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방랑/일본여행

일본인들이 '학문의 신'으로 모시는 왕인박사묘를 가다

찰라777 2018. 4. 20. 18:55

 

나는 영암 월출산이 바라보이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내가 태어난 동네는 남도의 끝자락 무안군 삼향면에 소재한 용포라는 마을이다. 내 고향 용포는 마을 뒤로는 오룡쟁주 오룡산이 용틀임을 하며 감싸고 있고, 동쪽으로는 월출산이, 그리고 북쪽으로는 멀리 승달산에 이은 국사봉이 바라보이는 아름다운 마을이다. 지금은 오룡산 자락에 전라남도 도청이 들어서 있어 어린 시절 시골스런 풍경은 많이 변해버렸다.

 

▲노령산맥 끝자락에 신선처럼 우뚝 솟아 있는 월출산

 

▲벚꽃이 만개한 영암 왕인박사 탄생지. 매년 왕인박사춘향대제축제가 열린다.

 

오룡산의 서쪽으로는 유달산이 학의 나래를 펴듯 병풍처럼 둘러져 있다. 그리고 동쪽으로는 월출산이 정점을 찍으며 마치 신선처럼 우뚝 서 있다. 월출산은 역사에 기리 남을 위대한 인물인 왕인박사와 도선국사가 태어난 곳이다.

 

고향 마을에서 영산강을 건너 아련하게 솟아올라있는 월출산은 어린 시절부터 꿈과 희망을 키워왔던 동경의 대상이었다. 나는 아침에는 월출산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밤에는 월출산에서 솟아오르는 달을 바라보며 유년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월출산은 빤히 바라보이면서도 쉽게 갈 수 있는 산이 아니었다. 그 당시 월출산을 가려면 목포항구에서 배를 타고 용당 나루를 건넌 다음 다시 버스를 타고 가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왕인박사가 태어난 영암 구림마을을 고등학교 시절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가 볼 수 있게 되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영산강 하구원에 다리가 놓이고, 최근에는 서해안고속도로 끝에서 광양으로 이어지는 남해고속도로가 개통되어 월출산은 마음만 먹으면 한달음에 갈 수 있는 곳이 되었다 

 

 

▲신선처럼 우뚝 솟아 있는 월출산자락 

 

월출산 자락 영암군 군서면 구림리 왕인박사 유적지에 들어서면 왕인박사를 기리는 여러 가지 유적들이 들어서 있다. 왕인박사의 유적을 전시한 전시관이 있고, 왕인박사의 탄생지인 성기동 집터, 왕인박사가 서재로 이용했다는 책굴, 공부를 했다는 옛 서당도 있다. 또한 박사가 일본으로 떠날 때 범선을 탔던 상대포가 영산강(하구원 둑을 막기 전에는 바다였다)으로 이어져 있다.

 

유적지의 백제문을 통과하여 학이문을 지나면 왕인박사 영정과 위패를 모셔 놓은 사당이 있다. 또한 유적지에는 오사카 히라카타 시에 있는 왕인박사의 묘를 실제크기로 제작한 가묘도 설치해 놓고 있다. 그런데 왕인박사의 실제 무덤은 한국이 아닌 일본 오사카 히라카타 시에 있다.

 

그 후에도 영암에 위치한 왕인박사 유적지는 몇 차례 답사를 하였지만, 일본에 위치한 유적지는 고희를 넘긴 지금까지 답사할 기회가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 오사카를 여행하는 도중 우연치 않게 왕인박사의 묘와 왕인박사가 크게 영향을 끼친 아스카문화 유적지를 답사할 수 있는 행운의 기회를 갖게 되었다.

 

일본 히라카타시 왕인박사묘를 가다

 

나는 오사카에 머무는 동안 도톤보리 인근에 위치한 호텔 나니와(Hotel Naniwa)에 머물고 있었다. 마침 호텔 나니와 박총석 사장(현 오사카 한국상공회의소부회장)과는 오랜 친분이 있었는데, 그가 오사카에 온 김에 왕인박사 묘와 아스카문화 유적지를 한 번 가보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하였다. 기회는 기다리는 자에게 온다고 했던가? 나는 두말 할 것 없이 즉시 그의 제의를 수락했다.

 

▲오사카 도톤보리 인근에 위치한 호텔 나니와

 

어린 시절 왕인박사가 태어난 월출산이 동경의 대상이었듯 한국보다는 일본에서 더욱 유명한 왕인박사 묘와 유적지는 내가 꼭 가보고 싶은 곳 중의 하나였다. 오사카 호남향우회 회장을 지낸 박총석 사장 역시 고향이 월출산이 바라보이는 나주군 동강면인지라 남달리 왕인박사에 대한 관심이 지대한 것 같았다.

 

드디어, 47일 아침 10, 나는 박 사장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오사카를 출발하여 히라카타 시로 향했다. 히라카타 시는 오사카 부에 속하지만 오사카에서 교토방향으로 32km 정도 떨어진 중간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왕인박사 묘소는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찾아가기가 만만치 않은 곳이다(소재지 : 오사카(大阪)부 히라카타(枚方 )시 후지사카히가시(蕂阪東)2).

 

 

▲왕인박사묘역에 설치된 안내문

 

▲오사카에서 히라카타시 왕인박사료로 가는 길

 

오사카에서 전철을 이용할 경우 난바역에서 출발하여 다시 JR도자이선 ·갓켄도시선을 갈아타고 나가오(長尾)역에서 내려 거리상으로는 걸어서 15분 정도이지만 그 어디에도 이정표가 없어 찾기가 쉽지 않다. 몇 번 가보았다는 박 사장도 가는 도중에 여러 차례 전화를 한 끝에 가까스로 왕인박사 묘소에 도착 할 수 있었다. 히라카타 시는 작고 조용한 시골마을이다. 허지만 옛날에는 이 일대가 고대국가 형성의 요람으로 7세기경에는 군사 외교적으로 매우 중요했던 가와치(河內) 국의 영토였다고 한다.

 

▲왕인박사묘에서 왕인공원으로 가는 길

 

왕인박사 묘에 도착하여 제일먼저 눈에 띄는 것은 눈에 익은 건축양식인 '백제문'이었다. 한옥 기와에 백제 전통양식으로 세운 백제문은 200610월 한일 양국의 문화친선협회가 건립한 것이라고 한다. 백제문 입구에는 일본어로 된 주변 안내도와 함께 오사카 사적 전 왕인묘에 대한 자세한 안내 게시판이 세워져 있다. 왕인묘에서 '왕인공원'까지 가는 길도 자세히 안내되어 있다.

 

  ▲백제문

 

백제문 앞에는 '오사카부 지정 사적 전 왕인묘'라는 입석이 한자로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이 입석은 19923월 오사카 교육위원회와 히라카타시 교육위원회가 공동으로 세운 것으로 일본이 왕인박사에 대하여 교육적으로도 큰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백제문 앞에 설치된 입석 

 

또 백제문 왼쪽 철제 표지판에는 전왕인묘와 백제문에 대한 자세한 안내가 한글과 일본어로 소개되어 있다. 그 중 왕인박사에 대한 업적에 대한 안내를 보면 다음과 같다.

 

"왕인박사는, 1600년 전 백제 아신왕(阿莘王) , 일본국 응신천황(應神天皇)의 초청을 받아, 천자문과 논어를 갖고 일본에 오시어, 황실의 사부로, 학문과 경사(經史)를 전수하시어, 일본문화의 원류인 비조(飛鳥, 아스카)문화의 시조라고 전해지고 있으며, 위대한 학성(學星)으로 숭앙을 받고 있다."

 

▲전왕인묘 안내판

 

또 왕인묘가 1938년 오사카 부 사적으로 지정되었고, 19885월 시적지정50주년을 기념하여, ()한일문화친선협회가 묘전에 제단·향로·화병을 봉헌하였다는 안내문도 게재되어 있다. 한일문화친선협회 창립 30주년을 기념하여 설립된 '백제문'은 자재와 목재, 기와, 돌 등을 옛 백제 땅인 전라남도에서 운송해와 건축을 했다고 한다. 기와에는 무궁화 꽃과 백제왕인상이 새겨져 있다

 

백제문을 지나면 넓은 평지에 왕인묘소가 나온다. 묘소에는 아주 오래된 것으로 보이는 '박사왕인지묘(博士王仁至墓)'라고 쓰인 해서체 비석이 둥근 자연석 뒤에 놓여 있다. 묘 앞과 상석, 그리고 묘비 앞에는 누군가 꽂아 놓은 생화가 꽂혀 있다. 어린 시절, 월출산을 바라보며 신선처럼 여겨지며 동경했던 왕인박사의 묘 앞에 서서 참배를 하니 만감이 교차해 온다. 천년도 훌쩍 넘은 시공을 초월하여 나는 왕인박사의 혼과 숨결을 느끼고 있었다

 

▲왕인박사묘

 

원래 17세기 초엽까지 왕인박사의 묘는 산중에 오니묘(귀신묘)라고 불리는 한 개의 자연석이 있었고, 이 자연석을 만지면 치통이나 학질에 영험이 있었다고 알려졌다고 한다. 아마도 지금 묘비 앞에 있는 자연석이 그 신통한 돌인 모양이다. 영암군 문화시설사업소 홈페이지에는 왕인박사 묘에 대한 내력을 다음과 같이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후지사카(藤阪)의 산중에 귀신묘라고 불리는 1개의 자연석이 있고 치통이나 학질에 영검이 있었다. 1616년 가도노(禁野)마을 와다데라((和田寺)의 도슌(道俊)은 왕인의 자손이라고 말하고, '왕인 분묘 내조기'를 쓰고, 후지사카(藤阪)마을 오하카다니(御墓谷)의 귀신묘는 왕인묘가 변했던 것이라고 기록했다.

 

그 후 1731년 교토의 유학자 나미카와 고이치로((竝川五一朗)는 도슌(道俊)의 책을 근거로 이 돌을 왕인묘로 숭경토록 당지의 영주 구가이 쇼준(久貝正順)에게 진언하고 돌의 뒤쪽에 묘비를 세웠다. 이렇게 하여 귀신묘는 왕인묘로 변했다.

 

▲귀신묘라고 일컫는 자연석과 왕인박사 묘비

 

1827년 아리스가와(有栖川)궁가의 부하 이에무라 마고에몬(家村孫衛門)은 이 경내에 아리스가와(有栖川)궁 염필이 된박사왕인분의 비석을 건립했다. 1938511일 현창 규칙에 의한 사적으로 지정, 1993년 문화재보호 조례에 의한 사적에 지정했다. 왕인박사는 4세기말에 백제에서 도래하여 논어10천자문1권을 가져오셨다. 고대부터 학문의 선조로서 숭배됐다. 자손은 문필로 조정에 섬기고 하비기노(羽曳野)시 후루이치(古市) 사이린지(西琳寺) 부근에 거주하고 있었다.'<자료: 영암군 문화시설사업소 자료 일본왕인박사묘>

 

▲1827년에 세워진 왕인박사분

 

'왕인박사 분묘 내조기'를 저술한 도슌은 자신이 왕인의 후손이라면서 오니묘는 와니묘에서 전와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일본에서는 '왕인''와니'로 읽고 있다.

 

일본 고대 역사서인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에도 왕인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왕인박사를 고사기에는 '와니기시', 일본서기에는 '왕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한편 일본서기에는 왕인박사에 대한 기록을 다음과 같은 상술하고 있다.

 

'응신(應神) 15(404?) 가을 8월 임술삭 정묘에 백제왕이 아직기(阿直岐)를 보내 양마 2필을 바쳤다. 그것을 카루()의 사카노우에(坂上)에 있는 마구간에서 기르게 하고 아직기로 하여금 사육을 관장케 하였다. 그 말을 기른 곳을 우마야사카(廐坂)라고 한다. 아직기는 또한 능히 경서를 읽었다. 그래서 태자 우지노와키이라쯔코(菟道郞稚子)의 스승으로 삼았다.

 

천황은 아직기에게 "그대보다도 나은 박사가 또 있는가" 하고 물었다. 그는, "왕인(王仁)이라는 자가 있는데, 이 사람이 뛰어납니다"고 대답했다. 이때 카미쯔노케누노키미(上毛野君)의 조상인 아라타와케(荒田別)와 칸나키와케(巫別)를 백제에 보내어 왕인을 불렀다. 아직기는 아직기사(阿直岐史)의 시조이다.

 

16(405?) 2월에 왕인이 도래하자 그를 태자 우지노와키이라쯔코의 스승으로 삼았다. 태자는 여러 전적을 왕인에게서 배웠다. 통달하지 않은 책이 없었다. 왕인은 후미노오비토(書首) 등의 시조이다<일본서기(日本書紀) - '()'의 역사가 아닌 '일본국(日本國)'의 역사를 쓰다 (동양의 고전을 읽는다, 2006. 5. 22., 휴머니스트)>.

 

  • *왕인박사 구적
  • 소재지 : 오사카(大阪)부 오사카(大阪)시 기타(北)구 오요도나카(大淀中) 3-1-23
  • 연락처 : 기타(北) 구청 ☎ 06-6313-9986(대표)
  • 왕인 박사는 응신 천황 시대에 백제에서 논어, 천자문을 갖고 도래하여 일본에 처음으로 유학을 전했다고 하는 귀화인이다. 도일한 왕인박사가 살았던 곳이 오니(大仁)의 땅이라고 말해지고 이전은 그가 살고 있다고 하는 땅(오요도나가(大淀中)3)에 왕인(和邇)신사란 신사가 있다.

    (영암군 문화시설사업소 홈페이지에서 가져왔음)  

 

 

 

 

 

 

왕인에 대한 저명한 기사다. '서수(書首)'는 최고학자를 일컫는 관직으로 보인다. 이러한 기록들은 왕인이 당시 얼마나 위대한 인물이었고, 일본문화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었는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왕인박사 묘역에는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심은 기념식수(199995), 전남 영암군수의 무궁화 기념식수(2008229) 표지판도 보인다. 묘역 왼쪽에는 정자도 하나 세워져 있는데, 정자에는 전 왕인묘의 사적지정 60주년을 기념을 축하한다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격려문(199859)이 걸려있다. 왕인박사를 기리는 정신도 있겠지만 저마다 자신의 족적을 남기려는 의도도 포함되어 있으리라.

 

 

▲정자

 

▲김종필 전 국무총리 기년식수와 김대중 전 대통령 60주년 기념 축하문

 

정자 옆에는 왕인박사가 가져왔다는 '논어''천자문'을 모방한 책이 동판으로 제작되어 설치되어 있다. 그 위 좌측 작은 동산에는 '박사왕인분(博士王仁墳)'이라고 새겨진 비석과 제단이 석등과 함께 세워져 있다. 1827년 아리스가와(有栖川)궁가의 부하 이에무라 마고에몬(家村孫衛門)가 세운 비석이다. 어느 곳이 실제 왕인박사의 무덤일까? 그러나 어느 곳이 실제 무덤인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곳이 왕인의 무덤이라고 추측할 뿐이다.

 

▲천자문과 논오 동판

 

 

일본에서 학문의 신으로 모시고 있는 왕인박사

 

도대체 왕인박사는 일본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기에 그토록 일본인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가? 이는 고대 일본의 역사서에 잘 기록되어 있다. 일본 역사서 '고사기''일본서기'에는 왕인을 '서수(書首)와 문수(文首)의 시조'라고 적고 있다. 이는 '책과 글을 다루는 전문직의 우두머리()'라는 뜻이다. 751년 편찬된 일본 최초의 한시집 가이후소(懷風藻)에서는 '왕인은 왜어(倭語)의 특질을 훼손하지 않고서 한자를 이용해 왜어를 표현하는 방법을 개발했다'고 표현해 그가 일본 문자 '가나(假名)'를 창안했음을 명시하고 있다.(왕인박사 사진은 영암군 문화시설사업소 홈페이지에서 가져왔음) 

 

왕인박사는 고대 일본 귀족들이 짓거나 암송을 했던 와카(和歌)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905년에 발간된 와카집 '고킨아카슈(古今和歌集)에는 '난파진에는, 피는구나 이 꽃이, 겨울잠 자고, 지금은 봄이라고, 피는구나 이 꽃이'라는 와카를 소개하면서 왕인박사가 지은 최초의 와카라고 적고 있다. 이런 내용을 살펴 볼 때 왕인박사를 뿌리로 하여 일본은 유학을 널리 보급하고 학문교육의 기틀이 되었음을 잘 알 수 있다.

 

또한 왕인은 도일할 때 대동했던 한단야공(韓鍛治工오복사(吳服師양주자(釀酒者도기공(陶器工)45명의 기술자들을 활용하여 각 분야의 전문적인 기술의 전수에 힘을 기울였다. 영농 방법을 개발하여 생산력을 증대시키고, ()의 사육을 장려하는 동시에 교통과 운수체계를 정비하는 데에도 기여했다.

 

왕인은 학문과 윤리도덕을 깨우칠 뿐 아니라 새로운 전문기술을 전수하여 일본의 고대산업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왕인은 어느 것에도 통달치 아니함이 없었기 때문에 일본 문화사상 성인처럼 신격화되기도 했다. 이러한 위대한 업적으로 그는 일본에서 한국의 '세종대왕'에 비견할 수 있는 위대한 인물로 추앙받고 있다.

 

왕인박사가 세상을 떠난 뒤, 하내국(河內國)에 정착 하였던 그의 후예들도 크게 번성하고 팽창하였다. 박사 왕인의 정신과 위업을 이어받은 그들은 문화면은 물론이요. 정치·경제·기술·불교계 등 각 분야에서 눈부시게 활약하여 일본 아스카문화를 일으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일본인들이 흠모하는 교키(行基·668749)스님도 왕인박사의 후손으로 일본 땅에 한국불교를 전파한 큰 스님이다.

 

왕인묘역에서 걸어서 약 15여분 되는 곳에는 왕인공원이 있다. 이곳은 풀장, 테니스 코트 등 히라카타시 시립 다목적 공원시설이다. 히라카타 시는 왕인박사의 정신을 기리는 의미에서 이 공원의 이름을 '와니코엔(王仁公園)'으로 칭하고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묘원에서 왕인공원으로 가는 길에는 왕인박사가 전했다는 천자문이 새겨진 조형물이 알아보기 쉽게 설치되어 있다.

 

▲천자문

 

▲왕인묘역

 

나는 왕인묘소앞 길가에 늘어놓은 천자문을 바라보며 내 고향 용포마을 회상하고, 영산강 건너 신선처럼 우뚝 서 있는 월출산을 상기시켜본다. 지금 영암 왕인박사 유적지에서는 벚꽃이 만개하여 왕인박사를 기리는 '왕인박사춘향대제'(2018.4.5~4.8)가 한창 열리고 있다. 이 춘향대제에는 매년 일본 히라카타시에서도 일본방문단이 참석하여 참배를 히고 왕인박사를 기린다. 생전에 왕인박사도 그토록 가고 싶었다는 고향이다. 그러나 왕인박사가 탄생한 영암 월출산은 지금도 변함없이 서 있지만 왕인박사는 가고 없다.

 

 

▲벚꽃이 만개한 영암 월출산자락 왕인박사 유적지

 

한국에서는 왕인박사에 대하여 뚜렷한 역사적인 기록이 없고 전설과 설화로 전해내려 오고 있지만, 일본 전역에는 왕인박사를 기리는 유적지가 오사카, 도쿄 등 30곳에 달한다. 특히 일본의 심장 도쿄 우에노공원에 일본인들이 세운 왕인박사비의 비문에는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어 왕인박사를 공자에 비견할 정도로 칭송하고 있다.

 

'공자는 춘추시대에 태어나 만고불후의 인륜과 덕을 밝혀 천하 만세에 유림의 시조가 되었다. 박사 왕인은 공자가 죽은지 760년 후 한국에서 태어나 일본 황실의 태자들에게 충신효제의 도를 가르쳐 널리 일본 국내에 전수하여 1653년 간 계승시켜오고 있다. 천고에 빛나는 박사 왕인의 위덕은 실로 유구 유대함이 그지없다'

 

일본인들이 한반도에서 건너간 도래인을 이토록 칭송한 예는 없다. 그뿐만 아니다. 일본에는 왕인박사를 모셔놓은 신사가 곳곳에 산재해 있다. 특히 왕인을 모시는 신사는 시험기도처로 각광을 받고 있어 시험철이면 학부형들이 대거 몰려들어 합격을 기원하는 기도를 한다. 왕인박사를 모시고 있는 규슈 태재부 천만궁 신사는 매년 600만 명 이상이 시험에 합격을 기원하기 위해 몰려든다고 한다. 이처럼 일본에서는 왕인박사를 인간을 뛰어넘어 학문의 신으로 모시고 있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왕인박사를 신사에 학문의 신으로 모시고

 각종 시험에 합격을 기원하는 참배객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왼쪽으로부터 왕인천만궁(사가현 간차키),야사키신사(오사카), (와니시타신사), 도키와신사(이바라기현)

(자료:영암군 문화시설사업소 홈페이지에서 가져왔음) 

 

왕인박사, 그는 고대 한류의 아이콘이었다. 일본 역사서인 고사기일본서기그리고 일본 전역에 산재한 다양한 왕인박사에 대한 역사적인 기념시설들이 이를 증명하고도 남는다.

 

 

*바쁘신데도 어려운 시간을 내어 왕인박사묘까지 손수 운전하여 하여 안내를 해주신 오사카 <호텔 나니와 Hotel Naniwa> 박총석 사장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이 글을 게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