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방랑/'희망의 씨앗' 네팔방문기

이런 칠판을 구경해 본적이 있나요?

찰라777 2014. 12. 11. 17:04

[희망의 씨앗 네팔방문기④]

 

창고 같은 교실과 글씨를 알아볼 수 없는 칠판 
  

학교 운동장에서 선물을 나누어 주고 나니 오후 5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우리는 버드러칼리학교를 떠나기 전에 교실을 돌아보기로 했다. 녹슨 양철지붕에 문짝도 제대로 없는 학교 건물은 꼭 허름한 창고를 방불케 했다.

 

교실 안으로 들어간 우리는 모두 입을 벌리고 놀래고 말았다. 비가 새지 않도록 칸막이만 겨우 해 놓은 교실에는 아무것도 없고 오래된 나무책상 앞에 낡을 대로 낡은 칠판이 하나 뎅그렇게 걸려 있었다. 

 

▲ 교실과 칠판 버드러칼리학교 교실내부와 칠판.

비가 새지 않도록 칸막이와 양철지붕을 한 교실에는 맨 땅에 낡은 책상만 놓여있다.   
 


"아이고, 저게 칠판이라니… 어떻게 글씨를 알아보지요?"

"그래도 여긴 좀 나아요. 오래전에 제가 공부를 했던 교실을 한 번 가볼까요?"

 

우리는 케이피 시토울라 씨가 오래 전 이 학교에 다닐 때 공부를 했다는 교실로 가보았다. 그 교실의 칠판은 더 작고 낡아 도저히 칠판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시멘트벽에 그냥 검정색을 칠해 놓은 듯 했다.

 

"세상에! 시토울라 씨가 이 교실에서 공부를 했다니 도저히 믿기지 않네요."

"이런 칠판에서 어떻게 공부를 했을까?"

"와아, 정말 개천에서 용이 나왔네요!" 


 

▲ 칠판 시멘트벽에 검정색을 칠해 놓은 낡은 칠판. 글씨를 써도 잘 보이지 않는다.  
 

 

이 지역이 고향인 케이피 시토울라씨는 초등학교와 중등학교를 이곳에서 150km 정도 떨어진 칸첸중가 기슭에 있는 타플레중(Taplejung)이란 오지에서 다녔다고 한다. 그리고 고등학교에 진학을 하기위하여 이곳 버드러칼리학교 인근으로 이사 오게 되었다고 한다. 타플레중은 이곳보다 훨씬 더 깊은 칸첸중가 기슭 해발 2500m에 위치한 산간벽지이다.

 

그는 이곳 버드러칼리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네팔의 최고 명문인 카트만두 트리부반(Thibhuvan)대학 경제경영학과에 입학을 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을 했다. 그러나 그 당시 네팔은 내전과 민주화 운동으로 정치‧경제가 불안하여 국내에서 취직을 하기도 어려웠다(▲ 버드러칼리학교에서 후배들을 격려하고 있는 케이피 시토울라 씨) 
 

국내에서 취직이 어렵게 되자 대학을 졸업한 후 그는 해외로 진출해야겠다는 꿈을 가졌다. 미국과 일본 등 선진국으로 진출할 꿈을 가지고 있던 그는 우연히 대학에서 올림픽에 대한 역사 공부하다가 남북으로 분단된 작은 나라인 한국에서 올림픽을 치른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전쟁을 치른 후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 했던 보잘 것 없었던 나라가 짧은 기간에 이렇게 눈부신 발전을 한데는 분명이 무슨 원인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런 나라에 가면 분명히 무언가 배울 점이 많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그는 당초 미국이나 일본 등 선진국으로 가려고 했던 마음을 바꾸어서 한국행을 결심했다고 한다.

 

한국에 온 그는 한국 경제발전의 태동이 의류산업에서부터 시작된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는 당시 네팔의 산업수준을 감안 할 때 노동집약적인 의류산업을 일으키면 많은 사람에게 일자리를 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네팔에 의류산업을 일으킬 꿈을 꾸며 그는 3년 동안 패션 디자인학교를 다니며 의류디자인 기술을 익혔다. 디자인학교을 다니면서 그는 네팔에 디자인 전문학교를 개설하여 의류디자인 기술을 보급시키고, 자신만의 브랜드로 생산라인도 건설할 계획을 가졌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디자인학교를 졸업한 후 한국인 투자자와 함께 네팔을 방문했다. 그러나 당시 극심한 내전으로 불안을 느낀 투자자들이 투자를 할 생각을 접는 바람에 그는 결국 의류산업의 꿈을 이루지 못하게 되었다.     

 

▲ 교실과 칠판 케이피 시토울라씨가 공부를 했다는 교실.

그는 이 교실에서 공부를 하여 네팔의 명문대학인 카트만두 트리부반 대학을 들어갔다.   

 

그러나 그는 절망하지 않고 한국을 떠나지 않았다. 한국과 인연을 맺은 지 10여년 지난 후, 그가  두 번째로 선택한 길이 관광사업이었다. 그는 네팔항공 한국지사에 근무하면서 한국인들이 네팔에 대하여 너무 모르고 있다는 점에 착한하여 네팔투어란 여행사를 설립하고, 2002년도에는 민간자격으로 네팔관광청 한국사무소를 개설하여 한국에 네팔을 알리기 시작했다.

 

주한네팔인협회 초대회장을 역임한 그는 한국에 점점 늘어나는 주한네팔인 근로자와 다문화가정, 그리고 네팔을 방문하고자 하는 한국인들을 위하여 네팔문화원격인 '네팔하우스'를 확장 이전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면서, 네팔과 한국의 문화교류 증진에도 힘을 쏟았다. 또한 한국에 네팔의 전통음식문화를 알리기 위하여 '옴 레스토랑'이란 네팔 전통음식점을 오픈 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그는 2009년도에 네팔인 최초로 서울시명예시민증을 수여 받기도 했다.

 

한국자비공덕회가 이곳 버드러칼리학교와 인연을 맺어 장학 사업을 하게 된 것도 시토울라 씨의 역할이 크다. 그는 한국어를 한국인보다 더 잘 구사를 한다. 독학으로 한국어를 배웠다는 그는 네팔어 통역사 자격증까지 취득하고 법원에서 네팔인들이 소송을 할 경우에 통역 봉사 활동도 하고 있다.

 

이렇게 네팔 하고도 오지 중의 오지인 네팔 동부 칸첸중가 기슭에서 태어난 그가 아무런 연고도 없는 먼 한국까지 건너와 자신의 사업체를 경영하며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일에도 발 벗고 나서고 있는 것은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는 끊임없는 노력과 용기가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이다. 


 

▲ 교실 창고를 방불케 하는 교실. 네팔의 시골 교실이 거의 이런 모습인데 이보다 못한 곳이 더 많다.   
  

그러므로 이곳 네팔의 더먹 지역에서는 시토울라 씨야 말로 개천에서 용처럼 솟아오른 큰 인물이다. 도저히 글씨를 알아볼 수도 없는 칠판에서 공부를 한 학생도 열심히 노력을 하면 네팔의 최고명문대학인 트리부반 대학에 입학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후배들이 우러러 보는 롤 모델이 되어 있었다. 많은 후배들이 그들의 선배인 시토울라 씨를 보라보며 자극을 받아 학업에 열중하고 있다. 우리들 역시 후원을 하고 학생들이 시토울나 씨 같은 제2, 제3의 인물이 나오기를 크게 기대하고 있다. 

 

"아무리 어렵더라도 저 칠판만큼은 글씨가 좀 보이게 해야 하지 않은가요?"

"시토울라 씨, 정부가 학생들의 교육을 위하여 하는 일이 무엇이지요?"

"나라가 워낙 가난하다 보니 그렇지요. 이 학교뿐만 아니라 네팔의 시골학교가 거의 다 이런 칠판을 쓰고 있답니다."

 

네팔을 처음 와 본 회원들은 도저히 이해를 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시토울라 씨에게 질문을 퍼부었다. 그러나 시토울라 씨의 의하면 그래도 이 학교는 사정이 좀 나은 편이라고 한다. 산간 벽지에 가면 제대로 된 교실이 없는 곳도 많고 시설도 훨씬 낙후되어있다는 것이다.

 

"다음에는 컴퓨터보다 먼저 저 칠판을 바꾸어 주는 일을 시작해야 할 것 같아요."

"정말 그래야 할 것 같네요."

 

사람들이 무기력한 것일까? 아니면 아예 체념을 한 것일까? 그러나 우리와 문화와 생각, 그리고 오랜 관습이 다른 환경을 생각하면 함부로 말을 할 수는 없다. 그래도 어린 꿈나무들이 배우며 꿈을 키우는 저 칠판만큼은 바꾸어 주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지상스님과 회원들은 칠판을 바꾸어 주는 일을 먼저 시작하자고 제안을 하며 교실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