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방랑/Nepal

‘희망의 씨앗’ 하나를 들고 떠난 네팔

찰라777 2010. 10. 26. 07:53

 네팔에 심은 희망의 씨앗 하나①

‘희망의 씨앗’ 하나를 들고 떠난 네팔 

 

 ▲카트만두에서 네팔 동부 버드러푸르로 가는 프로펠러 경비행기에서 바라본 히말라야

 

 ▲카트만두 공항에 도착한 자비공덕회 회원들

 

 

 

“당신이 들고 다닐 수 있는 것만 소유하라. 언어를 알고, 나라들을 알고, 사람을 알라. 당신의 추억이 당신의 여행 가방이 되게 하라.” -솔제니친-

 

 

카트만두에서 네팔 동부에 위치한 자파시 버드러푸르 공항으로 날아가는 에띠 라인Yeti Line 경비행기. 왼쪽에는 히말라야의 영봉이 눈에 덮인 채 흰 구름위에 신성하게 앉아 있다. 눈의 고향 히말라야! 히말라야의 영봉을 눈의 여신들이 감싸고 있다. 부처의 모습인가, 힌두신의 모습인가? 죽어도 원이 없을 풍경이다! 잠시 생각에 잠긴 순간 경비행기가 심하게 흔들린다.

 

 

“엄마야!”

 

 

넋을 잃고 히말라야의 영봉을 바라보던 자비공덕회 회원 20명은 저마다 놀라는 소리를 지른다. 지금 우리의 생명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의 생명은 에띠 라인 경비행기를 운전하는 조종사의 손에 있다. 그가 자칫 잘못하여 저 히말라야의 영봉으로 방향을 틀면 우리는 영락없이 히말라야에 부딪쳐 콩가루가 되어 눈 속에 묻히고 말 것이다. 인간의 생명은 연약하다. 단 1분만 숨을 쉬지 못해도 이승을 넘어 저승으로 가는 것이 인간이 아닌가.

 

 

극적으로 떠났던 네팔 여행 

네팔은 나를 끌어 당기는 뭔가가 있다!

 

▲인천공항

 

▲카트만두 공항에 도착한 대한항공

 ▲카트만두 국내선공항

 

 

 

나마스테!

아내와 나는 여행 중 사용해야 하는 최소한의 물건을 작은 여행 가방에 챙겨 들고, 바다를 건너 히말라야를 넘어 네팔로 향했다. 나는 여행을 통해서 그 나라의 언어를 알고 싶었고, 사람과 문화를 알고 싶었다. 세계의 지붕 히말라야가 있는 네팔은 생각만해도 언제나 가슴이 설레는 여행지다.

 

 

나에게는 이번이 세 번째로 오는 네팔여행이다. 그런데 세 번 다 아주 극적으로 네팔을 방문하게 되었다. 첫 번째는 2001년 9.11 사태가 즉발한 일주일 후였다. 뉴욕의 트윈 빌딩 폭발 사고로 세게는 발칵 뒤집혔으며, 불안과 공포로 거의 모든 여행이 취소되었다. 그러나 이근후 박사를 단장으로 하는 네팔캠프 의료봉사팀 20여 여명은 용감(?)하게 네팔로 향했다.

 

 

많은 여행객들이 여행을 취소한 덕분에 우리는 매우 저렴한 가격으로 융숭한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5성 급인 카트만두의 솔티호텔, 치트완의 타이거 탑, 그리고 포카라에서는 풀바리 호텔에 저렴한 가격으로 머물 수가 있었다. 위기는 기회를 맞이한다고 했던가?

 

 

두 번째 여행은 2005년 100일간의 티베트 문화 탐방 중 티베트 라싸에서 지프차를 타고 네팔로 넘어 갔다. 그 대에는 마오이스트가 왕권에 도전하여 네팔 도처에서 총격전이 벌어지고 있던 때였다. 네팔을 30여 년간 매년 다녀오신 이근후 선생님조차 네팔에 가는 시기를 늦추라고 충고를 했는데 우리는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를 거쳐 장무와 코다리를 건너 네팔로 들어갔다. 곳곳마다 네팔 정규군과 마오이스트들이 충돌을 했지만 다행이 마이이스트들은 관광객은 해치지 않았다. 우리는 카트만두, 포카라를 지나 룸비니에서 극적으로 인도로 무사히 건너 갈 수 있었다.

 

네팔은 우리를 끌어 당기는 뭔가가 있다. 무슨 오래전 히말라야 산맥에서 태어 났을가?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네팔을 첫발을 들여 놓기가 힘들지만 한번 발을 들여 놓으면 자꾸만 가고 싶은 곳이 네팔이다.

  

 

 

▲네팔 동부 버드러푸르로 가는 프로펠러 경비행기

 

그리고 5년이 지나 이번이 세 번째 여행이다. 아내는 네팔 여행일자를 받아 놓고 2주 동안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2년 반 전에 심장 이식 수술을 한 아내의 심장에 이상이 생겨 온 몸과 다리가 부어올라 여행을 할 수 있는 처지가 되지 못했다. 그러나 목숨을 담보로 하고 여행을 갈 정도로 여행을 좋아하는 아내는 기어코 네팔을 가고야 말겠다고 했다. 담당 의사조차 고산지역인 네팔에 장시간의 비행기를 타고 가는 것은 무리라고 만류를 했다.

 

 

그런데… 여행 3일을 남겨 놓고 아내는 병세가 아주 호전되어 퇴원을 하여 네팔 여행에 극적으로 합류를 하였다. 아내는 그 다음 일은 그 때 가서 생각을 하자고 했다. 네팔의 아이들을 만나겠다는 아내의 집념은 대단했다. 아내의 권유로 함께 여행을 가게 된 회원들도 5명이나 되어 기필코 가야 한다는 것.

 

 

우리 부부를 제외한 다른 회원들은 모두 이번에 처음으로 네팔을 방문하게 되는데, 그들 모두는 네팔의 아이들은 만나고 부처님 탄생지인 룸비니 성지 순례를 열망하고 있었다. 하여간… 아내는 장애인 메디컬 캐어 좌석을 신청하여 휠체어를 타고 비행기 트랩에 올랐다. 그리고 7시간이 비행 끝에 무사히 카트만두에 안착을 하게 되었다. 카트만두 공항에 도착을 하여 밖으로나가니 네팔투어 현지 직원이 환영의 '까다'를 모두의 목에 걸어주었다.우리는 까따를 목에 걸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남을 위해 기도하는 모임

소박한 "자비공덕회"회원들과 함께

 

 

 

▲버드러푸르 공항에 도착하여 

 

 

“자비공덕회(http://cafe.naver.com/buddhajb)”는 수유리에 위치한 작은 암자인 향운사에서 결성한 봉사 단체이다. 작년 6월에 향운사 명조, 지상 두 비구니 스님의 서원으로 창립된 “자비공덕회”는 소박한 사람들이 모이는 아주 작은 단체이다. 명조스님은 심장병을 8년 동안 앓으며 생사를 수차례 넘나드는 고행(?)을 하고 계시고 있는데, 도반스님인 지상스님이 지극정성으로 보살피고 있다. 두 스님은 신도들이 시주로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큰 빚만 지고 있는 같아 무언가 남을 위해 기도를 하며 돕는 단체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절을 짓거나 큰 종을 다는 것보다 불우한 이웃을 위해 자비행을 실천하는 것이 부처님의 참 가르침에 대한 실천이 아니겠느냐는 것. 이렇게 해서 처음 20여명의 회원이 창립법회를 열었고, 1년이 지난 지금은 70여명으로 늘어났다. 회원들은 매일 남을 위하여 기도를 하며 모은 보시금을 들고 한 달에 한번 향운사에 모여 기도법회를 열고, 모은 성금을 네팔의 아이들에게 학자금으로 보내고 있다.

 

 

왜 네팔인가? 우선 회원 수가 적고 모여진 모금액도 너무 작다. 그러나 모금액이 적다고 해서 보시를 미룰수 없다는 것이 두 비구니 스님들의 생각이다. 우선 공부를 하고 싶으나 생활비가 없어서 생활비를 벌어야 하는 아이들을 돕자는 취지에서 부처님이 탄생한 나라 네팔을 선택하게 되었다. 네팔이 아이들은 자신의 생활비를 벌기 위해 하루 종일 돌을 깨거나 농사일을 돕는다. 그 아이들이 한 달에 2만원이면 먹고 사는 생활비와 학비를 걱정하지 않고 학교에 다닐 수가 있다. 자비공덕회에서는 우선 12명을 선정하여 매월 24만원을 학자금 지원금으로 직접 보내주고 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네팔관광청한국사무소장인 케이피 시토울나님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시토울나님의 고향 마을인 버드러푸르 쩌퍼러마리에 있는 학교의 교장 선생인 시토울나와 초중고등학교 동창생인데 그 교장선생님과 마을 위원회에서 엄선을 한 아이들을 선택하여 직접 학자금을 전달 할 수 있는 길이 생겼다. 시토울나님은 나와는 10년 전부터 알고 지내는 사이로 네팔 아이들을 돕자는 제안을 나와 아내가 자비공덕회에 제의를 했는데 작은 돈으로 아이들을 돕자는 취지가 좋아 모두가 찬성을 하여 네팔의 아이들을 돕기로 했던 것.

 

 

자비공덕회 회원들은 마음과 물질이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의 신심과 남을 돕겠다는 의지는 매우 강하다. 그들은 매일 집에서 아침저녁으로 <남을 위한 기도>를 하며 500원, 1000원을 보시함에 넣는다. 말하자면 자리이타의 부처님 자비행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네팔의 오지마을에는 컴퓨터가 한 대도 없다고 했다. 그래서 컴퓨터 보내기 모금운동을 전개했는데 의외로 가난한 나라에 컴퓨터 보내주겠다고 성금을 모아준 독지가들이 있어 10대의 컴퓨터를 구입할 수가 있다. 거기에다가 프린터기 한 대 팩스기 1대를 구입하여 이번에 방문 시에 전달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이번여행은 회원들과 함께 네팔 동부 칸젠충가 밑 오지마을에 회원들이 학자금을 지원한 학교를 방문하여 컴퓨터를 전달하고, 학생들을 만나는 일이 주목적이고, 부수적으로 부처님이 탄생하신 룸비니와 카빌라 성을 순례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소가 풀을 뜯는 공항에서

메리골드 꽃을 목에 걸고

  

▲메리골드 꽃먹걸이를 목에 걸고

 

  

▲여행가방을 수례에실고 오는 공항직원 

 

▲메리골드를 목에 걸어주는 아식 

  

 

 ▲자비공덕회를 환영하는 프랑카드를 차에 걸어놓고 있다.

 

  ▲노머드 신세가 된 일행들

 

 ▲가이드 아식

 

오, 히말라야여! 경비행기 안의 승객들은 모두 히말라야 설산을 바라보면서 감탄사를 연발했다. 에띠라인 경비행기에서 바라보이는 히말라야는 장대하게 보였다. 눈 덮인 설산이 햇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금방이라도 떨어져 내릴 것먼 같은 프로펠라 비행기는 덜덜거리며 히말라야 중턱을 가로질러 갔다.

 

 

프로펠러 비행기는 카트만두를 출발한 지 1시간여 만에 네팔 동부 버드러푸르 공항에 안착을 했다. 말이 공항이지 트랩에서 나오는 길에는 소와 염소가 풀을 뜯고 있는 시골이었다. 버드러푸르 공항 에띠 경비행기 앞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밖으로 나가자 가이드 아식이 소형 버스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엇, 거기에는 서울 옴레스토랑에서 만났던 빠담도 기다리고 있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아식과 빠담은 모두 이곳 동부 출신이라고 했다. 빠담을 다시 이곳에서 만나다니 너무 반가웠다.

 

아식은 일행들의 목에 일일이 금송화 목걸이를 걸어주며 환영을 해주었다. 메리골드(금송화) 꽃목걸이를 목에 걸어주는 것은 크게 "환영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메리골드 향기가 가슴까지 파고드는 것 같아 코끝이 찡해졌다. 메리골드를 목에 건 일행들은 모두 감동스런 표정이었다.

 

"저는 아식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이곳 네팔 동부 오지까지 오시느라 수고많으셨습니다. 네팔에 오신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가이드님이 부처님 얼굴을 닮았네!”

"미남이에요.”

"한국말도 참 잘 하는 군요."

 

 

버스에 올라 인사말을 하는 아식을 향해 우리는 모두 박수 갈채를 보냈다. 아식은 정말 부담이 없는 얼굴 모습이었다. 목소리도 유연하고 항상 얼굴에 만면의 웃음을 짓고 있었다. 아식은 한국에서 근로자로 5년 동안 일을 했다고 하는데 한국말을 우리보다 더 잘했다. 우리는 아식이 안내하는 대로 자파Jhapa시를 지나 더먹Damak으로 갔다. "희망의 씨앗" 하나를 들고 간 네팔의 자파시는 점점 어둠 속으로 잠겨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