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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양산 봉암사②-군대보다 더 엄한 스님들의 선방생활

찰라777 2012. 2. 11. 12:51

 

갑옷을 입은 무사가 말을 타고 나오는 듯한 기이한 산세

-고운 최치원이 지증대사 비문에 쓴 글

 

 

봉암사 일주문에 도착하니 오전 10시다. 봉암사 일주문은 18세기 초경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봉암사 내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 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일주문 정면에는 희양산 봉암사(曦陽山 鳳巖寺)’, 뒷면에는 ‘봉황문(鳳凰門)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병풍처럼 겹겹이 둘러 싸인 기이한 산세

 

 

경상북도 문화재위원회는 뒤늦게 지난 2월 6일, 봉암사 일주문을 도 문화재로 지정했다. 봉암사 일주문은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고, 일주문 특유의 건축 특징이 잘 나타나 있으며, 받침시설이 예스럽고 아담하다.

 

 

▲100년전 일주문 모습(왼쪽)과 현재의 일주문 모습(자료 : 영남일보 2월 9일 자 신문)

 

일주문을 지나 송림이 우거진 계곡을 따라 올라가니 넓은 마당이 나오고 선설당(禪說堂)과 해회당(海會當)이란 현판이 붙은 두 요사가 'ㄷ'자형으로 입을 벌리고 있다. 이 전각들은 최근에 지은 듯 예스런 절집 분위기는 풍기지 않는다.

 

 

▲'ㄷ'자 모형의 선설당과 해회당 요사

 

 

밖에서 보면 깎아지를 듯한 협곡이 안으로 들어오니 이렇게 넓은 평지가 있을 줄이야! 과연 '심충(沈忠'이라는 사람이 지증대사에게 절을 세워달라고 간청을 할만도 한 명당 터다. 심충은 당시 덕망 높은 스님으로 존경을 받고 있는 지증을 찾아가 "제가 농사짓고 남은 땅이 희양산 한복판 봉암용곡(鳳巖龍谷)에 있는데 주위경관이 기이하여 사람의 눈을 끄니 선찰(禪刹)을 세워주시기 바랍니다."라고 간청하였다.

 

 

갑옷을 입은 무사가 말을 타고 앞으로 나오는 기이한 희양산의 산세

 

 

희양산은 북한산 백운데 안수봉과 진안 마이산을 합쳐놓은 것처럼(유홍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불쑥 솟은 암봉이 기이하기 짝이 없다. 햇빛 '희(曦)', 볕 '양(陽)'을 붙인 희양산은 글자 그대로 수행자들의 용맹정진에 뜨거운 기운을 불어 넣어주는 산이다.

 

 

고운 최치원의 표현으로는 "갑옷을 입은 무사가 말을 타고 앞으로 나오는 형상"이라고 했다. 봉암용곡이란 이름은 최치원이 쓴 봉암사 지증대사비문에 봉암과 같은 바위산에 용틀임을 하듯 맑은 계곡물이 철철 흘러내린 데서 연유된 이름이다.

 

 

지증은 나무꾼이 다니는 길을 따라 희양산 한복판 계곡으로 들어가 지세를 살피니 "산은 사방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으니 마치 봉황의 날개가 구름을 치며 올라가는 듯하고, 계곡물은 백 겹으로 띠처럼 되어 있으니 용의 허리가 돌에 엎드려 있는 듯하다."며 감탄을 하였다. 마침내 지증은 절을 짓기로 결심하고 기와처마 네 귀를 치켜 올려 거친 지세를 누르고, 철불상 2구를 주조하여 호위케 했다. 절이 완성되자 헌강왕은 절 이름을 봉암사라고 지어 내렸다.

 

 

 

▲백 겹으로 굽이치듯 흘러내리는 봉암용곡

 

 

마당에 차를 주차를 하고 밖으로 나오니 매서운 바람이 사정없이 얼굴과 온 몸을 강타한다. 희양산 영봉에서 타고 내려온 살을 에는 바람을 정통으로 맞고 나니 정신이 번쩍 든다. 중생이지만 흐릿한 정신으로 봉암사에 들어오지 말라는 질타일까?

 

 

군대보다 더 엄한 스님들의 봉암사 선방생활

 

 

봉암사는 우리나라 구산선문(九山禪門)의 대표 사찰로 8.15 해방 직후 만신창이가 된 한국불교의 자체 정화를 위하여 봉암사 조실 서암(西庵), 불국사 조실 월산(月山), 해인사 조실 자운(慈雲), 조계종 종정 성철(性徹), 청담 스님 등이 참선결사를 단행하여 자정운동을 벌이면서 참선도량으로 부활하며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하기에 이르렀다.

 

 

▲스님들이 참선 수행을 하는 선방

 

 

그 유명한 1947년의 '봉암사 결사'이다. 개인적인 생각과 관계를 떠나 오직 부처님 법대로만 한번 살아보자며 당시 성철스님은 봉암사에서 지켜야 할 '공주규약(共住規約)'을 만들었다.

 

 

'삼엄한 부처님 계율과 숭고한 조사의 유훈을 부지런히 닦고 힘써 실행하여 큰 결과를 원만히 빨리 이룰 것을 기약한다. 어떠한 사상과 제도를 막론하고 부처님과 조사의 가르침 이외의 각자의 사견은 절대 배척한다. 일상생활에 필요한 물품의 공급은 자주자치의 표지 아래에서 물 기르고, 땔나무 하고, 밭에 씨 부리고, 탁발을 한다. 앉는 차례는 비구계 받은 순서로 한다. 방 안에서는 늘 면벽좌선하고 서로 잡담을 금한다.'

 

 

▲겹겹이 둘러 싸인 산세와 울창한 송림

 

이처럼 엄한 규율을 정하고 이 규율을 어기는 자는 산문 출입을 금했다고 한다. 봉암사는 그 선풍이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오며 조계종 종립특별선원으로 기풍을 고수하고 있다. 봉암사에 들어온 대중은 모두 이 규약을 지켜야 한다. 그러니 대중공양(大衆供養)을 온 신도들은 말 할 것도 없다. 대중공양이란 신도들이 여러 승려에게 음식을 차려서 공양을 하는 행위다.

 

 

원주스님(절집 살림을 맡아하는 스님)에게 인사를 드리고 매생이와 빵, 요구르트 등을 내려놓았다. 스님은 귀한 매생이를 가져왔다고 무척 좋아 하신다. 추운 날씨에 동계 하안거 용맹정진을 하는 스님들이 드시기에 아주 좋은 음식이 될 거라고 하면서 몇 가지 주의 사항을 말했다.

 

 

▲용맹정진하는 스님들에게 대중공양을 할 공양물

 

 

"이곳은 100여분의 스님들이 묵언을 하며 용맹정진을 하고 있으니, 첫째 묵언입니다. 둘째 아무데나 함부로 돌아다니면 안 됩니다. 셋째 정심은 11시 반부터 해회당 공양간에서 시작하니 늦지 않게 오시기 바랍니다. 늦으면 정심을 굶어야 합니다. 그리고 조금 있으면 사시예불이 있으므로 대웅전에 가서 참배를 하고 예불시간까지 조용히 앉아계십시오."

 

 

말하자면 입 다물고, 얌전하게 앉아있고, 밥 때가 지나면 굶긴다는 것이니 군대보다 더 엄한 규율이다. 과연 조계종 산하 2800여개의 절중에서 유일하게 일반에게 공개를 하지 않는 절답게 엄한 규율이다. 봉암사는 들어오기도 힘들지만 들어와서 더 힘들다. 하는 수 없이 우리는 대웅전에 들어가 사시예불이 시작될 때까지 꼼짝없이 쪼그리고 앉아 있어야 했다.

 

 

▲대웅전으로가는 계단에서 내려단 본 요사와 마당

 

 

봉암사에는 우리 말고도 단체로 대중공양을 온 버스가 한 대 정차하고 있었는데 우리는 그 일행들과 함께 대웅전 한쪽 마룻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예불이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마룻바닥이 어찌나 차던지 하반신이 마비가 되는 듯 저려왔다. 내의를 입고 두꺼운 융 재킷과 방한복을 입었는데도 이빨이 딱딱 마주칠 정도로 춥다. 절집은 왜 이렇게 춥게 지어놓을 까?

 

 

대웅전 바닥에는 예불시간에 스님들이 앉을 방석이 질서정연하게 깔려 있다. 스님들의 방석은 두껍고 큰데 비해 우리들이 앉은 방석은 작고 얄팍하다. 그러니 무릎이 더 시리다. 중앙 불단에는 근세에 제작을 한 듯한 부처님이 모셔져 있는데, 좌대 위에 두 분의 부처님을 모셔 놓은 것이 특이하게 보인다.

 

 

 

▲봉암사 대웅보전에 모신 부처님과 후불목각탱화

 

 

불상 뒤에는 후불목각탱화(後佛木刻幀畵)가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인고의 세월을 견뎌오는 동안 몇 차례 불에 타 소실되었던 대웅전은 1955년에 중건되었으나 돌축대를 제외하고는 창건 당시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대웅전을 축대를 개축하면서 기단석 낙숫물받이마저 없애버려 옛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다고 한다.

 

 

10시 반이 가까워지니 참선을 하고 있던 스님들이 일제히 들어왔다. 특이한 점은 중앙 문을 하나만 여는 것이 아니라 정면 7칸의 문을 일시에 활짝 열고 스님들이 일시에 들어온다는 점이다. 문이 열리니 대웅전 안은 몰아치는 찬바람이 대웅전 안을 휘감아 돌아 더욱 추웠다.

 

 

▲정면 7칸의 대웅보전

 

 

다른 절과는 달리 예불을 하는 방법도 특이했다. 가사장삼을 휘날리며 100여명의 스님들이 들어오시는 모습은 과히 장관이었다. 눈 푸른 납자들의 눈빛은 형형했으며, 입은 굳게 다물고 있었다. 일체의 예불독경이 없다. 죽비 소리에 맞추어 절을 세 번 하고는 스님들은 아무 말 없이 다시 일제히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통상적인 예불을 기대했던 신도들은 순간에 예불을 끝내고 일제히 문을 박차고 나가버린 스님들을 바라보며 놀래는 모습이었다. 묵언 정진하는 참선도량답게 예불도 묵언으로 끝내는가 보다. 눈이 푸른 납자들의 모습과 대웅전 내부를 카메라에 담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눈과 마음으로 담았으면 그만일진대 우매한 이 중생은 꼭 영상으로 담고만 싶으니 어떠하랴! 스님 한분이 남아 스님들의 참선생활과 경내에서 지켜야 할 주의사항을 말했다.

 

 

▲대웅보전 현판과 주련

 

 

하안거에 돌입하고 있는 스님들은 하루 세 번의 공양, 세 번의 예불, 14시간 이상의 좌선을 한다고 한다. 스님들은 모두 함께 정진하고, 함께 자고, 함께 일어난다. 보통 가행정진(加行精進-일체의 망상과 일상을 잊고, 하루 14시간 이상 수행에만 전념하는 정진)은 오전 2시 기상, 오후 10시 취침(하루 4시간 수면), 특별정진은 오전 1시 기상, 오후 11시 취침(2시간 수면), 용맹정진은 한시도 눈과 허리를 붙이지 않고 좌선과 보행을 하는 정진으로 수면시간이 없다고 한다. 90일 동안 외부와 일절 연락을 끓고 이렇게 용맹정진을 수행을 한다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대웅보전 돌층계와 기단

 

 

'붓다'란 '눈을 뜨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희양산의 정 덕분에 스님들은 잠도 거의 자지 않고 뜬 눈으로 용맹정진을 할 수 있을까? 눈을 뜨고 귀를 열어 용맹정진을 하는 의미는 무엇인가? 이 세상은 구원되어야 할 존재가 아니고 이미 참으로 구원되어져 있다. 다만 우매한 중생은 탐 진 치 삼독에 찌들어 그것을 모를 뿐이다.

 

 

"도량 내에서 개인행동은 일절 금합니다. 묵언을 하고 경내를 돌아보되 스님들이 참선을 하고 있는 선방은 접근을 해서는 안 됩니다. 멀리서 오셨으니 지증대사적조탑비와 부도, 삼층석탑, 그리고 절 뒤 백운대에 있는 마애보살입상은 둘러보실 수 있습니다. 조용히 둘러보시고 점심공양 시간에 늦지 않게 11시 30분까지 공양간으로 오시기 바랍니다."

 

 

스님의 주의사항을 듣고 나서야 비로써 우리는 경내를 둘러 볼 수 있었다. 그 때 마침 각초스님이 우리를 찾아왔다. 우리는 각초스님을 인연으로 이곳에 왔다. 작년 11월 우리가 섬진강에 살고 있을 때에 서울에서 온 보살님들과 화엄사 뒤에 있는 미타암에 주석하고 계시는 각초스님을 친견했는데, 그 때 스님 말씀이 곧 봉암사로 동안거에 들어간다고 했다.

 

 

▲대웅보전에서 바라본 산세

 

 

그 때 스님께 봉암사로 대중공양을 갈 수 없느냐고 물었다. 평생 가보지 못한 봉암사를 갈 절호의 기회가 생겼기 때문이다. 스님은 봉암사는 대중공양을 하고 온 신도는 사문을 열어주지만 오더라도 묵언정진을 하므로 짧은 시간 머물다 가야 한다고 했다. 그런 인연으로 스님을 봉암사에서 다시 뵙게 되니 무척 반가웠다. 말없이 빙그레 웃으시며 선채로 우리를 대하는 스님의 모습은 무척 수척해 보였다.

 

 

▲대웅보전에서 바라본 넓은 뜰과 선방

 

 

군대보다 더한 엄한 생활이 결코 편하지만은 않으리라. 스님은 점심공양을 한 후 접견실로 와서 잠시 차를 한잔 하고 가라고 이르고는 선방으로 총총히 사라져갔다. 각초스님은 출가 이후 평생 동안 참선 수행을 해온 선승으로 1년에 하안거와 동안거 두 철을 봉암사 등 선방에서 용맹정진을 하곤 한다. 스님이 떠나간 자리가 어쩐지 쓸쓸하게 보였다. 우리는 일행들과 함께 절의 경내를 둘러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