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임진강일기

큰형수님과 함께 잡초밭을 일구며

찰라777 2012. 6. 12. 05:19

 

어제와 오늘은 콩을 심기 위해 잡초로 얼룩진 옆 뜰과 앞마당을 쇠스랑으로 일구고 잡초를 제거하는 작업을 했다. 그런데 잡초라는 놈이 어찌나 뿌리가 질기고 튼튼하게 박혀 있는지 보통작업이 아니다.

 

마침 큰형수님이 오시어 잡초를 제거하는 일을 도와 주셨다. 내가 쇠스랑으로 땅을 파서 잡초의 뿌리를 파내면, 형수님은 호미로 뿌리의 흙을 털어서 옆으로 쳐냈다. 아내는 아직도 휠체어 신세를 지고 있어 꼼짝을 하지 못한다. 일은 혼자 할 때보다 훨씬 수월하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란 말이 실감이 난다.

 

 

 

▲잡초를 뽑고 있는 큰 형수님

 

 

큰형수님은 나보다 10살 위이신데 고향에서 내가 10살이 되었을 때 큰형님에게 시집을 오셨다. 가마를 타고 시집을 오신 형수님이 어찌나 고우시던지 나는 그날 하루 종일 싱글벙글 거리며 형수님을 쳐다보곤 했던 추억이 아련히 떠오른다.

 

 

그 시절 농사를 짓는 시골에 시집을 오면 농사일에 파묻히게 되는데, 형수님도 마찬가지였다. 형수님은 얼굴이 고운만큼 마음씨도 어찌나 곱던지 막내인 나는 마치 어머니를 대하는 것 같았다. 노모 밑에서 자란 나는 큰형수님의 도움으로 중고등학교까지 마칠 수가 있었다.

 

그런데 큰형님께서 생각보다 너무나 일찍 타계를 하셨다. 큰형님은 6.25 한국전쟁 참전 용사로 전쟁의 후유증으로 돌아가신 거나 다름없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그 해 형님은 17세의 어린나이로 논에서 일을 하다가 면사무소 직원이 들고 온 징집영장을 받고 손발을 제대로 씻을 새도 없이 입대를 하게 되었다. 그 길로 형님은 제주도로 가서 3개월간 전투훈련을 받고 ‘보병9사단(백마부대)’에 전보되어 곧바로 전선에 투입되었다.

 

 

 ▲6.25 참전 당시 큰형님(맨 우측)의 사진

 

그 후 형님은 강원도 철원 백마고지 전투에 참전하는 등 수많은 전투에 투입되어 사선을 넘고 넘었다. 특히 백마고지 전투에서는 절벽에 굴러 떨어져 한동안 행방을 찾지 못해 전사 통지까지 받기도 했으나, 온 몸에 부상을 입은 채 가까스로 목숨을 유지해 살아 있는 것을 아군이 발견해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형님께서는 전쟁이 거의 마무리되어가는 1955년 5월에 제대를 했다. 그 동안 휴가 한 번 가보지 못하고 5년간의 긴 군대생활을 마치고 꿈에 그리던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말 그대로 상처뿐인 영광뿐이었다. 형님은 참전 당시 당하 부상과 동상의 후유증으로 고생을 하시다가 1981년 49세의 짧은 생애로 생을 마감하셨다.

 

슬하에 3남 2녀를 두고 돌아가신 가업을 큰형수님은 이어받아야 했다. 가업이라 해 보아야 농사를 짓는 일 뿐이다.

 

형님이 6.25 참전 용사였지만 그 때가지는 이렇다 할 보상 한 번 받지 못했다. 그런데 지난 2010년 4월 10일 형님의 <화랑모공훈장>이 6.25 첨전 이후 56년 만에 도착했다. 국방부에서 뒤늦게 6.25 참전 용사들의 공적을 찾아 훈장증을 보내준 것이다.

 

 

 

 

"훈장증. 제9보병사단 육군하사 최현균. 귀하는 멸공전선에서 제반애로를 극복하고 헌신분투하여 발군의 무공을 세웠으므로 그 애국지성과 빛난 공적을 가상하여 대통령 내훈 제2호에 의거한 국방부장관의 권한에 의하여 다음 훈장을 수요함. <은성화랑무공훈장> 1954년 4월 20일 국방부장관"

 

형님은 제대 무렵(1955년) 전쟁이 누그러지고 다소 시간적 여유가 생기자 틈틈이 전선생활에 대한 일기장을 기록 하셨다. <향수>라고 제목을 부친 일기장은 메모장을 주어모아 엮은 낡은 공책이다. 얼마나 고향이 그리우면 향수라는 제목을 붙였을까? 큰 조카는 그 빛바랜 일기장을 가보로 고이 간직하고 있다. 그 일기장을 한 토막을 이곳에 소개해 본다.

 

 

 

 

"4288년 1월 18일. 금요일. 금일 오전부터 대대훈련장에 나가 (교육을) 받고 있는 도중에 오전 중에 백선엽 각하가 제29연대를 방문하였다. 오후에도 역시 교육을 받고 중대에 돌아와 석식 후 일일점검표를 정리하였다……."

 

형님의 훈장증을 받아들고 형수님은 조카들과 함께 고향의 묘소로 달려가 훈장증을 형님의 묘소에 받치고 눈물을 흘리며 참배를 하였다. 형님께서 살아 계셨을 때 이 훈장을 받았더라면 얼마나 좋아 하셨을까?

 

형님이 돌아가신 뒤 형수님은 조카들을 잘 키우고 가르쳐 모두 시집 장가를 보냈다. 형수님은 지금 서울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하고 있는 큰 조카 집에 머물고 계신다. 그렇게 곱기만 하시던 형수님의 얼굴도 주름살이 가득하다.

 

 

 

 

세상의 인연은 참으로 묘하고 묘하다. 어찌어찌하여 나는 이곳 DMZ 부근에 이사를 오게 되었는데, 이 지역은 큰형님이 6.25 당시 참전을 했던 지역이고, 이곳까지 큰형수님이 오시게 되었으니 말이다.

 

나는 이번 주에 형수님을 모시고 형님께서 목숨을 걸고 참전을 했던 <백마고지>를 방문할 예정이다. 말없이 잡초를 뽑아내고 계시는 형수님을 바라보노라니 만감이 교차한다. 세월은 이렇게 무상한 것이다.

 

(2012.6.11 큰형수님과 잡초밭을 일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