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우리강산/전라도

지리산 법계사의 일출

찰라777 2009. 9. 24. 17:24

 

이 생각, 저 생각

 

지리산 법계사 반특이나 되어볼까?

 

▲해발 1450m, 지리산 법계사의 일출이 3층 석탑에 솟아오르고 있다.  

 

지리산 법계사로 올라가는 중산리 매표소에 허겁지겁 도착을 하니 오후 4시 10분이다. 그러나 매표소 국립공원 직원은 4시 이후에는 지리산 입산이 금지되어 있다고 하며 입산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는 일. 법계사의 보살님에게 전화를 걸어 입산을 허가하도록 청을 드렸다. 천왕봉을 올라가는 것이 아니고 법계사에 기도를 가는 신도라고 하며. 하여간 여러 번의 전화와 우여곡절 끝에 우리는 법계사로 가는 산행을 허락받았다.

 

오후 5시. 중산리 매표소에서 자연학습장까지 가는 셔틀버스를 탔다. 버스 운전기사의 말로는 빨리 올라가야 어둡기 전에 법계사에 도착을 할 것이라는 것. 전등은 있느냐, 1시간 30분 만에 도착을 할 수 있겠느냐고 하며 걱정을 해준다. 왜냐하면 산사의 어둠은 일찍 찾아들기 때문이다. 버스에서 내려 나는 아내와 단둘이서 법계사로 이어지는 산길을 걷기 시작했다.

 

법계사는 이어지는 길은 우리 두 사람 뿐. 아무도 없었다. 양옆에 나무들만이 침묵을 지키며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 뿐. 우리는 마치 속계를 벗어나 법계의 세계로 빠져 들어가는 느낌을 받으며 산새가 간간히 울어주는 늦은 오후의 길을 재촉해서 걸어갔다.

 

법계와 속계! 대저 법계란 무엇일까? 법계와 속계의 경계는 어디에 있으며, 그 차이는 무엇일까? 법계, 우주 만법의 본체인 진여(眞如)의 세계, 차별이 없고, 지혜와 광명이 가득한 곳, 중생이 애타게 갈망하지만 도달하기 어렵다는 곳, '걸림이 없는 곳', 유토피아, 서방정토 극락세계, 무릉도원, 신선계 같은 곳, 법계는 지금 우리가 발붙이고 살아가는 이 지상에 있다 하는데, 그곳이 어디인가?

 

그렁저렁 생각을 하며 법계사로 가는 길을 재촉하는데 날은 점점 어두워진다. 중생은 하루에도 수십 번 다른 세상을 꿈을 꾼다. 세상이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 그 꿈은 더욱 강열하고 고통스럽게 우리를 사로잡는다. 중생이 원하는 세계는 과연 무엇인가? 돈과 권력을 움켜쥐고 원하는 대로 다 할 수 있는 것? 돈과 권력이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못한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중생은 권모술수와 계략, 사기, 정략적인 이합집산에 휘말려 동분서주 하고  있는 것이 속계의 현실이다.

 

그러나 하루 24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인생은 누구나 생로병사의 고통 속에서 한 치도 벗어날 수 없다. 아무리 잘나고, 잘살며, 불로장생을 누리고 싶어 하지만 생로병사의 올가미는 부메랑이 되어 어김없이 찾아든다. 육체는 언젠가 버리게 된다. 작금의 두 정치 거목이었던 노무현과 김대중이 생로병사의 늪 속에서 몸부림치다가 저 세상으로 사라져 간 것을 바라보며 인생무상과 더불어 많은 것을 느끼게 해준다. 해방이후 경제계의 거두인 이병철과 정주영이 돈이 없어서 세상을 떠났겠는가?

 

그렇다면 영원히 죽지 않는 방법은 없을까? 육체를 나라고 생각하는 집착을 버리면 영원히 죽지않는 도를 이룬다고 하는데... 참 되게 살아가며, 남을 위해 보시와 사랑을 아낌없이 주면 도를 이룬다고 하는데... 하루 24시간의 시간 중 우리가 참 나의 상태, 거짓 없이 참되게 살아가는 나의 모습은 몇 시간이나 될까. 잠자는 시간, 근심, 번뇌와 걱정, 체면 차리는 시간, 남을 이기기 위해 궁리하는 시간, 병고에 시달리는 시간을 제하고 나면 내  진짜의 삶은 몇 시간이나 될까? 내 기준으로 보더라도 허둥지둥하다가 결국 하루를 보내고 만다.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는 버나드의 쇼의 묘비명처럼 인생은 허둥지둥, 우물쭈물하다가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고 마는 것인 것을.

 

▲ 법계사의 일주문. 과연 일주문은 소계와 법계를 경계 짓는 문일까?

 

그렇게 야단법석을 떨며 안간힘을 쓰며 살아가지만, 법계의 눈으로 보면 세상살이는 아주 하찮은 소꿉장난 같다는 것에 지나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하, 말이 자꾸만 다른 데로 샌다. 법계사에 도착을 하니 오후 6시 45분, 1시간 45만에 2.8KM의 산길을 걸어온 샘이다. 오직 어둡기 전에 법계사에 도착해야 한다는 일념 때문에 잡념도 없고, 옆도 돌아볼 틈도 없이 앞만 보며 걷다보니 생각보다 빨이 온 샘이다. 1년 전에 심장이식을 한 아내, 은(銀) 고개를 넘은 내 나이에 비해서 말이다.

 

초가을 법계사로 오르는 길은 순탄치가 않다. 흙길로 생각해서는 오산이다. 법계사에 오르기까지 흙 한번 밟지 못할 정도로 돌길뿐이다. 울퉁불퉁한 바위와 급격한 경사, 나무뿌리와 꾸불꾸불한 길은 험난한 세파와도 같이 마음을 놓을 수가 없는 길이다. 하늘을 볼 새도 없이 걷다보니 이윽고 로터리 산장이 나오고 시인의 마을이란 푯말이 어울리지 않게 붙어 있다. 날은 벌써 어두워지고, 사진을 찍었더니 바람처럼 상이 흔들거리게 나온다.

 

해발 1450m란 이정표가 보인다. 그러니 20m쯤 더 올라가는 법계사는 해발 1470m쯤 될까? 숨이 턱이 차올랐지만 법계사의 일주문을 보니 반갑다. 일주문에 합장을 하고 경내로 들어서니 때마침 저녁 예불소리와 목탁소리가 경내에 가득하다. 종무소에 들려 배낭을 내려놓고 법당으로 가려고 하는데 전화를 받았던 보살이 질타를 한다. '왜 그렇게 늦었냐?" 고. 질타를 받을 만도 하다. 그러니 법계사는 아무나 출입이 허용되지 않는 우리나라의 최고 높이에 위치한 하늘 아래 첫 절이렷다.

 

▲법계사의 장독대. 돌로 눌러 놓은 장독대가 퍽 인상적이다. 법계에서도 먹고 살아야 한다.

 

"보살은 이 방에서, 거사님은 아래 화장실 옆방을 사용하시오." 또 다시 보살의 질타를 하듯 쩡 울린다. 하여간 그래도 재워주는 것 하나만으로 감사하게 생각을 하며 잠자는 기도금을 보살님에게 드리고 법당으로 갔다.  방아착! 모든 것을 털어버리고 법당에 꼬꾸라져 삼배를 올렸다. 스님의 목탁소리는 소낙비 내리듯 빠르고 경쾌했다. '신묘장구대다라니'가 목탁소리에 맞추어 끝없이 이어진다. 한 번 두 번, 세 번, 열 번… 나중에는 몇 번인지 모를 정도로 점점 빠르게 이어졌다.

 

다라니염불을 정신없이 하다가 종무소로 내려오니 8시다. 저녁을 거른지라, 시간이 늦어 공양을 달랄 수도 없고, 매표소 가게에서 사온 빵을 꺼내어 우유와 함께 먹으려고 하는데, 예의 법계사 보살이 보더니 조금은 누그러진 소리로 말한다. "밥과 김치를 드릴 테니 공양간으로 오세요. 원, 그렇게 늦게 오니 밥도 제대로 찾아먹지 못하지요." "아, 감사합니다."

 

 

▲쌀밥에 김치만 먹어도 꿀맛인데, 법계사에서도 고기에 담배를 피우는 중생이 있는 모양이다.

 

그저 감사하다는 말 밖에 나오지 않는다. 공양간에 들어가 따뜻한 쌀밥을 먹는 행운을 누리게 되었으니 부처는 이 중생을 버리지는 않고 거두어 주는 것일까? 김치에 쌀밥 한 그릇이 왜 이다지도 맛이 있을까? 시장이 반찬이라 이를 두고 한 말이렷다! "술, 담배, 고기 드시면 절대 안 됩니다. 즉시하산." 이란 표시가 붙어 있다. 술, 담배, 고기 안 먹어도 밥맛은 꿀 맛인데, 여기서도 그걸 먹는 사람이 있는 모양이다.

 

밥을 먹고 나니 8시 30분, 사방은 어둡고 산사는 조용하다. 아내는 위층에, 나는 화장실 옆에 달린 반 지하방으로 기어 들어갔다. 달리 할 일은 없다. 불을 끄고 잠을 자야 한다. 몸이 뚱뚱한 거사님이 어제 왔다고 하며 인사를 한다.

 

"저어, 잠잘 때 코를 무지 걸거든요. 좀 시끄럽더라도 이해를 좀 해주시기 바랍니다."

"코골이를 자장가로 아는 사람이니 걱정 놓으십시오."

 

그렇게 한 마디하고 불을 끄고 목침을 베고 잠을 청했다. 천안에서 왔다는 거사의 코고는 소리는 과연 그의 말대로 컸다. 드르릉! 드르릉! 이건 코골이 소리가 아니고 대패질 하는 소리다. 그러나 피곤에 지친 나는 몇 번 대패질 소리에 신경을 쓰다가 곧 잠이 들고 말았다.

 

 산사의 새벽은 빨리 찾아온다. 새벽 3시가 되니 벌써 도량석을 도는 목탁소리가 귓전을 때린다. 세면장으로 가 차가운 물로 세수를 하고 법당으로 올라가니 스님 두 분, 보살님 두 분이 기도를 하고 있다. 어쨌든 고요한 산사의 새벽은 좋다. 기도는 계속 이어지고 나는 목탁소리와 함께 명상에 들어간다. 절을 하고 다라니를 독경하고, 발원을 하고… 새벽 예불은 6시까지 이어진다.

 

 

초가을 날씨지만 새벽의 산사는 춥다. 춥지 않으려면 저절로 절을 해야 한다. 절이란 무엇인가? 우상에게 절을 하는 것인가? 부처에게 절을 하는 것인가? 우상도, 부처도 아니다. 절은 내 마음의 불성에 절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 절을 해보지 않는 사람은 착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 우상에게 절을 하느냐, 복을 달라고 절을 하느냐? 등의 착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 절은 내 마음을 한 없이 낮아지게 하려는 의식이다. 나를 비우는 작업이다. 일 배 이배 삼배, 저를 할수록 자신은 낮아지고 잡념은 없어진다. 108배를 하고 나니 몸이 덮다. 높은 곳에 있지만 마음은 한결 낮아진 기분이다. 겸수익! 자신을 낮추는 것이 이익이 있다고 하질 않았는가.

 

예불을 끝내고 밖으로 나오니 먼동이 터 오고 동녘에 붉은 기운이 점점 더 많아진다. 적멸보궁은 부처상이 없다. 법계사는 1500년 전 신라 연기조사가 전국을 두루 답사한 후 천왕봉에서 2km 떨어진 현재의 터에 절을 창건하고 부처님 사리를 봉안하였다. 용이 사라지고, 범이 웅크린 산세가 좌우에 들어서고 오직 동남쪽으로만 트여 있어 일출과 지기, 천기가 조화를 이루는 명당자리라는 것.

 

▲법계사에서 바라본 일출

 

보궁을 돌아 올라가니 거대한 바위가 우람하게 서 있고, 그 위에는 3층 석탑이 고색찬연하게 동트는 붉은 기운을 받고 있다. 이 탑은 일본의 후지산과 일직선상에 놓여있다고 한다. 예부터 "법계사가 일어나면 일본이 망하고, 일본이 일어나면 법계사가 망한다"고 전해오는 전설이 있다. 그래서 일본은 여러 차례 법계사까지 침입하여 절에 불을 지르다가 운봉전쟁에서 이성계의 활에 맞아 죽은 일화는 이 전설을 반증하고 있다.

 

더욱이 2005년 5월 3일, 2006년 10월 3일에 지리산과 법계사의 혈맥을 끊어 짓누르려고 박아놓은 쇠말뚝을 찾아내어 제거하게 되었다. 법계사에는 미사일처럼 생긴 쇠말뚝을 진열해 놓고 있는데, 쇠말뚝을 들어보려고 하는 꿈적도 하지 않는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이는 일본이 법계사가 흥하는 것을 얼마나 두려하는 증거이다.

 

▲지리산산과 법계사의 혈맥을 끊으려고 일본인들이 박아놓은 쇠말뚝.

 

석탑 좌측에 있는 단풍나무는 벌써 빨갛게 물들어 있어 가을이 깊어가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석탑 위에 서서 동녘 하늘을 바라보는데 점점 붉은 해가 솟아오르며 천지의 어둠을 밝혀준다. 아, 이 감동! 석탑과 바위에 서리는 아침 햇살은 남다르게 느껴진다. 이것이 법계의 세계인가! 자연의 장엄함은 그 무엇으로도 견줄 수가 없다.

 

두 팔을 벌려 가슴 가득히 아침 태양을 가득 안아 본다. 눈을 감으니 태양이 내 안에 비추이고 있다. 태양을 가슴에 안고 가만히 그대로 한 참을 서 있었다. 아무런 생각도 없이… 그렇게 태양이 완전히 솟아오를 때까지 서 있었다. 그 느낌은 말과 글로서는 표을 할 길이 없다. 그냥 느껴보는 자만이 느낄 수가 있다.

 

 ▲초가을인데도 벌써 낙엽이 붉게 물든 법계사의 단풍나무

 

목석처럼 태양을 바라보고 서 있는데 아침 공양시간이라는 목탁소리가 들려왔다. 중생은 먹어야 한다. 공양시간을 시간을 놓치면 아침 한 끼를 굶어야 한다. 탑을 내려오는 데 평상의 삶이 항상 이러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런 생각이 없는 무념무상의 경계. 그 자리에는 고통이 없다. 그런데 공양간으로 들어오는 순간 그 경계는 사라지고 밥을 먹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마음이 변한다. 중생이란 그런 거다.

 

밥을 먹고 다시 탑이 있는 극락전으로 올라가니 스님 두 분이 마당을 쓸 고 있었다. 그렇다고 마당에는 낙엽 한 잎 없는 맨 땅이다.

"스님, 낙엽도 없는 데 마당은 왜 쓸지요?"

"그게, 마당 쓰는 수행입니다."

스님이 쓸어내린 마당은 파도 물결처럼 가지런한 무늬가 그려져 있다. 낙엽도 없는 마당을 매일 쓸어내리는 것이 수행이라니. 그럼 저 두 스님은 반특이의 환생이란 말인가? 나는 문득 청소를 하다가 도를 깨친 주리 반특이란 부처님 제자가 생각났다.

 

▲낙엽이 한 잎이 없는데도 마당을 쓰는 스님들, 마당쓰는 것 자체가 수행이라고. 마당을 쓰는 스님을 바라보며 부처님의 제자였던 주리반특이을 생각해본다. 

 

반특이! 반특이! 두 스님은 반특이의 환생으로 태어나 남이 보면 할 일이 없는 것처럼 마당을 쓸고 있을까? 그럼 나는 마당을 쓰는 보조 반특이라도 되어볼까? 그도 저도 못하는 이 중생은 그저 고깃덩어리밖에 아니야. 먹고 싸고 잠을 자는 고깃덩어리 중생.

 

 ▲채마전에 싱그럽게 자라고 있는 무. 씨를 뿌리고 김을 메며 채소를 가꾸는 것도 수행이다.

 

극락전에서 내려오는데 바위틈에 구절초가 함초롬히 아침 이슬을 머금고 피어 있다. "구절초는 바위틈에서도 피어나 미소를 짓고 있는데 이 고깃덩어리는 무얼 찾아 헤매고 있을까?" 타 아래 채마전에는 무가 싱그럽게 자라고 있다. 법계사를 찾는 불자들에게 월동 반찬이 되어줄 푸른 무들은 높은 산중에서도 무한한 생명력을 지니며 힘차게 자라나고 있다. 씨 뿌리고 김을 매주며 무를 가꾸는 자체가 道가 아니겠는가? 법계사 스님들의 수행이 푸른 무에서 보인다.

 

법계에서도 채소를 가꾸고, 마당을 쓸며 일을 한다. 이렇듯 모양으로 보이는 속계와 법계는 서로 다르지 않다. 아무리 보아도 속계와 법계를 경계 짓는 표시는 없다. 굳이 말한다면 일주문 밖은 소계요, 일주문 안은 법계다. 그러나 누구나 일주문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

 

 ▲법계사 바위틈에서 피어나는 아름다운 구절초의 자태

 

그렇다면 소계와 법계를 경계 짓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의 마음! 마음이다. 인간의 마음이 잘 못 인식을 하여, 잘 못 생각하여 소계와 법계를 가르고 있다. 탐, 진, 치 3독을 놓아 버리지 못하는  한 인간은 속계에 있고, 3독을 놓아버리면 법계에 가까이 있다. 이를 알면서도 제대로 행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법계사의 마당을 쓰는 반특이도 될 수 없는 중생. 아아, 법계사의 초가을 아침, 하늘이 푸르다!

 

 

지리산 법계사 초가을 풍경

  

 

 

  

 

 

 

 

 

 

 

 

 

 

 

 

 

 

(2009.9.19 지리산 법계사에서 글/사진 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