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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 걸쳐 암자 일구고... 훌쩍 떠나는 스님

찰라777 2015. 1. 13. 16:28

방황하는 이들에게 참선 가르치고자 

평생 일군 도량을 떠나는 지리산 각초스님

 

 

각초스님께서 홀로 15년 동안 온 정성을 쏟아 일구어 놓은 미타암 전경

 

미타암은 지리산 중턱에 자리 잡은 작은 암자다. 미타암에 들어서면 바람소리 물소리만 들릴 뿐, 사람도 자동차도 볼 수 없는 은밀한 장소이다. 화엄사와 연기암 중간쯤에 위치, 지리산 노고단의 정기를 듬뿍 머금고 있는 명당이라고 할까? 울울창창한 소나무 숲 사이로 흘러가는 구름만 바라보이는 천혜의 자연 속에 숨겨진 보물이다.

 

이 작은 암자에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는 선지식이 주석하고 있다. 바로 지리산 각초스님이다. 미타암은 지난 15년 동안 각초 스님께서 온 정성을 쏟아 일구어 놓은 청정한 도량이다.

 

그러나 이 절터는 스님께서 암자를 짓기 전에는 그 누구도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불모의 땅이었다고 한다. 숲 속 깊숙이 위치해 있는데다가 습기가 많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스님께서 처음에 이 불모지에 암자를 지으려고 하자 모두가 무모한 행동이라고 말렸다고 한다.

 

참선만 하던 스님... 불모지에 암자를 짓다

 

더구나 각초스님은 평생 참선만 수행정진을 해온 선방스님이다. 스님은 출가를 한 이후 한해도 거르지 않고 봉암사나 각화사 등 전국의 유명 선방도량을 찾아 하안거와 동안거에 들곤 했다. 절을 지으려면 시주를 잘 받아야 하는데, 스님은 한 번도 주지를 지낸 적이 없다. 평생 선방을 찾아 참선만 참구해오던 스님이 절을 짓는다고 하니 더욱 무모한 행동으로만 보였을 것이다.

 

그런데 스님께서는 나름대로 절터를 보는 안목이 있었던지 그 불모의 땅을 개간하여 암자를 짓기 시작했다. 세간의 인연이란 참으로 묘하다는 생각이 든다. 학처럼 조용하게만 지내던 선방스님이 절을 짓는다고 하자 여기저기서 조금씩 절 짓는데 보태라고 시주가 들어왔다.

 

스님은 인연 따라 들어온 시주로 처음에는 대웅전을 짓고, 그 다음에 대웅전 옆에 작은 요사를 지었다. 대웅전이라고 해보아야 겨우 작은 부처님 한분을 모실정도로 서너 평 정도의 좁은 법당이다. 그리고 그 법당 양쪽에 스님이 기거할 작은 방을 만들었다 

 

맨 처음 지어진 대웅전과 요사채 

 

대웅전을 지은 후 스님은 선방과 암자를 오가며 몇 년이 지났다. 스님은 언젠가 대웅전 위에 조그만 산신각을 하나 지었으면 좋겠다고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 말을 들은 지 몇 해가 지나 미타암을 방문하니 정말로 성냥갑처럼 작은 산신각이 대웅전 뒤에 그림처럼 지어져 있었다. 누군가가 산신각을 짓는 시주를 했다고 한다. 스님은 소나무 숲속에 지어진 산신각에 노고단 산신 할머니를 모셔 놓았다. 

 

몇 해 후 소나무 숲속에 작은 산신각을 지어 노고단 할머니 산신을 모셨다

 

그렇게 또 몇 해가 지나니 여름 휴가철이면 찾아오는 신도들이 제법 늘어나 기거할 방이 모자랐다. 그래서 스님은 다시 대웅전 아래 터에 신도들이 기거할 요사를 늘릴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자 또 누군가가 요사를 짓는데 시주를 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의 다섯 칸짜리 요사채가 지어졌다. 무공해 황토로 지은 요사채는 정갈하고 신선하여 해마다 여러 신도들이 이용을 하고 있다. 

 

대웅전 아래 터에 황토 요사채는 2012년도에 지어졌다.

 

그리고 초가로 지붕을 이은 멋진 차방도 추가로 지어졌다. 스님은 이렇게 지난 15년 동안 대웅전과 요사, 산신각 등을 인연 따라 하나씩 하나씩 일구어 놓았다. 매년 미타암을 방문 할 때마다 신기하게도 절의 모습이 달라져갔다. 선방에만 계시는 스님이 어떻게 이런 가람을 이룩할 수 있을까? 그래서 나는 스님께 우스갯소리로 이런 말을 여쭈어 보기도 했다.

 

"스님께선 주로 선방에만 계시는데 그 동안 누가 도깨비 방망이라도 휘둘러서 암자를 하나씩 지어 준거 아닙니까?"

"허허, 나도 잘 모르겠어요. 혹 누가 압니까? 노고단 할머니 산신께서 도깨비 방망이를 휘둘러 지어주었는지. 사실 이 절은 내가 지은 것은 하나도 없고 모두 인연 따라 신도님들께서 지은 것이지요."

 

신도들 정성으로 15년 동안 지은 암자... 스님은 왜 떠나나

 

처음에 나는 스님께서 평생 이 암자에서 머물 요량으로 절을 하나씩 하나씩 지어가는 것으로만 생각했었다. 스님들도 노후에 죽을 때까지 머물 곳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평생 일구어 놓으신 도량을 한 순간에 내려놓고 스님께서 다른 곳으로 떠나신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무리 출가를 하신 스님이라 할지라도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냥 이곳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면 평생 밥을 먹고 지내시기에는 별 탈이 없는 편안한 암자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스님께서는 공들여 지으신 암자를 한 순간에 내려놓으려고 할까? 다른 스님들은 큰 절의 주지를 하다가도 노후에 머물 곳을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다는데 그 반대로 행동을 하다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미타암 입구에서 바라본 암자 전경. 연못에는 금붕어가 자라고 암자 뒤로는 지리산 노고단으로 이어진다

 

스님께서 미타암을 떠나는 사연도 궁금하고, 또 스님이 계실 적에 마지막으로 며칠 머물고 싶기도 하여 나는 아내와 함께 지리산으로 향했다. 미타암은 나에게도 인연이 깊은 암자이다. 마음이 산만하면 고향을 가듯 툭하고 찾아가 지친 마음을 쉬게 했다. 또한 난치병을 앓고 있는 아내와 함께 몇 달 동안 머물며 심신을 치유 했던 곳이기도 하다.

 

지리산 정기를 듬뿍 머금은 숲속에 암자가 위치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늘 넉넉한 마음으로 중생의 아픔을 보듬어 주는 각초 스님이 거기에 계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스님께서 떠나신다고 하니 섭섭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 화엄골에 이르러 점심때쯤 미타암에 도착을 하니 스님께서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배고플 텐데 어서들 공양을 드세요. 천천히 많이 드시고 차방으로 올라오세요."

 

스님은 여전히 넉넉한 모습으로 점심공양을 들라하고 차방으로 먼저 올라갔다. 배고픈 중생은 먼저 허기를 채워야 한다. 점심공양을 맛나게 먹고 차방으로 올라갔다.

 

', 이렇게 멋들어진 차방에서 차를 마시는 일도 이제 쉽지가 않겠네!'

 

초가 차방의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왠지 가슴이 먹먹해졌다. 스님께 엎디어 3배를 하려고 하니 1배만 하라고 만류를 하신다 

 

소나무 밑에 멋지게 지어진 초가 차방  

모든 걸 내려놓고 훌훌 떠나시는 각초스님이 미타암 차방에서 차를 달이고 있다.

 

손수 차를 달이시는 스님의 모습이 여여 하다. 뜨거운 차를 몇 잔 마시고 나니 금방 온 몸이 더워졌다.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기자는 스님께 대뜸 질문을 던졌다.

 

"스님, 평생 일구어 놓으신 청정도량을 일순에 내려놓고 어디로 떠나시렵니까?"

"허허, 이 암자와 아마 시절인연이 다 한 모양이지요. 이제 이 절도 그만 내려놓을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스님의 손때 묻은 암자를 이렇게 한 순간에 내려놓고 훌쩍 떠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닐 텐데요?"

"그게, 그렇기도 하지요. 그런데 이번에 스님에게 곡성 태안사 주지소임이 주어졌어요. 그 또한 스님한테 주어진 인연이 아니겠어요? 허허."

", 그랬군요. 그래도 온 정성을 쏟아 지으신 이 암자를 내려놓고 떠나기가 아쉽지 않으십니까? "

 

스님은 즉시 대답을 하지 않고, 지금까지 마시던 찻종지를 비우고 다른 차를 넣어 끓이더니 다시 우리들의 빈잔에 차를 따랐다. 모두 침묵 속에 차를 받아 홀짝홀짝 마셨다. 마시던 찻잔을 내려놓고 한참 후에 스님은 말을 이어 나갔다.

 

"나도 사람인데 어찌 아쉽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중이라고 해서 그냥 안일하게만 지낼 수만도 없지요. 태안사에 가면 스님 할 일이 많습니다. 스님이 평생 하고 싶은 일이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한국 고유의 참선을 가르치는 일입니다. 방황하는 젊은이들에게 조금이라도 본래의 성품을 깨닫는데 도움을 주고 싶은 거지요. 마침 태안사에는 도량도 넓고 선방도 있으니 앞으로 젊은 불자들에게 선을 전수하기에 적합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가지로 부족한 중하지만 앞으로 태안사에 머무는 동안 젊은이들에게 한국 고유의 선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을 다해볼까 합니다."

"그런 깊은 뜻이 있었군요. 하지만 언제까지나 그 절의 주지 소임을 맡을 수 있다는 보장도 없을 텐데요?"

"허허, 그건 나중에 생각할 일이지요. 설마 중이 산 입에 풀칠인들 하겠습니까?

 

한국 고유의 선을 전수하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한국 고유의 참선을 가르치고 싶다고 하시는 각초스님(현 화엄사 선등선원장)

 

각초스님은 소리 내어 너털웃음을 짓더니 잠시 눈을 들어 창밖의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에서 스님의 참마음을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조계종의 주지 소임은 보통 4년 마다 바뀐다. 그런 부담을 안고도 스님은 절 살림이 어렵다는 태안사 주지로 가신다고 했다.

 

젊은이들에게 한국의 고유의 선을 전수하겠다는 일념으로, 그리고 이 미타암은 화엄사에 기증을 하기로 했다고 한다. 그래야 한쪽 일에만 전념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과연 평생을 참선수행으로 일관을 해 오신 각초스님답다는 생각이 든다. 내려놓을 시기를 놓치지 않고 훌쩍 마음을 비우는 스님이 더욱 돋보여 보였다.

 

각초스님은 오래전부터 한국의 젊은 불자들에게 한국 고유의 선을 전수하여 방황하는 젊은이들에게 본래 성품을 찾는데 도움을 주겠다는 생각을 여러 차례 밝힌 바 있다. 전남 곡성군 봉두산(753m) 자락에 위치한 태안사는 신라 경덕왕(742) 때 창건한 유서 깊은 고찰로 신라 말 개산조(開山祖)인 혜철국사(慧徹國師)가 구산선문의 하나인 동리산파(桐裏山派)를 일으킨 중심사찰이다.

 

절 살림이 좀 어렵기는 하지만 스님의 평소 소원대로 본격적으로 선을 가르칠 적합한 장소와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오래전 청화 큰스님이 주석하고 계실 때 법문을 들으러 멀리 서울에서 주말마다 내려왔던 곳이기도 해서 태안사는 기자에게도 낯설지가 않는 절이다.

 

스님 하시는 일을 어찌 말릴 수가 있겠는가? 그래도 그동안 마음의 고향처럼 툭하면 달려와 쉬어 가던 곳이기에 스님께서 미타암을 떠나는 것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

 

"아마 더 좋은 분께서 이 미타암을 채워주실 겁니다."

 

차방에서 잠시 기자와 차담을 나눈 스님은 후학들의 참선을 가르치기 위해 화엄사 선등선원으로 성큼성큼 걸어 내려갔다 

 

각초스님께서 애지중지 사용하던 미타암 차방 

 

스님의 빈자리를 더 좋은 분이 채워주실 것이라고는 하지만 각초스님이 떠난 미타암은 어쩐지 쓸쓸하고 썰렁할 것만 같다. 차방을 나와 경내를 한 바퀴 휘 도는데 물소리 바람소리가 더욱 마음을 산란하게 흔들어 놓았다.

 

산신각에 올라가 경내를 내려다보니 그동안 스님께서 일구어 놓으신 전각이 꽤나 넓고 우람하게 보였다. 스님 홀로 이만한 전각을 이루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릇은 비워야만 다시 채울 수 있다" 

 

산신각에서 내려다 본 미타암 전경 

 

다음날 새벽 아무도 없는 대웅전 법당으로 들어갔다. 법당에는 작은 부처님 한 분이 모셔져 있을 뿐 아무것도 없다. 그 흔한 탱화 한 점 없는 법당은 간결하기 그지없다. 선방스님의 검소한 마음이 그대로 전달되는 것 같은 법당이다. 부처님께 3배를 하고 <신묘장구대다라니>3독을 하고 나서 다시 금강경을 독송하고나니 마음이 좀 편안해졌다.

 

독경을 마치고 잠시 좌선에 들어있는데 공양주 보살님이 종을 쳤다. 아침공양을 들라는 신호이다. 컴컴한 새벽 공기를 가르며 공양간으로 내려가니, 저런! 매생이국까지 곁들인 정성스런 아침 밥상이 차려져 있지 않은가! 시장이 반찬이기도 하지만 미타암 보살님의 음식솜씨는 언제나 정갈하고 맛 또한 그만이다.

 

이제 미타암에서 밥을 먹는 것도 이게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겠다. 물론 다시 들릴 수도 있지만 스님이 아니 계시는 미타암을 다시 찾기란 쉽지가 않을 것 같다. 스님께서 말씀하시듯 세상사 모든 일이 다 인연 따라 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마 나도 이제 미타암과 인연이 다해 가는 모양이다.

 

"스님, 다음에는 더 큰 절로 가서 뵙겠습니다."

"그러세요. 다음엔 더 큰 절로 오세요. 허허."

 

작은 부처님 한 분 모신 검소한 대웅전 법당 

 

전화로 선등선원에 계신 스님께 인사를 드리고 미타암을 내려오는데 바람이 소나무 숲을 흔들며 우우 소리를 냈다. 저 바람처럼 훌쩍 마음을 비우신 각초스님! 절대로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가끔 머물곤 했던 사람도 이처럼 미련과 아쉬움이 남는데, 스님인들 어찌 아쉽지 않겠는가? 통째로 내려놓고 마음을 비우는 스님의 그 마음을 조금이라도 닮아가야 할 텐데 그게 그리 쉽지가 않다.

 

"그릇은 비워야만 다시 채울 수 있지요."

 

스님께서 늘 하시던 말이다. 요즈음 어지러운 시대에 우리가 깊이 새겨들을 말이다. 내려놓을 때 마음을 비우고 내려놓을 줄 알아야 홀가분하게 무거운 짐을 덜 수 있다는 것이다. 말하기는 쉬우나 실천은 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멀리 노고단에는 흰 눈이 하얗게 쌓여 있다. 운수납자(雲水衲子)! 스님들은 하늘에 흘러가는 한 조각구름처럼, 계곡에 흐르는 물처럼 떠다닌다고 하더니 각초스님은 이제 정말 저 구름을 타고 바람처럼 정든 미타암을 훌쩍 떠나시려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