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임진강일기

낯선 곳에서 아침을①-하늘을 받드는 봉천동에서

찰라777 2011. 12. 19. 09:52

낯선 곳에서 아침을...

 

 

버려도 버려도 여전히

삶의 무게만큼 남아있는 이삿짐

▲봉천동 1000번지에서 바라본 풍경

 

 

12월 15일. 나는 한강이 바라보이는 구의동에서 봉천동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잠실과 구의동 근처의 한강은 내가 30년 동안이다 머물렀던 익숙한 장소들입니다. 나는 그 익숙한 장소들을 떠나 봉천동이라는 낯선곳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봉천동으로 이사를 한 것은 첫째 이유는 영이와 경이의 직장이 매우 가깝고, 둘째 이유는 서울의 다른 곳에 비해 이곳 전세 값이 싸기 때문입니다.

 

작은 아파트로 이사를 하다 보니 많은 것들을 버려야 했습니다. 1년에 한 번도 쓰지 않는 것들은 모두 버리기로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짐은 많습니다. 꼭 필요한 것들만 옮기려고 했지만 이삿짐은 우리가 살아온 무게만큼이나 무겁게 남아 있습니다.

 

 

▲여명이 밝아오는 봉천동. 관악산, 청계산 우면산이 한눈에 바라보인다

 

 

 

언젠가도 한 번 말씀 드렸지만 나는 책에 애착을 가지고 있고, 아내는 화초에 집착을 합니다. 이번에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책의 절반을 버렸습니다. 그래도 내 작은 방에는 이삿짐 중에서 책이 가장 많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아내도 화초를 상당이 많이 정리했지만 아파트 베란다에는 화분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버리지 못하는 책과 화초

 

 

강을 건넜으면 뗏목도 버려야 하거늘 나는 강을 건너고 나서도 여전히 무거운 뗏목을 어깨에 걸머지고 걷는 우매한 중생인가 봅니다. 인생은 흐르는 강물처럼 덧없이 흘러가고 있는데, 나는 무언가에 집착하는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음날 아침 나는 봉천동 1000번지에서 첫 아침을 맞이했습니다. 봉천동 천 번지는 봉천동 중에서도 가장 높은 곳입니다. 그 가장 높은 곳에서도 우리 집은 12층에 있으니 봉천동에서는 하늘과 가장 가까운 위치입니다.

 

하늘과 가장 가까운 봉천동 천 번지의 첫 아침

  

▲유난히 교회의 십자가 많이 보이는 봉천동

 

 

거실에서 바라보니 관악산과 청계산, 그리고 우면산이 한 눈이 싹 들어옵니다. 전망 하나는 끝내주는 곳입니다. 산 밑에는 재개발을 한 아파트들이 성처럼 산을 에워싸고 있습니다. 아파트 밑에는 아직 채 재개발을 하지 못한 집들이 성냥갑처럼 닥지닥지 붙어 있습니다.

 

봉천(奉天)! 하늘을 떠받들고 있는 동네. 나는 봉천동이란 이름이 어쩐지 좋습니다. 봉천동은 관악산이 험하고 높아 마치 하늘을 받들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유난히 교회의 십자가가 많이 보입니다. 반짝거리는 불빛이 은하계의 별처럼 신비롭게 다가옵니다.

 

저 불빛은 마치 내가 여행을 하던 중 볼리비아 라파스에서 보았던 불빛과 비슷합니다. 불빛은 날이 밝아지면서 점점 사라져 갑니다. 어둠 속에 있을 때에는 모두가 아름다운 별처럼 보이든 것들이 날이 밝아지며 온갖 지저분한 것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마음으로 보아야 할 세상을 나는 여전히 눈으로 보고 있습니다.

 

 

▲어둠 속에서 은하계의 별처럼 보이는 불빛

 

 

주민등록을 이전하며 동사무소 직원에게 물어 보니 이곳은 원래 <봉천동 1번지>라고 합니다. 이곳은 원래 산이었는데 1965년 큰 수해로 집을 잃은 서부이촌동, 동부이촌동, 목동지역 난민들은 위하여 서울시에서 임시 가건물을 지어 이주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소위 달동네 쪽방 촌이 모여 사는 곳이었지요.

 

그런데 지금은 동 이름도 <청림동>으로 바뀌고 재개발로 아파트가 엄청나게 들어서 있습니다. 봉천 1동부터 9동까지 동 이름도 주민들의 요청으로 은천동, 신사동, 삼성동, 청룡동, 보라매동, 낙성대동, 청림동, 난곡동 등으로 바뀌어져 있습니다. <달동네>라는 이미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개발이 덜 된 집들이 성냥갑처럼 엎어져 있다.

 

 

그러나 아무리 이름이 바뀌어도 봉천동의 하늘과 땅은 원래 봉천동 그대로입니다. 사람들은 참으로 이상합니다. 봉천이라는 이름이 얼마나 좋은데 단순히 달동네라는 이미지를 벗어나기 이하여 이름을 바꾸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것은 마치 자기의 성을 바꾸는 것과 같은 이치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름이 바뀐다고 해서 땅값이 올라가거나 신분이 급상승하는 것은 아닌데 말입니다.

 

그러나 다른 나라들은 오히려 옛 지명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러시아의 옛 수도 레닌그라드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인도의 봄베이는 뭄바이로, 미얀마의 랑구운은 양곤으로… 침략자의 정복이나 어떤 사유로 지명이 바뀐 곳을 다시 옛 지명으로 되 바꾸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봉천동에 떠 오르는 태양

 

"아담해서 좋아요."

 

영이는 이사를 하고 나서 이곳 봉천동 아파트가 아담해서 좋다고 했습니다. 생각해 보니 그런 것 같습니다. 더 밀착되고 가가이서 식구들의 얼굴을 볼 수 있으니 아담한 공간이 좋게만 보입니다.  나는 하늘을 받들고 있는 봉천동이라는 이름이 좋습니다. 그리고 봉천동 중에서도 가장 높은 동네인 봉천동 천 번지에서 기가 막힌 전망을 바라보며 식구들과 아침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봉천동 천 번지에서 맞이하는 첫 아침은 상쾌하기 그지없습니다. 아침 태양이 우면산에서 떠오릅니다. 나는 찬란히 떠오른 태양을 향하여 절을 합니다. 그것은 다시 태어나는 영혼이며 우주입니다. 절을 하며 봉천의 땅에 입맞춤을 합니다. 그것은 어머니의 대지이며 생명입니다. 아아, 나는 하늘을 받들고 있는 <봉천>이라는 이름이 좋습니다.

 

(2011.1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