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임진강일기

영하 20도의 추위를 녹여주는 내 영혼이 따뜻했던 시간들

찰라777 2012. 2. 9. 08:45

희망을 이야기 하다

쌀과 라면... 위문품을 들고

최전방 오지를 찾아오신 무하 이근후 박사님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강추위에 러시아 털모자를 쓰고 완전무장을 한 노장군처럼

금가락지를 시찰(?)오신 무하 이근후 박사님(가운데)과 동서커플(우측), 세 보살 

 

 

▲연천쌀과 라면을 위문품(?)으로 들고 오셨다.

우리집에 쌀이 떨어진줄 어찌 아셨을까? 이식량으로 우리부부는 한달은 지낼 수 있겠다.

 

 

▲귀빈각의 좁은 골방에서. 이런 분위기는 좀처럼 느껴볼 수 없다고... 

 

 ▲얼큰한 홍합짬뽕을 드시기에 여념이 없으신 무하 박사님

"호오호오 ~~ 너무 매운데 맛은 좋아!!!"

 

 

▲우와~ 짬뽕에 홍합을 이렇게 많이 넣는 곳은 처음봐요. 이걸 언제 다 먹지요? 

 

 

▲홍합짜장면도 맛이 고소하네!!!

 

▲"이렇게 맛있는 집은 인증샷을 해야 다음에 잊지 않고 또 오지"

박사님은 점심값으로 거금을 쏘았다

 

 

▲귀빈각에서 점심을 먹고 오래된 <화이트 다방>으로 옮겨 옛날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화이트다방에서

 

 ▲박사님은 젊은 시절 추억을 상기하며 <모닝커피>라는 것을 주문했다.

 

 ▲<모닝커피>를 마시며 젊은 날의 추억담을 들려주시는 박사님 

 

 

 ▲오래된 화이트 다방 내부 60년대 풍경 그대로다

 

 

러시아 털모자에 털 점퍼를 입고

노장군처럼 나타나신 무하 박사님

 

2월 8일, 최저기온 영하 18도. 오늘도 무척 춥다. 이렇게 추운 날에도 기러기들은 어김없이 날아왔다. 오늘 따라 바람까지 심하게 불어 체감온도는 훨씬 낮을 것 같다. 55년만에 찾아온 강추위의 날씨에 최전방 오지에 살고 있는 나는 이른 아침 "끼룩끼룩" 날아드는 기러기를 울음소리에 눈을 뜬다.

 

 

그런데 이 추운 날씨에 오늘은 특별한 손님이 찾아왔다. 78세의 노(老) 학자이신 무하 이근후 박사님이 위문품(?)까지 들고 이곳 최전방 오지를 방문한 것이다. 훤출한 키에 러시아털모자를 쓴 박사님은 마치 최전방 GP를 순시하는 노장군처럼 보인다. 하기야 이곳은 비무장지대(DMZ) GP가 지척인 거리에 있다.

 

항상 희망을 이야기 하시는 이근후 박사 님과는 9•11사태가 발발했던 해인 2001년 네팔에 의료봉사를 함께 다녀 온 인연이 있은 후 지금까지 인연의 끈을 계속 이어오고 있다. 박사님은 지난 50년 동안 정신과 의사로서 치료와 봉사활동을 수행으로 생각하며 산처럼 묵묵히 환자들을 돌보아 왔다. 그는 누구나 한번쯤 누려 보았을 사회적인 지위와 보직을 고사하고 정직하고 묵묵히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 곁에서 희망을 이야기하며 함께 지내온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사회적인 활동도 남들이 잘 맡아서 하기를 꺼려하는 직함을 가져왔다. 불교상담개발원장(자비의 전화), 광명보육원 이사, 무하사랑방 관장, 사이버종합병원 건강샘 운영자, 청소녀성상담운영자, 가족아카데미아 대표, 네팔 이화봉사단당 및 네팔캠프단장, 한국석불문화연구회 회장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일을 해오고 있다. 박사님은 "자신은 물 한 컵에 불과 한데, 그 물이 여러가지로 소용되는 이치와 같다"며 같은 일인데  단지 역할 이름이 다르게 붙여진 것뿐이라고 대수롭지않게 말한다.

 

박사님은 정신의학관련 주요 저서 30여권, '신은 우리들의 입맞춤에도 있다' '아, 불타여 불타여' '돌부처' '네팔우표 ICON' '히말라야의 영혼' 등  네팔문화시리즈 6권, 수필집, 사진전 등 다양한 방면에서 저술활동을 해왔다. 그런 한편 2011년도에는 고려사이버대학 문화콘텐츠학과 최고령으로 졸업을 하는 등 끈임없이 공부를 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박사님은 내가 아내의 난치병 치료에 애쓰는 모습을 보고 항상 희망을 불어 넣어 주셨다. 2003년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졸저 "사랑할 때 떠나라" 출판기념회까지 손수 프랑카드와 초청장을 제작하여 명륜동 'The Cafe 96'에서 열어주었다. 나처럼 하찮은 사람에게도 희망을 불어 넣어 주는 일을 마다 하지 않은 것이다.

 

그렇게 남을 위해 봉사 하는 일이라면 마다 하지 않으시는 박사님이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최전방까지 노구의 몸을 이끌고 찾아오신 것은 예삿일이 아니다. 박사님은 내가 섬진강에서 살고 있을 때에 꼭 한 번 방문을 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창원을 다녀오시다가 네비가 말을 듣지않아 길을 잘못드는 바람에 기회를 놓치고 말아 매우 섭섭했다(불가피한 사정으로 예상보다 너무 빨리 이사를 하는 바람에)했다. 이번에는 그런 기회를 다시는 놓치는 실수를 범하지 않기 위해 빠른 시일 내(이곳도 세을 살고 있는 집이라 또 다시 언제 이사를 갈지 모르므로)에 방문을 하시겠다며 <네팔캠프>카페에 쓴 내 글에 댓글을 달았다. 10대 젊은이처럼 인터넷에 댓글을 달고 유머를 잃지 않으시는 박사님은 항상 활력이 넘친다.

 

"ㅋㅋㅋㅋ 해물짬뽕 먹고 다방에서 차 한잔하면 임진년 행운이 절로 올 것 같은 느낌. 보살님도 오신다니 더욱 반갑습니다. 출동 준비 중! 네비게이션 믿고 갑니다. 주소 올려 주세요."

 

그런데 하필이면 이렇게 추운 날 오시게 되니 걱정이 된다. 날씨가 추우니 추위 대비 완전무장을 하고 오시라고 했더니 "완전무장하고 ㅋㅋㅋㅋㅋ 갑니다(추위 대비). 군량미가 필요하나요?"란 댓글을 남기셨다. 마침 어제 서울에서 두 보살님 와 있었는데, 이분들은 박사님도 잘 아시는 분들이어서 나는 농담 삼아 다음 내용의 댓글을 남겼다.

 

"ㅎㅎㅎ 태풍전망대 PX 보급품이 떨어져 군량이 조달이 어려움,,, 여군 3명, 남군 1명 아사직전에 있음.. 오바~~ 특히 여군들이 보급품이 기대됨 -_-"

 

그런데 박사님은 정말로 10kg 들이 연천 쌀 한 포대와 농심라면 한 상자를 들고 오셨다. 네비도 잘 잡히지 않는 우리 집까지 오려면 상당히 고생을 해야 한다. 박사님은 댓글에 단대로 검정 방한 아웃 도어에 러시아 털모자까지 쓰고 완전무장을 하고 차에서 내렸다. '아차, 이거 내가 농담을 너무 진하게 했남.'

 

"네비도 잘 잡히지 않는 먼 길 찾아오시느라고 고생 많이 하셨지요?"

"네비는 안 잡혀 찾느라 좀 헤맸지만, 전방이 서울에서 이렇게 가깝다니 새삼 다시 한 번 놀랬소이다."

 

 

위문품으로 연천쌀 한 포대와 라면 한 상자를 들고... 

 

 

사실 전방 오지하면 마음으로는 멀게 느껴지지만 서울에서 지척인 거리에 있다. 함께 오신 분은 박사님의 동서 부부 라고 소개를 하였다. 원래 박사님은 '노 자동차, 노 시계, 노 핸드폰'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필수품을 갖지않는 <3무> 정신을 오랫동안 실천하고 계신다. 그래서 누구의 차를 타고 이곳 오지를 찾아오실지 매우 궁금했었는데, 뜻밖에 생각지도 못했던 동서의 차를 타고 오셨다.

 

"선생님 우리 집에 쌀이 떨어진 줄 어떻게 아셨어요?"

"추운데 얼마나 고생이 많소. 군량미가 떨어질만도 하지 않았나? 그래서 위문품으로 연천 쌀을 사왔지. 허허허"

 

아내는 쌀과 라면을 받고 입이 찢어졌다. 그렇지 않아도 사실은 우리 집에 쌀도 거의 다 떨어져 가고 있었다. 우리는 아내가 병원에 갈 때에 서울에 가서 먹 거리를 장을 봐 온다. 이곳 DMZ 부근은 물건을 사려면 전곡읍으로 나가야 하는데, 가격도 서울보다는 상당히 비싸다. 그래서 한 달에 한 번씩 서울을 갈 때에 식량과 필요한 물건을 사온다.

 

"그런데 집이 너무 좋군. 완전히 별장이네."

"네, 남의 집이지만 인연이 닿아 각하의 소원을 풀게 되었지요. 각하가 2층 집을 그렇게도 원했는데 여긴 2층 다락방도 있어요."

"꿈을 계속 꾸다보면 언젠가는 이루어지게 되어 있어요. 누구의 집이든 사용을 하는 사람이 사용하는 동안은 임자지. 그런 별장을 많이 가질 수록 좋아요. 나도 한 때는 돈도 없으면서 별장을 지으려고 애를 써 보았는데 여기저기서 자기네 별장을 사용해 달라고 하여 포기하고 말았어요. 대신 별장이 전국에 생기게 되었어. 빈 집에 온기를 불어 넣어주니 별장 주인들이 좋아하며 자꾸만 살아달라고 하는 거야. 허허허."

 

 

집에 들어와 차 한 잔을 하며 잠시 한담을 나누는데 벌써 시간이 1시가 넘었다. 박사님은 정말로 귀빈각에서 홍합짬뽕을 먹고 시골 오래된 다방인 <화이트 다방>에서 차 한 잔을 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귀빈각에 전화를 해서 짬뽕 세 그릇에 쟁반짜장 하나를 시켰다. 그러자 짬뽕 값이 한 그릇에 얼마냐고 물었다.

 

"짬뽕 한 그릇에 6천원이고요, 쟁반 짜장은 1만 5천원인데요?"

"그럼 됐다. 내가 현금 5만원을 타왔는데 오늘 점심은 내가 쏘지."

"호호호. 정말요? 아이고 좋아라. 오늘 점심 무진장 맛있겠네요."

 

이 박사 님이 점심까지 산다고 하자 월명수, 선법성, 대자심 세 보살이 맞장구를 치며 좋아했다. 우리는 귀빈각으로 차를 몰았다. 바람이 윙윙 불어와 대낮인데도 무척 추웠다. 귀빈각에 도착하니 홀에 자리가 없어 매우 비좁은 골방으로 들어갔다.

 

 

귀빈각 좁은 골방에서 홍합짬봉을...

 

 

일곱 사람이 앉기에는 상도 방도 너무나 좁다. 홀에 곧 자리가 날 것이니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주인이 말했지만 "좁은 방이 더 좋지 않나?" 하시면서 박사님이 방으로 들어가자 우리 모두 방으로 들어가 다닥다닥 붙어 앉았다. 미리서 주문을 해 놓았기 때문에 홍합짬뽕이 곧 나왔다. 이어서 쟁반 짜장도 배달되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짬뽕과 짜장이 좁은 밥상에 오르자 홍합을 까먹느라 모두가 조용해졌다. 왼손엔 비닐장갑을 끼고 홍합을 집어서 젓가락으로 빼먹는 맛이 그만이다. 추운 날 좁은 방에서 오손 도손 홍합을 까먹는 맛이 더 기가 막히다.

 

"와아, 이렇게 홍합이 많이 나오는 건 처음 보내!"

"맛도 싱싱하고 추운 날 먹기에는 딱 이내요."

"호오호오~ 매워, 그런데 맛은 그만이내요."

 

모두가 매운 홍합을 호오호오 불어가며 맛있게 먹었다. 추운 날씨인데도 홍합짬뽕을 먹자 이마에 담이 맺혔다.

 

"야아, 너무 맛있게 먹었는데. 우리 여기서 인증 샷을 한번 해야지."

 

귀빈각 앞에서 우리는 인증 샷을 한 후 우리는 건너편에 있는 화이트 다방으로 갔다. 녹슨 간판 꾀죄죄한 창문, 그 창문으로 튀어 나온 난로 통… 화이트 다방은 60년대 시골 다방 그대로의 모습이다.

 

 

<화이트 다방>에서 추억의 <모닝커피>를 마시며

 

 

 

연탄난로와 노란 주전자, 속이 훤히 드러나 보이는 어지러운 주방, 다 헤진 바닥 타이루, 큼지막한 농협 달력, 그리고 떼가 디룩디룩 낀 벽에는 '도심여옥(道心如玉-도를 닦는 마음은 옥과 같다)'와 요산요수(樂山樂水)란 오래된 액자가 걸려있다. 그리고 가운데 테이블에는 할아버지 몇 분이 모여 커피를 마시며 환담을 나누고 있었다. 나이가 꽤 듬직한 마담이 차를 주문 받으로 왔다.

 

"나는 모닝커피가 먹고 싶은 데 되나요?"

"네 됩니다."

"하하하, 박사님 웬 모닝커피를 주문하시나요?"

"옛날 추억이 떠올라서 모닝커피가 먹고 싶네."

"호호호, 박사님 모닝커피에 뭐, 로맨스 같은 섬씽이 있었던 모양이지요?"

"그게 아니고 내가 총각 때 아내 될 사람과 장인 모르게 사귀고 있었는데 어느 날 다방에 갔더니 그분이 모닝커피를 시켜먹고 있더라고. 나도 먹고 싶었지만 너무 비싸서 시켜 먹지 못했는데, 장인 될 분은 언제나 모닝커피만 시켜 먹었거든."

"호호호, 그럼 장인 어른 모닝커피 값도 지불 하셨겠네요?'

"몰래 지불을 해 드리고 싶었지만 돈이 있어야지. 그리고 나는 장인 어른 얼굴을 알지만, 장인 어르신은 나를 몰아 보았거든."

"하하하, 재미있는데요. 그래서 모닝커피를 시키셨군요."

"여기 옛날 분위기 나는 다방에 오니 그 때 못 먹은 문득 모닝커피가 먹고 싶어졌어. 허허허."

 

마담이 하얀 잔에 커피를 내왔다. 커피 잔 만큼은 다방 분위기에 맞지 않게 하얗고 깨끗했다. 물론 박사님은 생 계란을 넣은 모닝커피다. 커피를 마시며 박사님은 옛날 연애하던 이야기, 장모님에게 사위 감으로 점수 미달이었는데, 결혼에 골인을 한 이야기를 들려 주셨다.

 

장모님이 사위감으로 부정적인 측면을 5가지나 들었는데 이를 모두 설득하여 긍정적인 마인드로 돌려놓으셨다고 한다. 박사님은 항상 세상을 긍정적인 자세로 바라보며 희망을 이야기 하신다.

 

"부정적인 이야기는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며 항상 부정적인 요소로 걸림돌이 되거든. 특히 결혼을 압둔 자녀들에게는 서로가 잘 맞지않는 면이 있더라도 어차피 해야할 결혼이니 긍정적으로 이야기를 해주어야 해요. 자식 이기는 부모가 없질 않소."

 

그러면서 학창시절 포장마차에서 꼬챙이를 먹던 이야기를 했다. 돈이 없던 의과대학 시절 배가 고프면 학교앞 포장마차에서 오뎅꼬챙이를 먹었는데 먹은 후 꼬챙이 다석개는 몰래 탁자 아래로 떨어뜨리고 다섯개만 탁상 위에 놓아 두면 포장 마차 주인은 다섯개값만 받았다고했다. 그게 재미있어 늘 그 수법을 썼는데 그 때마다 주인은 다석개값만 받덜는 것. 

 

그런데 대학을 졸업하고 추억의 포장마차집을 들려 학차시절 추억을 상기하며 다섯개는 탁상 밑으로 숨기고, 다섯개는 탁상위에 놓아두었는데 이번에는 10개 값을 다 밭더라는 것. 포장마차 주인은 알면서도 돈이 없는 학생들에게 다섯개 값만 받았다는 것을 그때야 알게 되었다고 했다. 알면서도 눈을 감아준 포장마차 주인의 휴매니티에 감동이 되어버려 의사가 된 뒤에는 곱절로 포장마차를 이용하며 학창시절 속여서 먹은 꼬챙이 값을 곱배기로 토해내야 했다고 했다.

 

"그러니 자식들에게도 적당히 속아주는 것이 졸아요. 나는 용돈이 궁하면 이발을 하곤 했는데 다른 돈은 잘 주지않으시던 어머님이 이발값은 잘 주셨거든. 그래서 툭하면 이발을 하겠다고 손을 벌렸는데 그 때마다 어머님은 이발값을주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어머님은 용돈이 궁하면 이발을 한다는 내 속 사정을 뻔히 다 아시면서도 속아주신거 거든. 물론 단정하게 이발을 한 내 모습이 좋아 보이기도 하셨겠지만. 허허허."

 

"호호호, 박사님도 어머님을 속이는 선수였군요."

 

우리는 박사님의 구수한 옛날이야기에 박장대소를 하며 시간가는 줄 몰랐다.

 

"이런 다방에 앉아 있으니 옛날이야기를 하기가 딱 인 분위기네."

"화이트 다리도 그대로 있었으면 더 좋은 뻔 했지요?"

"그러게 말이요. 역사의 현장을 없애는 것은 심사숙고를 해야 할 일인데…"

 

화이트 다방은 지금은 사라져 버리고 없는 화이트교(현재 임진교)의 이름을 딴 매우 오래된 다방이다. 한국전쟁 당시 국군과 유엔군이 북진을 할 때 임진강에 다리가 없어 공병대대대 화이트 소령이 나무다리를 급조해서 만들었는데, 지난 2003년 화이트교는 전설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53년간 지속된 화이트교는 지금도 왕징면에 화이트 다방, 화이트 펜션, 화이트 부동산 등 그 이름을 사용하고 있는 곳이 많다. 화이트교를 그대로 추억의 역사 현장으로 살려 놓을 수는 없었을까?

 

박사님과 일행은 옛날이야기로 꽃을 피우다가 앞으로 종종 들리겠다고 하시며 오후 4시쯤 서울로 가셨다. 이 추운 날 팔십이 가까워 진 노구에 위문품(?)까지 들고 오신 박사님이 눈물겹도록 고맙다. 밖은 여전히 찬바람이 윙윙 불며 매서운 한파가 몰아치고 있었다. 사라져 가는 박사님을 향해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시기를 간절히 기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