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섬진강일기

福은 스스로 지어 福통장에 미리미리 저금을 해야...

찰라777 2011. 5. 12. 09:21

오늘은 불기 2555년 4월 8일(양력 5월 10일) 부처님 오신 날이다. 그런데 연일 3일째 비가 내린다. 아마 만물이 생육하기 좋으라고 단비를 내려주는 모양이다. 어제 밤에도 많은 비가 내렸다. 집 앞 개천에 물이 크게 불어나 실개천이 계곡으로 변하고, 계족산에 폭포수도 더 거세게 내린다.

 

 

 

 

그래도 지리산에서 내려온 운무가 백운산을 휘돌아 계족산으로 흘러내리는 풍경은 과히 점입가경이다. 마치 네팔의 포카라 어느 마을에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킬 정도로 아름답다. 담쟁이 덩쿨에 후드득 후드득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면 어쩐지 마음이 아련히 잦아든다. 빗소리를 들으면 괜히 마음이 착 가라앉는다. 폴링(falling), 모든 사물은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빗소리는 겸손의 미덕을 가르쳐 준다.

 

 

 

 

대지에 떨어진 빗방울은 자꾸만 낮은 곳으로 흘러 내린다. 대지에서 실개천으로, 계곡으로, 시냇물로, 강으로, 바다로.. 자신을 자꾸만 낮추어 가는 물의 자세는 언제나 수평을 유지하려고 애를 쓴다. 부드럽지만 강한 물, 물은 참으로 겸손하면서도 사납다. 그러니 겸손한 사람을 함부로 건드리면 큰 코가 다치는 수가 있다.

 

비가 좀 멎어 주어야 초파일 등불을 켤 텐데. 이 추세로 나가다가는 절집 행사가 엉망이 될 것만 같다. 아내와 나는 오늘 구례읍 뒷산인 봉성산에 있는 작은 암자인 봉명암에서 봉사를 하기로 했다. 그곳 스님과 오랜 인연이 있어 일손이 모자라니 좀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았기 때문이다.

 

섬진강을 따라 봉성산 입구에 도착하여 산을 오르려고 하니 빗방울이 여전히 툭툭 떨어져 내린다. 봉성산은 해발 166m의 나지막한 산이다. '신증동국여람지승람'의 기록에 의하면 "구례 봉성산 아래 봉서루를 세웠는데, 김작은 '이 고을이 지형은 나는 봉(鳳)과 같아 이렇게 이름 지었다고'라고 썼고, 김극기는 '봉이 하늘 끝에서 춤추니 산은 옹기종기하고, 땅에 뱀이 서린 듯 망망하다'라고 하여 구례의 산천을 대개 비봉(飛鳳)에 비유했다" 이른바 봉황이 찾아드는 명당터라는 증거다.

 

 

 

 

봉명암으로 올라가는 길은 소나무 숲이 울창하다. 비가 내려서인지 소나무에서 품어내는 피톤치드 향이 강하게 느껴진다. 가파른 소나무 계단을 20여분 올라가니 시야가 탁 트인 자리에 봉명암이 서 있다.

 

앞으로는 섬진강이 시원스래 흘러내리고 그 위로 사성암이 있는 오산이 우뚝 솟아 있다. 전망 하나는 오히려 사성암에서 내려다보는 것 못지않게 좋다. 사성암에서 내려다보는 전망은 좀 불안한데 비해 이곳 봉명암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여유롭게 안정된 느낌을 준다.

 

아내가 맡은 소임은 공양간에서 떡을 나누어 주거나 신도들에게 배식을 하는 봉사이고, 내가 하는 봉사는 신도들이 신청한 등을 대웅전 처마에 달아 주는 일이다. 나는 우선 대웅전과 산신각 청소를 했다. 쾌쾌 묵은 먼지를 쓸어내고 걸래로 바닥을 닦아냈다. 걸래에 묻은 때는 내 마음의 때처럼 더럽다. 

 

 

 

 

 

봉명암은 그동안 태고종 스님이 운영해 오다가 최근에 조계종 스님으로 바뀌었다. 절집은 낡았고, 신도수도 그리 많지가 않다. 다만 산책 코스가 기가 막혀 구례읍에 사는 사람들이 조석으로 봉명암을 지나 산책을 다닌다. 봉성산은 그리 높지도 않는 산이어서 산책을 하기에는 딱 좋은 코스이다.

 

나는 스님과 함께 대나무를 잘라서 처마 밑에 4개의 지지대를 세우고 대나무 사이를 철사 끈으로 연결하여 등을 달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런 다음에 신도들이 신청한 등을 하나하나 정성껏 달아주었다. 사실 이런 일도 지리산에 내려와서 처음 해보는 일이다. 쉽지마는 않다. 온 몸에 담이 배이고 팔다리가 아프다. 10시가 넘자 다행히 비가 멎었다. 스님은 봉축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나는 천수경을 스님과 함께 독경을 하다가 밖으로 나와 등을 다는 작업을 계속했다.

 

 

 

 

신도들이 드문드문 찾아왔다. 자동차가 닿지 못하는 곳이어서 정말 신심이 있는 신도들만 찾아오는 것 같다. 요즈음은 절도 자동차 길이 좋아야 신도들이 많이 찾아온다. 그러나 신도들이 적어서 절집 수입은 적겠지만 절은 고요하고 기도를 하기에는 딱 좋은 환경이다.

 

신도들이 신표를 써 주면 나는 그 신표를 등불에 정성스럽게 달아주었다. 절에 찾아오는 신도들은 대개 아주머니나 할머니들이다. 수십 년간 기도를 해온 모습이 역력히 보인다. 기복이든 정법이든 그들의 기도는 간절하고 한결 같다. '우리 가족 건강하게 해주고, 복 많이 받게 해주고, 내 자식 공부 잘하고, 사업 잘 하게 해주시오" 등 기도의 내용은 대략 비슷하다. 그들은 마지막으로 자신의 등불 앞에서 합장을 하며 간절하게 복을 빌고 간다.

 

그러나 복은 스스로 짓는데서 온다. 복은 짓지 않고 복만 달라고 하는 것은 통장에 잔고는 없는데 은행에 가서 돈을 빼달라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매일 복을 많이 지어서 복이 통장에 쌓이도록 부지런히 저금을 해야 복을 찾아쓸 수가 있다.  복통장에 잔고는 없는데 복을 찾아가려고 하면 복통장도 부도가 나 인생은 신용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복을 저금해 놓으면 설혹 그 복이 금생에 받지 못하더라도 언젠가는 받게 되며, 금생에 받지못하면 내생에라도 그 복을 받게 될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업의 윤회다. 업은 지은대로 받는다. 나쁜 업(죄)을 지어 놓고 부처님이나 예수님 앞에서 참회하고 회개를 한다고 하여 그 업이 사해지는 것은 아니다.

 

부처님 말씀에 의하면 스스로 지은 업장은 낱낱이 스스로 받게 되며, 받고 난 후에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업의 윤회는 실로 무서운 것이다. 진실로 윤회의 업보를 터득하고 나면 나쁜 업을 지을 수가 없다. 선업을 짓기에도 바쁜데 어찌 나쁜 업을 지울 수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복의 통장'이 부도가 나지 않도록 매일 선업을 쌓아나가야 한다.

 

복을 짓는 일은 무슨 큰돈이나 큰일을 보시하는 일만은 결코 아니다. 길가에 쓰레기를 버리지 않고 줍는 일, 빈차로 가다가 남을 태워주는 일, 환자를 방문하여 위로를 하는 일, 남을 헐뜯지 않는 일 등 복을 짓는 일은 부지기수로 많다. 자신이 하는 일이 복을 짓는 일인지, 죄업을 짓는 일인지 누가 가르쳐 주지않아도 스스로의 양심으로 판단을 할 수가 있다. 복의 잣대는 스스로 그어서 알수 있다는 것이다. 복의 통장이 부도가 나는 일은 그 반대의 일들이다.

 

 

 

 

하루 종일 등을 달고 나니 어깨가 뻐근하다. 한 줄로 달았던 대웅전의 등이 두 줄로 빼꼭히 들어찼다. 오색찬란한 등이 바람에 흔들리며 춤을 춘다. 등불이 바람에 춤을 추자 사람들의 소망도 흔들른들 춤을 춘다. 어쨌든 그들의 소망이 다 이루어지기를 기도해 본다.

 

"오늘 등을 다느라 정말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아니 오히려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내 생애 가장 많은 등을 달아 보았군요."

 

정말 내 생애 가장 많은 등불을 달아본 날이다. 오늘 등불을 다는 인연도 과거생의 인연으로 맺어진 것일까? 하기야 지리산 스님과 인연을 맺은 지도 40년이 다 되어 간다. 그러니 우리 인생에 우연이란 없다. 모두가 필연으로 오는 것이다. 스님께 합장 인사를 드리고 어두워질 무렵 봉성산을 내려왔다. 그런데 스님께서 떡과 과일을 잔뜩 주시는 바람에 올라갈 때보다 더 힘이 들었다.

 

"이런, 복을 통장에 좀 쌓아두려고 했는데 이 떡과 과일을 가지고가면 복 통장 잔고가 똔똔이 되어버리겠네."

"호호, 그러게 말이에요. 다음에 더 봉사를 하라는 뜻이 아니겠어요."

 

수평리 마을로 돌아오니 마침 노인당에 많은 어르신들이 그때까지 앉아서 놀고 계셨다. 우리는 노인당에 들려 가져 온 떡의 절반을 어르신들께 드렸다.  "이거 웬 떡이요?" 노인들은 촉촉한 떡을 받으며 좋아 하신다. 출출한 판에 잘 먹겠다는 것이다. 떡의 절반을 드리고 나니 어께도 가볍고 마음도 훈훈해진다. 흠, 오늘 지은 복의 절반은 '복 통장'에 그만큼 쌓였을까?

 

(2011.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