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임진강일기

금가락지로 짐을 옮기며…

찰라777 2011. 12. 5. 18:28

 

 

금가락지로 짐을 옮기며…

 

 

오늘은 임진강 금가락지로 소파와 책상 그리고 화분을 옮기기로 했다. 임진강변에 있는 <금가락지金家樂地>는 청정남 님이 뜻밖에 마련해준 제3의 거소이다. 그는 지난 11월 23일 지리산에서 거의 쫓겨나다시피 서울로 이사를 오게 된 내 사연(http://blog.daum.net/challaok/13741098) 읽고 우리부부에게 자신의 별장에서 머물러도 좋다고 제의를 해왔다.

 

너무나 뜻밖이고, 감격스러운 그의 마음에 우리는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할 지 모르겠다. 전원생활이 꼭 필요한 우리에게는 더 이상 머뭇거릴 필요가 없었지만 그렇다고 무턱대고 덜컥 결정을 할 수도 없었다. 아내와 나는 일주일동안 깊이 생각을 하며 고민을 했다. 그리고 지난 28일 그를 만난 다음에 금가락지에서 생활을 하기로 결정을 하였다. 지리산에서 올라 온 후 우리는 어떤 일에 대한 결정을 좀 더 심사숙고하는 버릇에 생겼던 것이다.

 

짐을 옮기기 전인 어제까지만 해도 정말 이게 현실인가 하는 생각이 맴돌았다. 사실 섬진강변 수평리에 있는 집을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정들었던 마을사람들과 마을풍경, 그리고 손때가 묻은 집을 떠난다고 생각을 하니 가슴이 먹먹하기만 했었다. 일단 집을 비워주기로 마음은 먹기는 했지만, 한 10년을 살 것으로 생각을 했던 지리산을 등지고 갑자기 떠나야 하는 현실을 솔직히 받아드리기가 무척 어려웠다.

 

 

 

부처님은 "모든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애착에서 벗어나 있으라"고 했지만 중생살이가 어디 그리 쉽게 되는가? 11세경 인도에서 태어난 아띠샤(Atisha)는 "만약 어떤 물건에 심한 애착을 느낀다면 우리는 그것을 남에게 주어버리거나 팔아버리거나, 아니면 적어도 그것을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치워버려야 한다"고 했다. 어떤 방식이라도 집착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거처는 소박하고 시원해야 하며 복잡하고 사치스러워서는 안 된다. 티벳의 위대한 명상의 스승인 똑메‧장뽀(Tog-me Zang po-모든 붓다의 아들들의 일곱 가지 수행'을 지은이)는 20대 후반에 동굴로 들어가 새와 짐승들을 벗 삼아 60살까지 거기서 살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게는 명상을 하러 동굴로 간 것이 아주 이로웠다. 위를 쳐다보아도 누구도 높은 사람이나 친척이 없었고, 아래를 봐도 하인이 없다. 나는 아무런 세속의 유혹이나 힘겨운 일 없이 내 마음만을 데리고 홀로 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세속에 살면서 이미 수많은 업을 얼기설기 지어놓은 우리네 중생들은 그렇게 살아 갈 수는 없다. 이미 지어온 업은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지리산으로 거처를 옮긴 것은 아내의 건강을 빌미로 떠났지만, 세속과 멀리 떨어져 명상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갖고자 함도 있었다. 서울 같은 복잡한 세속에 살다보면 보고 듣는 것에 이것저것 분별하는 마음만 생겨나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리산에서 나는 홀로 명상을 하거나 산책을 하는 시간이 서울보다는 10배는 족히 넘었다. 아침에 일어나 108배 시작으로 수평리 마을을 하루에 두 번 산책을 하고, 텃밭을 가꾸는 일, 지리산과 백운산, 계족산을 바라보며 산책을 하는 일 등이 따지고 보면 모두가 명상에 해당하는 시간들이다.

 

불교의 염불선에는 행주좌와 어묵동정(行主坐臥 語默動靜)'이란 말이 있다. 행하거나 머무르거나 않거나 눕거나 말하거나 침묵하거나 조용히 있거나 일상의 모든 순간순간이 다 선禪 아닌 것이 없다는 말이다. 즉 생활 속에서 최선을 다 하는 것이 선이다는 뜻이다.

 

그러나 나 같은 우매한 중생은 도저히 그렇게 살기도 살수도 없다. 보고 듣는 것이 없어야 어느 정도 수행에 진전이 조금 있을 뿐이다. 그래도 지리산에서의 1년 반 동안의 생활은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 수행을 하는데 매우 값진 시간들이었다. 매일 108배를 하고, 명상을 하고, 산책을 하는 시간들이 서울 생활보다는 훨씬 많아 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리산을 떠나면서 나는 그 수행이 모두 헛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수행이 제대로 되었으면 손때 묻은 집도, 정든 마을과 마을 사람들을 떠나는 것도 툴툴 털어버릴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러지를 못하고 나는 오히려 거기에 매우 집착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띠샤는 집착을 버릴 것을 아주 강조한다. 왜냐하면 집착은 우리들 삶에서 행복을 빼앗아 갈 뿐만 아니라, 보다 나은 환생, 윤회로부터의 해탈, 또는 마음의 자유를 이룩할 기회마저 뭉개버리기 때문이다.

 

수평리 집에 대한 집착이 가시기도 전에 청정남 님으로부터 임진강 금가락지에 살 것을 제의 받게 된 나는 처음에는 어리벙벙했다. 또 다른 집착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겁도 나기도 했다. 그러나 그를 만나보니 한가지만은 확실했다. 그는 군더더기가 없었고, 어떤 거래도 없었다. 내가 금가락지에 얼마나 머물지 모르겠지만 수평리 집보다는 집착이 덜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보다 14살이나 아래인 그는 이제 나를 형님이라고 부르겠다고 했다. 그는 일찍 부모를 여위게 되어 고아처럼 떠돌이 다니며 자수성가를 해왔다고 한다. 그런 그가 정말 동생처럼 여겨졌다. 그는 형님이 없고, 나는 우리집안에서 막내로 태어났으니 친동생이 없다. 전생에 그와 나는 어떤 인연이 있었기에 우리가 이렇게 금생에 형님과 아우로 맺어지게 되었을까? 그는 거의 1000편이 넘는 내 블로그의 내용을 샅샅이 읽었다고 한다. 그래서 나보다 더 블로그에 올린 내용을 더 잘 알고 있을 정도였다.

 

안산에 계시는 형님이 자신의 봉고차로 짐을 옮겨 주시기로 했다. 그리고 친구 응규가 거들어 주기로 했다. 형님은 정각 9시에 안산에서 구의동에 있는 우리 집까지 봉고차를 몰고 오셨다. 응규도 30분 후에 도착을 했다. 5층에 있는 소파를 계단을 통해서 운반을 했다. 하도 오래된 아파트라 엘리베이터가 너무 좁아 계단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오늘 옮길 짐은 소파와 간이침대, 책상, 그리고 오래된 난과 관음죽 등 화분 몇 개이다. 자유로를 따라 전곡 근처에 있는 금가락지가 있는 동이리 마을회관까지는 118km나 되었다.

 

 

 

우리는 자유로를 따라 가다가 임진각을 지나 37번 국도를 따라 갔다. 37번 국도가 끝날 즈음 '청정로'란 도로이름이 보였다. 청정남 님의 이름과 유사한 도로 명이었다. 우리는 어유지리 란 특유한 이름을 가진 삼거리에서 368번 도로로 좌회전을 했다. 생각보다 먼 거리였다. 12시가 다 되어 우리는 어유지리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동이리에 가 보아야 먹을 만한 식당도 없기 때문이다. 어유지리에서 된장찌개로 점심을 먹었다.

 

거실에 소파를 배치하고 란과 화분을 요소요소 빈자리에 놓아두니 갑자기 집이 생기가 도는 것 같고 사람이 사는 집처럼 느껴졌다. 생명이 있는 화초를 집안에 들여 놓는 일은 다소 키우기에 번거롭기는 하지만 매우 생동감이 넘친다.

 

사실 거의 모든 생활 도구가 갖추어진 금가락지는 더 이상 들여올 것도 없다. 다만 아내가 앉았다 일어났다 하는 것이 불편하므로 거실에 소파는 있어야 할 것 같고, 또 내가 쓸 책상은 있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이곳에 가급적 짐을 적게 들여올 생각이다. 물건을 많이 들여 놓으면 또 집착이 생기기 때문이다. 우리는 섬진강 수평리로 이사를 갈 때에도 아주 간소한 살림만 차리기로 했는데 한 10년 살 요량으로 이것저것 하나둘 옮기다 보니 의외로 짐이 많아져 버렸다. 그 교훈을 살려 꼭 필요한 것만 옮기기로 했다. "무소유란 꼭 필요한 것들만 소유하는 것"이라고 법정스님께서 누누히 강조하시지않았던가! 오늘 들여온 것은 내가 떠나더라도 그대로 두고 가도 되는 물건들이다.

 

 

 

짐을 옮겨 놓으니 비로써 이곳 임진강변에서 살게 되겠구나 하는 현실감이 생겼다. 2012년부터 이곳 금가락지에서 본격적인 생활이 시작될 것 같다. 12월 달에는 아이들이 살라갈 집을 봉천동으로 이사를 하고 주변을 좀 더 간결하게 정리해야 할 석 같다.

 

지리산 생활을 청산하며 나는 무엇이든 우리가 하는 행동을 지혜의 저울로 달아 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기로 다짐했다. 만약 어떤 행위가 나와 남들에게 그저 혼란과 불만만을 낳게 할 것 같으면 사전에 차단을 해야 한다. 내 자신이 지혜가 부족하면 아내와 의논을 하고, 그래도 모자라면 우리보다 더 높은 지혜를 가진 지인들에게 충고를 받기로 했다.

 

충동적으로 성급하게 행동하면 그 행위의 결과가 엉뚱한 방향으로 나올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해보는 것을 잊게 된다. 인간은 슬기롭게 지혜를 활용하기만 하면 영원한 행복과 평화를 이룰 수 있는 근본적인 지혜를 갖고 태어났다고 한다. 그저 이 삶에서 쾌락만을 위해 행동하고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지 않고 행동하는 것은 짐승들보다 더 나을 것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을 맹세하거나 어떤 행위를 할 때에 반드시 진지하게 생각을 해 보아야 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아내는 청정남님의 제의를 받고 며칠 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최종 결정을 하게 전에 진지하게 고민하는 아내의 모습에서 나 역시 성급하게 결정을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청정남 아우를 만난 순간부터 나는 그에 대한 어떤 믿음 같은 것이 일어났다. 그도 섣불리 결정을 하지 않았으리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1000편이 넘는 내 블로그의 내용들을 오랫동안 읽으며 우리 부부에 대하여 이미 너무 많이 알 고 있었고 그의 언동은 생각보다 신중했다. 아우와 나 사이에는 어떤 믿음의 끈이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았다.

 

 

금가락지에는 옹기 항아리가 100여개나 있었다. 그는 옹기라든지 다듬잇돌 등 사라져 가는 오래된 우리의 전통 문화를 좋아 하는 것 같았다. 오래된 고물 항아리를 전라도 강진까지 가서 사왔다고 했다. 그런데 옹기 뚜껑이 없어 겨울에는 눈이 내리면 얼어서 옹기가 깨진다고 하며 옹기 뚜껑을 좀 구해서 덮어주라고 했다. 그는 뚜껑 값을 사기도 전에 나에게 선금으로 주었다.

 

옹기 뚜껑을 사려면 옹기 반지름 사이즈를 일일이 재야했다. 형님과 친구 응규 셋이서 엎어진 옹기를 일일이 뒤집어 입구 사이즈를 쟀다. 마당과 집을 빙 둘러싼 옹기를 뒤집어 재는 시간이 꽤나 걸렸다. 옹기 사이즈는 반지름이 10cm에서 크게는 65cm 까지 매우 다양했다. 너무 오래되어서인지 옹기는 조금만 힘을 주어도 곧 깨질 것만 같았다.

 

옹기가 얼어서 깨지는 것이 아니라 오래되어 깨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나중에 확인해보니 옹기를 엎어 놓으면 절대로 얼어서 깨지는 법은 없다고 했다). 날씨가 점점 추워지고 있었다. 눈이라도 오면 옹기가 얼어서 깨지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가 생겼다.

 

옹기를 다시 일일이 엎어 놓고 커피를 한 잔 한 후 우리는 금가락지를 떠났다. 하루 종일 품을 들여 수고를 해주신 형님과 친구가 고마웠다. 안산에서 차를 몰고 오신 형님의 차에는 기름이 거의 바닥이 다 나 있었다. 안산에서 구의동으로, 구의동에서 다시 임진강 최전방까지 왔으니 기름 바닥이 날만도 하다.

 

나는 주유소에 차를 세우게 하고 기름을 가득 넣으라고 했다. 굳이 기름 값을 형님이 지불하시겠다는 것을 나는 겨우 우겨서 지불을 했다. 아무리 친형님이라고는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형님에 대한 최소한 예의를 갖추는 것이기 때문이다.

 

집에 들어오니 오후 5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날씨는 더 추워지고 있었다. 나는 다시 옹기 생각이 나서 인터넷에서 옹기 뚜껑을 파는 곳을 뒤져 보았다. 여러 곳에 전화를 해본 결과 사이즈가 큰 것은 주문 생산을 해야 하고 값도 10만원에서 20만 원 정도로 생각보다 비쌌다.  

 

황충길 명인이 생산하는 예산전통옹기판매점에 전화를 했더니 옹기는 엎어놓으면 눈이 와도 절대로 깨지지 않는다고 했다. 오래된 옹기가 삭아서 깨진다는 것이다. 역시 생각한 대로 였다. 또 오래 전에 생산한 옹기는 품질이 단단하지가 못해서 쉬이 깨진다고 했다. 그러니 매일 사용하는 옹기가 아니면 굳이 비싼 뚜껑을 살 필요가 없다는 것.

 

물건을 팔 욕심이 있다면 오히려 어떻게든 사게끔 말을 했을 텐데 옹기의 명인답게 솔직하게 말을 해준 그가 고마웠다. 나는 아우에게 전화를 하여 그 사실을 알리고 옹기를 사지말자고 했다. 아우도 내 말을 듣고 나서 어차피 중고 옹기를 전시용으로 사용하는 것이니 살 필요성이 없다고 했다.  

 

옹기 뚜껑을 사는 아주 사소한 일이지만 이 일도 뚜껑을 사기 전에 지혜의 저울로 달아 보아야 한다. 뚜껑을 덮어 놓은 것보다도 엎어 놓는 것이 더 운치가 있어 보이기도 했다.

 

오늘 하루가 매우 길게 생각이 된다. 나는 긴 하루를 마감하며 다시 동굴에서 수행을 한 티벳의 명상가 똑메 장뽀를 상기시켰다. 아무런 가구도 없는 동굴에서 홀로 명상을 한 옛 스승들은 참으로 경이롭고 위대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지금의 나는 얼마나 가진 것이 많고 사치스러운가? 좀 더 가진 물건을 줄이고 간결하게 살아가도록 해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