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섬진강일기

섬진강 바람과 계족산 잔돌처럼

찰라777 2010. 7. 20. 11:19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신경림 시인, '목계장터'에서-

 

▲구례 계족산의 운무

 

오늘은 온 가족이 함께 섬진강으로 가는 날이다. 지난번에 가지고 오지 못했던 짐을 꾸역꾸역 넣다 보니 자동차가 한치의 빈틈이 없다. 책이며, 컴퓨터, 부엌살림 등을 이것저것 필요한 것들이 왜 이리도 많은지.... 꼭 필요한 것만 챙긴다고 하는데도 이 모양이다.  비우자고 시골로 가는데 아무래도 나는 역행을 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 같다.

 

서울을 출발하여 경부고속도로 천안 논산 찍고, 완주 IC를 빠져 나갓다. 내딴에는  남원 가는 길을 가다가 새로 난 길을 간다고 방향을 틀었는데, 그만 통영가는 고속도로로 빠지고 말았다. GPS의 방향지시판은 길이 틀렸다고 자꾸만 비명을 지른다.

 

진안 IC에서 빠져나와 톨게이트의 안내원에게 물으니 여기서부터 구례까지는 길이 꾸불꾸불하여 2시간은 족히 걸리다고 한다. 이크! 빨리가자고 한 짓이 오히려 늦어지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그러나 진안에서 남원으로 넘어가는 길은 대 만족이었다. 누군가 "길을 잃고 나서부터 진짜 여행이 시작된다"고 하더니만. 좁은 시골길은 아주 멋스러웠으며, 들판과 논밭은 싱그러운 초록 빛깔로 가득하여 휘파람이 나올지경이다.

 

자동차는 거의 없다. 바람과 구름, 들꽃, 산이 아스라히 전개되는 길. 갑자기 시인 신경림의 <목계장터>가 떠올랐다.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바람'은 '구름'과 '방물장수'와 더불어 '유랑'의 이미지요, '들꽃'과 '잔돌'은 '정착'의 이미지인가?

 

"아빠, 우리식가 아주 멀리 긴 여행을 떠나는 것 같아요."

"마져, 짐을 가득 싣고 온 가족이 유목민처럼 길을 떠나는 것  같아요."

"허허, 그런가?"


◀ 유목민-노마드 같은 인도여행-라다크 레에서 마날리로 넘어오는 길에서 트럭을 얻어타고...

 

아이들이 흥겨운 듯 콧노래를 불렀다. 유목민과 정착 사이. 서울은 정착의 삶이고, 섬진강은 마치 유목민의 삶 같다는 생각이 얼핏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유목과 정착 사이의 역사는 인류 전체의 역사를 관통하고 있다.

 

정착하는 사람들과 돌아다니는 사람은 언제나 있어 왔고, 그들이 바로 세계사를 구성해왔기 때문이다. 유목을 하다가 정착을 했고, 정착을 하다가 다시 유목의 삶을 떠나는 것이 인류사의 반복이다.  그 유목과 정착 사이에는 언제나 희로애락의 삶이 전개되어왔다.

 

백운동 계곡을 지나는데 "섬진강 발원지 데미샘"이라는 안내판이 나온다. 그렇지 않아도 섬진강 발원지가 어디인지 궁금했는데, 길을 잃고 나서 횡재를 한 샘이다. 그러나 오늘은 그냥 지나가자. 정착을 한 다음에 천천히 와도 늦지 않다. 아아, 거대한 지리산이 앞을 가로막는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흙탕물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평생을 살아가면서 단 한순간만이라도 그렇게 살아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지리산을 보는 순간만큼은 갑자기 삶이 자유로워짐을 느낀다. 그러나 어쩌랴. 우리네 삶은 늘 여기저기서 터져나오는 예기치 못한 사건의 소리에 놀라며, 사방에 걸려있는 그물코에 이리저리 걸리고, 물귀신 같은 저자거리의 흙탕물에 더럽혀져 살아간다.

 

남원에서 지리산을 넘어 구례읍으로 내려가는데 꼭 고향에 가는 기분이 든다. 구례에서 단 이틀밖에 머문적이 없는데.... 사라믕 마음은 이렇게 간사한 것이다. 마치 정착지를 찾아가는 기분이랄까? 어쨌던 단 하루를 정착 하더라고 잠을 잘 수 있는 집이 있다는 것은 기분 좋은 것이다. 그만큼 나는 섬진강에 이미 마음이 와 있는 것이다.

 

구례읍 선미옥에서 다시마국으로 점심을 먹었다. 선미옥의 다시마 국은 일품이다. 언젠가 이 집에 대한 맛자랑 해야 할 것 같다. 구례 재래 시장에서 아내와 아이들이 수박, 상추 등 사는 동안 나는 인테리어 집에 들려 모기장을 알아 보았다. 현관문과 부엌 뒷문에 모기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시장터로 돌아오니 아내의 입에 귀에 걸려 있다.

 

"2천원어치 상추가 한 바구니예요!"

 

주부에게 싼 가격으로 장을 보는 재미는 저렇게 입이 귀에 걸리는 일인가 보다. 서울보다는 엄청싸고 질이 좋은 상추란다. 구례읍을 벗어나니 바로 섬진강이다! 섬진강! 시인도 많고, 문인도 많으며, 재첩과 은어가 많은 곳. 일급수가 흐르는 곳.... 

하여간 나는 섬진강이 좋다.

 

이제 본격적으로 섬진강변의 삶이 시작되는 날이다. 유목과 정착 사이를 오가는 삶, 이곳에 머무는 동안 만큼은 그물코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자유로운 유목민의 삶을 살아가고 싶다.

 

집 옆으로는 섬진강이 흘러가고, 집 앞으로는 계족산이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다. 멀리 지리산의 운무가 네팔의 포카라에서 바라보는 사랑곳처럼 신비스럽게 보인다. 섬진강의 바람, 계족산의 잔돌... 아아,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삶,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삶, 바람과 잔돌처럼 자유로운 삶, 그런 삶을 살고 싶다.

 

섬진강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하고

계족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2010.7.9 섬진강 계족산에 도착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