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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양산 봉암사③-비운의 경순왕과 봉암사 극락전

찰라777 2012. 2. 13. 16:16

 

봉암사 극락전과 비운의 경순왕,

그리고 천 년 후의 존재.......

 

 

 

 

봉암사 입구 요사에서 한 단계 윗계단으로 올라서면 설법전으로 보이는 보림당(寶林堂)이 왼편에, 우측에는 조실스님 처소로 보이는 동방장(東方丈)이란 현판이 걸린 건물이 보인다. 그리고 그 정면 한 계단 위에는 극락전(極樂殿)이 자리하고 있다.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이 피신을 했다는 봉암사 극락전

 

 

 

바람이 윙윙 불어대는 솔숲 아래 극락전은 고요히 자리하고 있다. 극락전은 정면 1칸, 측면 1칸 중층 겹치마 모임지붕의 목탑식 건물로 봉암사에서는 가장 오래된 고풍스런 건물이다. 극락전은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 견훤의 난을 피해 이곳에 숨어들어 원당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봉암사 부근 가은읍 갈동의 아차마을은 후백제의 왕 견훤이 태어난 곳이다. 견훤은 난세에 태어난 걸출한 인물이다. 그는 어느 호족보다 강성하여 신라 경애왕을 죽이고 경순왕을 세울 정도로 위세가 등등했다. 그러나 시운이 맞지 않았던 것인지 견훤은 자식에게 유폐되어 비극적 최후를 맞이하고 그의 부하 왕건이 삼국통일의 대권을 잡게 되었다.

 

 

▲겹치마 지붕을 하고 있는 극락전은 봉암사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다.

 

 

 

경순왕이 이곳 봉암사 극락전을 원당으로 사용하며 은신생활을 했다고 하는 증거는 여러 곳에 나타난다. 경순왕은 희양산 중턱 성골(城谷)이라는 성터에 은신을 했다는데, 그 성터에는 지금도 수백 명이 들어가는 굴이 있다고 한다.

 

봉암사 원북마을의 동네이름에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경순왕이 견원의 난을 피하여 왔을 때 아침을 먹은 곳을 아침배미(朝夜味), 저녁을 먹은 곳을 한배미(日夜味)라고 하며, 난을 피하여 돌아갈 때 백성과 고을 원님이 환송을 하던 곳을 배행정(拜行亭)이라고 했는데, 배행정은 바로 봉암사 초입이다.

 

 

▲경순왕이 은신을 했던 희양산

 

 

 

이 밖에도 희양산에는 대궐 터라고 불리는 석성(石城)과 군창지(軍倉址)가 있고, 산록에는 홍문정(紅門亭)·배행정(拜行亭) 등 임금과 관련된 명칭을 가진 곳이 많다. 이런 명칭들은 신라 후기 난세 때에 경순왕의 행궁(行宮)이 있었던 곳임을 증명해 주고 있다. 극락전 내부에는 어필각(御筆閣)이란 편액이 걸려 있다.

 

경순왕(927~935)은 신라 56대 마지막 왕으로 김알지의 후손이다. 경주 김씨는 김알지를 시조로 하여 경순왕 이후 여러 본관으로 분파했다. 봉암사를 창건한 지증대사(824~882)도 속성은 김씨로 경주사람인데, 그 역시 경주 김 씨일 가능성이 크다.

 

 

▲솔숲 우거진 극락전

 

 

 

경순왕은 문성왕(839~857)의 6대손으로 아버지는 효종이며, 어머니는 헌강왕(875~886)의 딸 계아태후이다. 봉암사를 창건한 지증대사는 바로 문성왕과 헌강왕 시기에 도를 떨친 인물이다. 

 

최치원이 쓴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비에 적힌 비문에 의하면, 문성왕(861~875)은 산중에서 도를 떨치고 있는 지증대사에게 "멀리서 그대 생각을 깊이 하니, 나의 곁에 와서 도와주길 바랍니다. 새가 자유로이 나무를 고르듯 훌륭한 거동을 아끼지 말아 주십시요"라고 정중하게 편지를 내어 서라벌 근처에 모시고 싶다고 간청하였다.

 

그러나 지증은 “자신을 닦고 남을 교화시킴에 있어 고요한 곳을 버리고 어디로 나아가겠습니까. 새가 나무를 가려야 할 것이라고 하명하심은 저를 위하여 하신 말씀이오니, 다행히 진흙 속에 편안히 있게 허락하시어 저로하여금 문수 위에 있지 말도록 하여 주십시요”라고 답을 보내 임금의 청을 정중히 거절하였다. 임금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대사를 더욱 진중히 여겼다. 이로부터 그의 명예는 날개가 없이도 사방으로 전해졌으며, 대중은 말하지 않는데도 한결같이 변화하였다.

 

 

▲조사나 방장이 머무는 극락전 옆 동방장

 

 

 

지증대사가 세상을 뜬지 45년 후에 태어난 경순왕은 선대왕들의 인연으로 지증대사가 창건한 문경새재에 깊숙이 자리 잡은 봉암사로 피신을 했을지도 모른다. 사람의 인연이란 참으로 묘하고 묘하다. 왕건이 대권은 잡은 후 볼모로 개성에 머물게 된 경순왕은 왕건의 딸 낙랑공주와 결혼을 하여 그 밑으로 7명을 아들을 낳게 된다. 

 

경순왕의 칠형제는 여러 김씨의 본관으로 분파를 한다. 그 중에 넷째인 대안군 은열(殷說, 978~1028)의 후손이 가장 크게 번창한다. 그 중에 대표적인 성씨가 안동김씨이다. 안동김씨는 김숙승(金叔承)을 시조로 하고 그의 후손인 방경(方慶)을 중시조로 삼고 있다.

 

 

▲봉암사 산신각

 

 

 

숙승의 후손인 효인(孝印)은 방경(方慶), 지경(之慶), 현경(玄慶) 세 아들을 두었는데, 현경의 둘째 아들인 김영규(金永奎)는 경순왕의 13대 후손으로 고려 충렬왕(고려 25대왕, 1274~1308) 때 수성백으로 재직시 '수성최씨(隨城崔氏)'란 성을 왕으로부터 사성(賜姓-왕이 공신에게 성을 하사)을 받는다. 그런데 필자는 공교롭게도 김영규를 시조로 하는 수성최씨 후손이다.

 

수성최씨의 시조인 김영규(金永奎)가 경순왕 사후 300년 후에 고려 임금으로부터 사성(賜姓)을 받는 바람에 나는 성이 '김(金)'씨에서 최(崔)'씨로 바뀐 셈이다. 그러니 조상의 뿌리를 찾아 들어가면 인류의 조상의 모두가 하나가 되지 않을까?

 

 

▲봉암사를 둘러싸고 있는 송림

 

 

 

우연히 이곳 봉암사에 들러 경순왕이 피신한 극락전을 바라보며 나는 천년이라 긴 세월을 시공을 초월하여 깊은 사색에 젖어들고 있다. 따지고 보면 경순왕은 천 년 전에 살았던 나의 할아버지가 아닌가? 견훤의 난을 피해 이곳 문경새재 깊숙이 숨어들어가야 하는 경순왕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극락전 내 아미타불

 

 

그것도 잠시 경순왕은 고려 태조 왕건의 포로가 되어 개성으로 끌려갔으니 사람의 운명이란 한치앞을 내다 볼 수가 없다. 오죽했으면 경순왕의 큰 아들 마의태자는 망국의 한을 안고 금강산으로 입산을 했을까? 개성에서 한 많은 생을 마감한 경순왕은 고향에 묻히지도 못하고 개성에서 가가운 인진강변에 묻혀 있다.

 

섬진강에서 DMZ 부근 임진강변으로 이사를 온 나는 비운의 경순왕 능에서 매우 가까운 곳에 있는 <금가락지>에 머물고 있으니 이 또한 인연치고는 참으로 묘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찬바람만 윙윙 불어대는 봉암사 극락전을 바라보며 천 년 전의 경순왕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필시 가마나 말을 타고 왔을 경순왕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경순왕의 참담한 심정을 그려보며 지증대사탑비가 있는 곳으로 발길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