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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성태안사 일주문]곡성 태안사로 가는 길

찰라777 2015. 4. 16. 10:44

 

▲곡성 태안사 일주문

 

 

 

 

멀고도 깊은, 곡성 동리산 태안사로 가는 길

 

 

! 태안사 일주문 주련이 활처럼 튕겨 내 마음 깊이 다가온다.

 

歷天劫而不古(역천겁이부고)

亘萬歲而長今(긍만세이장금)

천겁 세월이 지나도 옛 되지 않고

수 만년을 뻗쳐도 항상 지금이네

 

 

 

 

 

▲일주문 후면

 

 

▲태안사 옛길

 

 

 

 

대중교통을 이용한 길, 연천-서울-목포-순천-구례-태안사...

 

곡성 태안사로 가는 길은 멀고도 길었다. 410, 우리나라 최전방 연천에서 출발하여 서울에서 하루 밤을 자고 다음날 조카의 차를 타고 목포로 갔다. 목포로 가는 이유는 무안군 삼향면 오룡산 자락에 있는 조상의 산소에 시제를 모시기 위해서였다. 당초에는 기차를 타고 가려고 했는데, 조카가 차를 몰고 가니 함께 가자고 하기에 함께 동석을 했는데, 자동차가 어찌나 밀리던지 우리나라에 있는 자동차는 모두 나온 느낌이었다. 그런데다 조카의 차가 펑크가 나서 신간 인터체인지에서 나가 정비소에 들려 자동차 바퀴를 바꾸어야 했다.

 

 

▲용포 조상님 묘소

 

목포까지 6시간이 걸렸다. 12시부터 2시까지 문중 식구들과 함께 조상님께 정성스럽게 시제를 모시고 나서, 오후 235분 목포 터미널에서 순천행 버스를 탔다. 버스요금은 9,000. 2012년도에 개통 된 목포 광양 간 10번 고속도로를 타보긴 처음이다. 남해바다가 숨바꼭질을 하듯 나타났다간 숨곤 했다. 아스라하게 펼쳐진 남해의 낮고 작은 섬들, 그리고 구릉처럼 다정하게 다가오는 산그런 풍경을 구경하며 가다보니 어느덧 순천에 도착했다. 오후 4, 목포에서 순천까지는 1시간 반이 걸린 것이다.

 

순천에서는 아내의 초등학교 동창회가 열린다고 했다. 서울에서, 목포에서, 광주에서, 대전에서전국에 흩어진 일로초등학교 36회 동창들이 순천으로 다 모인다고 했다. 아내는 일로초등학교 36회인데 동창회가 열릴 때마다 36회 동창회장이 나에게도 귀빈(?)으로 참석을 해달라고 별도로 초청장을 보낸다. 나는 아내 덕분에 해마다 일로초등학교 36회 내빈으로 참석을 하는 호사(?)를 누리고 있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고역이기도 하지만, 아픈 아내 혼자 보낼 수도 없어 거의 매년 참석을 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을 하면 별 볼일 없는 사람을 귀한 존재로 남으로부터 초청을 받는 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불러 줄 때 부지런히 참석하는 것이 사람의 도리이기도 하다.

 

▲일로초등학교 36회 동창회 초청장

 

 

아내는 서울에서 전세버스를 타고 순천에 이미 와 있었다. 전화를 걸었더니 정원박람회장을 구경하고 있다고 했다. 일로초등학교 36회 동창회는 기수동창회 모임으로는 가장 잘 운영하고 있어 일로초등학교 전체 동창회 롤 모델이 될 정도로 잘 모이고, 잘 놀고, 화합이 잘되는 모임이다. 심지어는 다른 기수에서 어떻게 동창회를 운영하는 지 밴치마킹을 할 정도이다.

 

나이가 거의 70을 전후한 동창생들인데 남녀가 반반 모이는 것 같다. 이 모임에는 나상문 씨라는 독보적인 총무가 있다. 그가 매년 동창회를 기획을 하고, 주선을 하며, 연락을 취하고 있다. 올해로 31번째 모임이이라고 하는데 한해도 걸르지 않고 매년 모임을 하고 있다. 그가 있는 한 일로초등학교 36회 동창회는  운영이 잘 될 것 같다. 이번 모임은 순천에 거주하는 김영애 동창생이 주선을 했는데 순천의 <순천만 에코촌 유스호스텔>에 숙소를 정하고, 동창회와 저녁회식은 동부웨딩문화원에서 개최를 하였다.

 

 

▲일로초등학교 36회 동창회 모임 장소인 순천 동부웨딩문화원에 걸린 프랑카드

 

▲동창회에 앞서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칠순을 맞이한 동창생들의 축하 케이크 커팅

 

 

 

▲에코촌 숙소에서

 

나는 이번에도 내빈으로 소개를 받고 인사말을 했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관계가 중요하다.  인간에게 가장 힘든 것은 나이가 들수록 외로워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동창회는 매우 화기 애애한 분위기였다. 그 옛날 개구명을 끼어 다니며 소꼽장난하고 놀던 시절로 돌아간 분위기다. 어떤 사람들은 소꼽장난하던 때처럼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웨딩마치 흉내를 내기도 했다. 아무튼 나는 아내 덕분에  먼 추억으로 회귀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아내는 동창생들과 함께 에코촌에서 묵고 나는 순천에 거주하고 있는 아내의 동창생 집에서 그의 남편 박종문씨와 하루 밤을 묵었다.

 

다음날은 아내의 동창생들과 함께 여수로 갔다. 마음 같아서는 혼자서 태안사로 먼저 가고 싶은데 아내가 함께 가자고 하니 어쩔 수 없었다. 덕분에 여수해상케이블카를 타기도 했다. 1간도 넘게 기다려 탄 여수해상케이블카는 아시아에서 홍콩, 싱가포르, 베트남에 이어 네 번째로 바다 위를 통과하는 케이블카라고 했다. 육지와 돌섬을 연결하는 케이블카는 투명한 바다를 들여다보며 남해의 절경을 관망할 수 있지만, 타는 과정, 기다리는 시간, 운영시스템이 형편없어 느낌이 별로 좋지 않았다.

 

 

▲바다 위를 출렁거리며 가는 여수 해상케이블카

 

 

여수에서 다시 순천으로 돌아온 뒤, 본의 아니게 아내의 동창생들과 어울려 점심을 먹고, 순천버스터미널에서 태안사로 가기 위해 구례로 가는 버스를 탔다. 처음에는 곡성으로 가는 버스표를 끊었는데, 버스가 하루에 몇 번 밖에 없어 1시간 반을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스마트 폰으로 태안사 가는 길을 검색해 보니 웬걸, 구례에서 태안사로 가는 거리가 곡성에서 가는 것보다 배나 가까웠다. 순천에서 구레로 가는 버스는 자주 있었다. 곡성버스표를 물리고, 구례로 가는 버스표를 샀다.

 

버스를 타고 구례로 가는 길에 아내가 태안사에 미리 와 있는 월명수 보살에게 전화를 했다. 구례까지 마중을 좀 나와 달라고. 왜냐하면 구례에서 태안사로 가는 대중교통은 압록에서 내려 다시 버스를 갈아타야 하는데 하루에 몇 번 없어 타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순천에서 구례까지는 40분이 걸렸다.

 

 

▲옛스런 풍취를 느끼게 하는 구례버스터미널

 

 

구례! 3년 전에 내가 살았던 땅이 아닌가? 터미널의 예스런 풍경도 정겨웠다. 멀리 노고단이 할머니의 품처럼 아늑했다. 구례의 어머니의 자궁처럼 아늑한 땅이다. 그래서 구례는 내게 항상 그립고 가고 싶은 땅이다. 10여분을 터미널 대합실에 쪼그리고 앉아 기다리고 있으니 월명수 보살이 남편 대원거사와 함께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오메, 여그서 만나니 겁나게 반갑네 잉~”

 

서울에서 늘 만나는 사람이지만 구례에서 뜬금없이 만나게 되니 반가울 수밖에 없다. 우리는 산토리니 블루 색깔을 한 대원거사의 날렵한 아반테를 타고 태안사로 향했다. 굽이굽이 섬진강을 딸 가다가 압록에서 좌측으로 꺾어져 들어가니 보성강이 연방죽처럼 펼쳐졌다. 보성군 일림산에서 발원한 보성강은 120km를 흘러 전라선 압록역 부근에서 섬진강으로 유입된다.

 

 

민족시인 조태일의 시심이 흐르는 곳

 

 

압록에서 18번 지방도로를 따라 가다가 죽곡면 유봉리 삼거리에서 좌측으로 난 보성강을 건너는 다리를 지나간다. 이 길은 복숭아 산지로 유명한 월등으로 넘어가는 길이다. 그 길 왼 편에 <조태일 시학기념관>이란 이정표가 보인다. 조태일 시문학기념관은 민족시인 조태일의 유품과 작품 등 2000여점이 전시되어 있다. 최남선의 <백팔번뇌>와 <오뇌의 무도> 등 희귀본까지 전시되어 있다니 시간을 내어 꼭 들러볼 일이다.

 

태안사 대처승의 아들로 태어난 조태일은  <아침 선박>, <식칼론>이란 시집을 발간한 한국시의 기교주의를 비판하고, 민중적 감정과 민중적 언어를 시로 결합한 민중시인이다.  삼선개헌과 유신선포 암흑기에도 강직한 시정신으로 <국토>연작을 발표하기도 한 그는 일신의 영달에만 집착하는 높은 분들을 향해서 매서운 질타를 가하기도 했다. 

 

야윈 팔다리일망정 한껏 휘저어
슬픔도 기쁨도 한껏 가슴으로 맞대며 우리는
우리의 가락 속을 거닐 수밖에 없는 일이다

버려진 땅에 돋아난 풀잎 하나에서부터

조용히 발버둥치는 돌멩이 하나에까지
이름도 없이 빈 벌판 빈 하늘에 뿌려진
저 혼에까지 저 숨결에까지 닿도록 -조태일의 '국토' 중에서-

 

 

농로처럼 생긴 좁은 길을 십 여리를 가다가 원달리에서 다시 좌회전을 한다. 여기서부터는 비포장도로다. 태안사는 깊고 먼 곳에 위치하고 있다.

 

▲태안사로 가는 비포장도로

 

 

드디어비포장도로 끝에 <동리산 태안사>(桐裏山 泰安寺)’라고 쓰인 일주문이 나온다. 지금은 봉두산(鳳頭山 753m)이라 부르는 데, 태안사를 둘러싸고 있는 산세가 봉황이 즐겨 앉는 오동나무 줄기 속처럼 아늑하다고 해서 동리산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이곳에 있는 동안 한 번 올라보아야지 다짐하며 일주문을 들어선다.

 

 

▲태안사 초입에 세로 세워진 일주문

 

 

절 초입에 세워진 일주문에 나중에 건립을 한 것이다. 그곳에서 능파각을 지나 태안사 옛길로 접어들면 진짜 태안사 일주문이 나타난다. 전남유형문화재 제83. 1683(숙종 9)에 각현선사가 중수하였다는 태안사 일주문은 다듬어지지 않는 원목을 사용하여 팔각기둥을 세웠고, 일주문 전후에 3, 측면에는 1구의 공간포가 받치고 있다. 화려한 단청, 상부의 용머리 장식이 한층 옛 풍취를 느끼게 한다. 19506.25 전쟁 때 다른 전각은 불타 없어졌지만 이 일주문과 능파각은 소실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다.

 

! 다시 일주문 주련이 활처럼 튕겨 내 마음 깊이 다가온다.

 

歷天劫而不古(역천겁이부고)

亘萬歲而長今(긍만세이장금)

천겁 세월이 지나도 옛 되지 않고

수 만년을 뻗쳐도 항상 지금이네

 

옛 도인들은 시공을 초월하여 살아왔기에 몇 천겁을 지나도 옛날이 아니고, 수 만년을 앞으로 가도 항상 지금에 살고 있으렷다! 그래 오늘처럼만 항상 살아간다면 내 인생의 무에 어려움이 있을꼬?

 

꼬박 23일의 시간을 걸려 최전방 연천에서 이곳 동리산 태안사에 이르렀다. 대중교통을 타고 온 긴 시간이 옛 되지 않고, 오늘 지금 새롭게 보이는 태안사에 이르렀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있겠는가?

 

아아, 이제 승과 속을 가르는 일주문에 들어선다. 

나는 왜 이 절문을 들어서는가?

이 절은 신라시대 혜철스님이 일으킨 구산선문의 동리선풍이 면면히 흐르고,  동리산파 3조인 국사 광자대사 윤다의 선풍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으며, 근세 드물게 생불이라 일컫는 청화 큰스님께서 10년간 주석했던 곳이기도 하다. 또한 나와 인연이 깊은 각초스님(전 화엄사 선등선원장)이  최근 이 절에 주지로 취임을 하여 선풍을 일으키고 있다.

 

사람은 인연따라 산다고 했던가? 나는 청화 큰스님이 주석하고 있던 1985년 청화스님의 법문을 듣기위해 서울에서 이곳 태안사까지 주말이면 내려오기도 했다. 일주문을 들어서니 30년 전추억이 가슴 깊이 안겨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