉동고 등에는 김장을 해서 계속 가동을 해야 하므로 혜경이네 집 창고에 보관을 했다. 아내가 정성들여 가꾼 화분도 물을 주어야 하니 역시 혜경이네 집에 보관을 했다. 자식처럼 가꾸어온 화초들을 아내는 결코 포기를 할 수 없다고 했다.

 

“법정스님은 애지중지 아끼던 란도 남을 주어 버렸는데, 그 화분 동네 사람들 주어버리면 안될까?”

“난 스님이 아닌 중생인걸요. 내 자식처럼 가꾸던 화초와 나무를 어찌 버릴 수가 있나요.”

 

화분만 해도 용달차로 하나는 되어 보였다. 뭐 그렇게 값이 나가는 나무와 화초들도 아니다. 아내는 꽃을 가꾸기를 워낙 좋아해서 섬진강변을 돌아다니다가 묘목이나 화초만 보면 사다가 텃밭에 심었다. 블루베리 나무만 해도 10그루나 된다. 블루메리와 영산홍, 벤자민, 관음죽 등 화분 30여 개를 혜경이네 마당에 옮겨 놓았다. 흑매화, 산수유, 호랑가시나무, 수국 등 십여 그루의 나무는 미타암에 옮겨 심었다.

 

서울로 짐을 옮기는 날은 한 달 후에 새로 얻은 전셋집으로 옮겨야 한다. 이런! 결국 이사를 세 번 하는 꼴이 되어 버리다니… 찰라의 복이 그밖에 안 되는 모양이다. 하기야 역마살이 낀 부부이니 평생 이사를 해야 할 팔자인 모양이다.

 

 

한 10여 년 살 요량으로 가져날 린 짐이라 마당에 벌려 놓으니 산더미처럼 많다.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조금이라도 실천하고자 했는데, 이건 무소유가 아니라 유소유의 삶을 살아온 느낌이다. 장롱과 침대, 식탁, 경대 등은 혜경이네가 쓴다고 해서 혜경이네 집으로 옮겨주었다. 책상과 책장, 보조탁자 등은 시안이 아빠 친구가 필요하다고 해서 주어 버렸다. 카세트, 매트, 담요 등은 아랫집 아우가 필요하다고 해서 주어버렸다.

 

모두가 쓸 만한 가구들이라 버리기엔 아깝고, 다시 사려면 큰돈이 들어가는 짐이지만 가지고 다니기엔 큰 짐이 된다. 그래서 결국 필요한 사람들에게 주기로 했다. 이렇게 큰 집들이 빠져 나갔는데도 짐이 많다. 나는 책을, 아내는 화초를 버리지 못한다. 그러니 책 박스와 화분 개수가 비슷하다.

 

그러면서도 나는 아내가 가꾸어 놓은 텃밭에서 마치 헤르만 헤세가 정원을 가꾸며 누리던 즐거움을 누렸으며, 아내는 내가 늘어 놓은 책을 수시로 읽으면서 독서를 즐겼다. 나는 아내가 가꾸어 놓은 정원에서 마음으 정원을 가꾸었으며, 아내는 내가 늘어 놓은 책속에서 마음의 양식을 채워넣었다. 그러니 우리 부부는 서로의 부족한 점을 매꾸어 주는 채워주며 살아가는 천상의 배필인 모양이다.

 

 

▲만복대 등산을 함께한 수평리 사람들

 

 

“다음에는 정말 가방 하나만 들고 다녀야겠어요.”

“어디 그렇게 되는가 봅시다.”

 

남해 미국인 마을에 펜션을 가지고 있는 친구가 있다. 그 펜션에 어느날 두 부부가 가방 하나씩을 들고 오더란다. 그리고 겨울을 이곳에서 날 수가 없느냐고 물었다. 겨울엔 손님이 별로 없으니 그렇게 하라고 했단다. 두 부부가 어디서왔는지 하도 궁금해서 물었더니 미국 뉴욕에서 왔다고 하더란다. 고국이 그리워 해마다 찾아오는데, 가을은 설악산 근처에서 보내고 남해로 오니 바다 풍경과 섬이 너무 마음에 들어 겨울은 따뜻한 남해에서 보내고 싶다고 했다. 친구는 너무 멋진 부부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러니 날더러 복잡하게 시골에 집 짓지 말, 살림 옮겨다니지 말고 그렇게 살면 어떻겠느냐고 충고를 해주었다. 하긴... 우리가 원하는 생활이기도 하다. 아니 어쩌면 그렇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막연히 들었다.

 

그런데 아직 우리는 끌고 다니는 짐이 많다. 한 달 후에 짐은 시안이 아빠와 혜경이 엄마가 서울로 실어 보내주기로 했다. 그리고 그날 밤은 혜경이네 집에서 보냈다. 집을 다 치워 버리니 이부자라도 없고, 혜경이 엄마가 꼭 자기 집에서 하루 밤을 함께 보내자고 하기도 했지만 달리 다른 곳에서 잠을 자기도 마땅치가 않았다. 시안이 아빠는 이속찻집에서 하룻밤을 묵으라고 했고, 개구리 집에서는 자기 집으로 가자고 했지만 다음 날 아침 일찍 출발을 하려면 아무래도 수평리 마을 혜경이네 집이 가장 만만했다.

 

혜경이 엄마는 청국장에 맛있는 저녁 밥상을 차렸다. 고소한 청국장에 밥을 한 그릇 비우고 나니 졸음이 밀려 왔다. 우린 혜경이 엄마가 비워준 안방에서 피곤한 몸을 눕자마자 잠이 들었다. 며칠 동안 이삿짐을 싸고 옮기느라 너무 피곤했기 때문이다. 형제처럼 너무나 고마운 사람, 혜경이 엄마와의 인연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그녀가 있었기에 우리는 외롭지 않았고, 1년 반 동안 이곳에서 정말 보람 있게 보낼 수 있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일직 일어났다. 바람이 윙윙 불고 있었다. 밖으로 나오니 공기가 차갑다. 집으로 건너가서 서울로 당장 자져가야 할 짐을 챙겨 실었다. 자동차에 꽉 채워지는 짐을 바라보며 사람 사는 것이 이런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을회관 옥상에 올라가 지리산 쪽을 바라보니 오늘은 안개와 운해도 없고 전형적으로 맑은 늦가을의 하늘이다. 갑자기 기온이 뚝 떨어져 초겨울을 연상케 한다. 백운산과 계족산도 푸른 하늘 아래 고요히 서 있다. 마을회관 옥상은 나의 전망대 역할을 해주었다. 나는 아침이면 이곳에 한 번씩 올라가 천기를 살피고 풍경을 음미한다. 그리고 매일 달라지는 풍경을 바라보며 카메라의 앵글을 돌리면서 사진을 찍어 댔다. 감 몇 개가 쓸쓸히 달려 바람에 출렁거리고 있다. 나는 지금까지 나를 지켜준 지리산, 백운산, 계족산을 향하여 합장 경배를 하고, 집으로 내려와 1년 반 동안 나를 재워준 방바닥에 입을 맞추었다. 이 얼마나 고마운 자연과 집인가?

 

 

▲금방 눈물방울이 떨어질 것만 같은 혜경이 엄마

(만복대 등산길에 억새 능선에서)

 

 

핸드폰이 울렸다. 아침 준비가 다 되었으니 빨리 오라는 아내의 전화다. 나는 개울을 건너 혜경이네 집으로 갔다. 식탁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누룽지와 청국장이 놓여 있었다. 우리는 혜경이네 집에서 맛있는 아침을 들었다.

 

“혜경이 엄마 그동안 정말 너무 신세 많이 지고 고마웠어요.”

“뭘요 해드린 것도 없는데… 이렇게 갑자기 가셔버리니 너무 섭섭해요. 꼭 다시 내려 올 거지요?”

“그럼요. 그래서 짐을 남겨 놓은 거 아니겠소?”

 

아내와 혜경이 엄마는 금방 눈물이 나올 것만 같은 표정이었다. 나는 그런 아내를 빨리 가지고 재촉을 했다. 개울을 건너 집으로 오니 이른 아침인데도 마을 사람들이 몇 분 와 있었다. 큰어머님, 아랫집 면장님 부부, 선호 아줌마, 한 영감님, 조합장 부부님, 수평상회 아줌마… 모두가 섭섭한 표정이다. 떠날 때는 말없이 빨리 떠나야 한다. 우리는 재빠르게 인사를 하고 차에 올랐다.

 

아내는 애써 혜경이 엄마와 눈이 마주치는 것을 피하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면 곧 서로의 눈에서 눈물방울이 떨어질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엑셀을 밟으며 창문 밖으로 목례를 했다. 그들은 손을 흔들었다. 동네가 점점 멀어지며 사람들이 손을 흔드는 모습이 백미러에 잡혔다. 백미러에 마지막 사진이 찍혀지고 있었다.

 

(2011. 1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