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방랑/'희망의 씨앗' 네팔방문기

매일 24km를 걷더라도 공부하고 싶던 소년의 꿈

찰라777 2014. 12. 9. 10:08

[희망의씨앗 네팔방문기②]

 

장학금까지 받았는데.. 카트만두로 돈 벌러 떠난 소년

 

 

아내와 나는 버드러칼리학교의 두 선생님이 운전하는 오토바이 뒤에 탔다. 이런 오지에서 오토바이는 마을을 오가는 유일한 교통수단이다. 버드러칼리학교에서 사빈 당이(Sabin Dangi) 학생의 집까지는 약 12km나 된다. 이 길을 사빈은 매일 걸어서 학교를 다녔다. 2012년, 자비공덕회의 장학금 지급 대상으로 뽑혔던 사빈이. 그런데 지금은 학교에 다니지 않는다고 한다. 그에게 학교에 다니지 못할 무슨 사연이 생겼을까?

 

사빈의 집으로 가는 길은 양쪽에 논이 있고, 논 사이로 난 좁은 농로를 따라 가야 했다. 논에는 벼들이 누렇게 익어가고 있었다. 오토바이를 타고 비포장도로를 달려가는데 문득 내가 어린 시절 살았던 고향의 초가을 풍경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나는 2년 전 사빈이로부터 받았던 편지가 생각났다.

 

가정 형편이 어려웠던 소년의 편지 한 통

 

 

▲ 2년 전에 보내온 사빈 당이의 편지

 

"저는 두 어린 누이와 병든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는 사빈 당이라고 합니다. 저희 아버지는 젊은 나이에 요절하셨고, 어머니는 중풍을 앓고 있어 짧은 거리도 잘 움직이지 못하는 처지에 있습니다. 저희들은 지붕에서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많은 비가 새들어오는 구멍 난 집에서 살고 있습니다. 생활비를 버느라 저희 두 누이동생들은 정부의무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사빈이는 고등학교 2학년생이었다. 버드러칼리학교에서 12km나 떨어진 저로파니라는 마을에 살고 있었다. 사빈이는 가정 형편이 너무 어려워 더 이상 학교에 다닐 수 없게 됐다. 소년 가장인 그는 가족들을 위해서 돈을 벌어야 하기도 했지만, 책과 공책을 살 돈도 없었다.

 

공부를 계속하고 싶었던 그는 이웃 마을에 위치한 버드러칼리학교에서 한국자비공덕회의 장학금을 받으면 학교에 다닐 수 있다는 소문을 듣게 됐다. 그는 자신의 처지를 기록해서 버드러칼리학교에 장학생 신청을 했다. 다행히 그는 2012년부터 한국자비공덕회의 장학금 수혜 대상자로 선발되었다. 장학금이라고 해 보아야 한 달에 고작 1000루피(약 1만 2000원) 정도의 생활비를 지원해 주는 작은 돈이다.

 

우리에게는 작은 돈이지만, 네팔에서 1000루피는 결코 작은 돈이 아니다. 사빈이는 그 돈을 받아서 책과 노트를 사고 생활비에 보태며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소년 가장인 사빈이는 어려운 가정을 돌보면서도 매일 24km를 걸어서 학교에 다녔다. 그렇게 어려운 처지에 있으면서도 그의 성적은 상위권을 유지했다.

 

다시 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된 그는 그 해에 매월 장학금을 보내주는 한국자비공덕회 앞으로 감사 편지를 썼다. 영문으로 또박또박 써 내려간 그의 편지를 읽어내려 가다가 나는 그만 코끝이 시큰해지고 말았다.

 

"한국자비공덕회에서 보내준 장학금으로 저는 책과 종이, 연필 등을 구하고 생활에도 많은 도움이 되어 다시 학교에 다닐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한국자비공덕회의 장학금은 저로 하여금 인생의 목표를 충실하게 하고, 굳은 결심을 하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저의 목표는 궁핍한 가족들을 위하여 분투하며 살아가는 강한 남자가 되는 것입니다. 앞으로 성장을 하여 성공을 하면 저는 어려운 처지에 있는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가난한 사람들이 기초적인 생활을 하는데 꼭 필요한 기금을 설립하고자 합니다. 저는 결코 저만의 이익을 위한 목표를 갖지 않겠습니다. 저는 더욱 열심히 노력하여 가난한 사람들이 허덕이는 것을 그대로 방치하는 삶을 살지 않겠습니다."

 

장학금을 받아 공부를 다시 할 수 있게 된 어린 소년 사빈이의 마음과 굳은 결심이 구구절절하게 가슴에 박혔다. 아니 어쩌면 그의 처지가 어린 시절 내 처지와 비슷해서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시골에서 태어난 나 역시 하루에 14km를 걸어서 중·고등학교를 다녔다.

 

오토바이를 타고 사빈이 집까지 오는 동안 내 어린 시절 어려웠던 추억이 스크린처럼 지나갔다. 그런데 사빈이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열심히 공부를 해서 성공을 하고, 가난한 이웃을 돕겠다는 그의 굳은 결심이 무너져 버린 걸까?

 

 

순식간에 모인 200만 원의 정성... 부족했나

 

▲ 새 집을 짓기 이전에 사빈이네 가족이 살던 집

 

사빈이의 편지에 큰 감동을 받은 나는 그의 편지를 번역해서 그해 9월 한국자비공덕회 모임에서 회원들에게 읽어 주었다. 그랬더니 어린 사빈이를 돕자는 의견이 즉석에서 나왔다. 우선 곧 붕괴 위기에 처해 있는 집을 고쳐 주자며 200만 원의 성금을 모았다. 사빈이에게 자전거를 한 대 선물하겠다는 회원도 있었다. 그리고 그해에 모아진 성금과 자전거를 사빈이 집에 전달을 했다.

 

그 후 2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사빈이네 집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네팔에 오기 전부터 사빈이의 근황이 무엇보다도 궁금했다. 그래서 아내와 둘이서 사빈이 집을 방문하기로 했다.

 

좁고 꼬불꼬불한 길을 한참을 가서야 드디어 우리는 사빈이 집에 도착했다. 길이 울퉁불퉁해서 엉덩이가 아팠다. 이 먼 길을 매일 걸어서 학교에 다니다니... 이 길을 걸으며 청운의 꿈을 안고 학교에 다녔을 사빈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를 태우고 가던 선생님은 들 가운데 있는 흙담집 앞에서 오토바이를 세웠다. 이 집이 사빈의 집이란다. 제법 네모 번듯한 흙담집이었다.

 

 

▲ 붕괴 직전에 있던 사빈이네 움막집이 한국자비공덕회 회원들이 보낸 성금으로 흙담집으로 지어져 있다.

마침 집 앞 토방에는 사빈이 엄마가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선생님이 우리를 사빈이 엄마에게 한국자비공덕회에서 온 손님이라고 소개했다. 갑자기 들이닥친 우리를 보고 사빈이 어머니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정작 만나고 싶었던 사빈이는 집에 없었다. 선생님이 사빈이는 어디에 있느냐고 묻자 사빈이 어머니가 울상을 지으며 뭐라고 대답을 했다.

 

"사빈이는 어디에 있지요?"

"사빈이는 두 시간 전에 카트만두로 돈을 벌기 위해 떠났다고 합니다."

"저런, 두 시간 전에! 학교는 어떻게 하고요?"

"집안 형편이 너무 어려워 학교에는 도저히 다닐 수가 없다고 하는군요."

 

이 소년 가장은 아픈 어머니와 동생들을 돌보기 위해 결국 학업을 중단하고 카트만두로 떠났다. 남의 농사일을 도우며 받은 품삯으로 겨우 끼니를 연명하고 있지만 그것으로는 병든 어머니와 동생들을 돌보기에는 너무 어려웠다.

 

사빈이 어머니는 우려했던 것보다는 건강상태가 나아 보였다. 조금 있자 사빈이 동생이 왔다. 우리는 한국에서 준비해온 작은 선물을 사빈이 어머니와 사빈의 동생에게 내밀었다.

 

 

조촐한 살림... 가난의 벽에 막혀 포기한 꿈

 

사빈이 어머니와 동생은 미안해하면서도 기쁨의 미소를 지으며 우리들이 준비한 선물을 건네받았다. 선물을 건네준 뒤 방안을 둘러보았다. 천으로 가린 방을 둘러보니 흙벽과 함께 작은 침대가 눈에 들어왔다.

 

 

▲ 사빈이네 집 방 내부

 

▲ 사빈이네 집 내부. 흙담을 다 쌓지 못해 아직도 구멍이 뚫려 있다.

 

양쪽 뒤의 벽과 위쪽은 대나무를 엮어서 둘러쳐 놓았다. 벽 중간에는 대나무로 된 옷걸이가 가로로 쳐 있고, 그 옷걸이에는 헌 옷들이 얼기설기 걸려 있었다. 방 모서리에는 낡은 책상이 하나 자리했다. 그 위에는 사빈이의 책가방으로 보이는 배낭 하나와 헌책 몇 권이 어지러이 놓여 있었다. 토방에는 화로가 두 개 놓여 있었는데 아마 이 토방에서 밥을 지어 먹는 모양이었다.

 

 

토담집 옆에는 화장실로 보이는 움막 하나가 서 있고, 물 펌프와 세숫대야가 엎어져 있었다. 그 앞에는 채소를 심은 작은 텃밭이 있었다.

 

▲ 사빈이네 집

 

남의 집에서 일을 해도 품삯이 너무 적어 집안 살림을 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선생님이 귀띔해 주었다. 사빈이는 공부를 하는 것보다도 우선 발등에 떨어진 불이 급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었다.

 

"혹시 사빈이와 연락을 할 수는 없나요?"

"사빈이 어머니에게 한 번 물어보지요."

 

더 어려운 환경에 처한 사람도 많아... 서글프다

 

사빈이를 만나지 못한 나는 그와 통화라도 한 번 하고 싶었다. 선생님이 사빈이의 어머니에게 사빈이의 연락처를 묻자 사빈이의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다. 선생님이 전화를 걸어 사빈이와 통화를 했다. 그리고 전화를 나에게 바꾸어 주었다. 하지만 나는 가물가물 들려오는 상대편의 목소리를 거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나도 사빈이도 영어가 서투른 탓도 있으리라. 다만 취직을 해서 돈을 벌어야 한다는 소리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나는 그에게 학업을 마친 다음에 취직을 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그는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못 알아들었는지 "죄송합니다(Sorry, Sir)"만 반복했다. 전화를 끊고 선생님에게 사빈이가 뭐라고 하며 카트만두로 떠났는지 물어봤다. 사빈이는 취직을 할 때까지 카트만두를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단다. 그렇지만 그가 과연 카트만두에서 일자리를 쉽게 구할 수 있을까?

 

 

▲ 사빈이 어머니와 동생의 모습

 

나는 아쉬운 마음으로 사빈이의 집을 떠났다. 사빈이 어머니와 동생은 우리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며 인사를 했다.

 

네팔에는 사빈이네 집보다 더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는 사람들이 많다. 학업을 마친 후 성공해서 자기보다 더 가난한 사람들을 돕겠다고 굳은 결의를 보였던 사빈이가 학업을 중단한 것이 못내 아쉽게만 생각됐다. 하루에 24km를 걸어 다니며 청운의 꿈을 불태웠던 소년의 결심을 무너뜨리게 한 현실이, 너무 서글프게만 다가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