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섬진강일기

꿈에 나타난 지네 이야기

찰라777 2011. 5. 19. 11:23

어제 밤에는 지네가 꿈에 나왔다. 커다란 지네가 나를 덮치듯 기어왔는데 나는 그 지네를 손으로 밀치다가 꿈을 깼다.

 

"아니 당신 왜 그래요?"

"응, 지네 꿈을 꾸었어."

"지네 꿈을요?"

"아마 며칠 전에 죽인 지네가 억울해서 꿈에 나타났나봐."

 

지난주에 담쟁이 덩쿨에 앉이있는 청개구리를 관찰하다가 나는 기겁을 하고 말았다.  20cm 정도 되는 큰 지네가 담장에서 기어 나와 넝쿨위로 기어가고 있었다. 수평리에 이사를 온 후 지금까지 발견한 지네 가운데 가장 큰 지네였다. 여름이 다가오니 파충류와 양서류들이 슬슬 밖으로 기어나오고 있었다. 청개구리는 지네가 다가오는 줄도 모르고 마치 생각에 짐긴듯 담쟁이 덩쿨에 천연스럽게 웅크리고 앉아있었다.

 

 

한 발짝 물러 선 나는 큰 집게를 가지고 왔다. 처음에는 지네를 발견하면 무조건 잡아 죽였는데 요즈음은 집게로 집어서 냇물에 방생(?)을 한다. 아내가 집주변에 약을 치라고 닥달을 하고 있지만 나는 아직 약을 치지않고 있다. 독한 약을 치다보면 우리에게 이로운 벌레도 죽어버리기 때문이다. 나는 벌써 몇 마리 째나 거실과 화장실에서 지네를 발견하여 방생을 하였다. 그런데 이번 지네는 사실 너무 크다. 이 지네에게 물리면 상당히 큰 타격을 받을 것은 뻔했다.

 

 

지네를 집게로 집어서 개울에 던지기 위해 대문으로 나오는데 마침 이웃집 혜경이 엄마가 왔다. 혜경이 엄마도 지네를 보더니 너무 크다고 질겁했다.

 

 

"아니, 어디로 가지고 가세요?'

"개울에 던져서 살려 주려고요."

"그런데 너무 커요. 아이들이 개울에서 놀다가 지네에 물리면 큰 일 나겠는데요. 그러니 그 지네는 반드시 죽여야 할 것 같아요."

"음... 그럴까?"

 

 

나는 자네를 집게에 물고 한참을 생각했다. 죽일 것인가 말 것인가? 지네가 커서 독도 많겠지만 사실 이 지네는 아직 인간에게 해를 끼치지 않은 지네다. 홍서원 정봉스님의 말도 생각이 나고. 스님은 모든 생물은 살 권리가 있으니 함부로 죽여서는 안 된다고 강설했다. 심지어 현관에 집을 짓는 말벌까지 죽이지 않고 망사를 쳐서 건드리지 않으며 공생을 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혜경이 엄마는 빨리 죽이라고 했다. 아내도 뭘 꾸물거리느냐고 하면서 빨리 죽이라고 하며 얼굴을 찡그렸다. 만약 아이들이 개울에서 놀다가 이 지네게 물리면 상당히 큰 타격을 받을 것은 뻔 했다. 갑자기 아이들이 지네에 물려 병원으로 실려 가는 환상이 눈앞에 그려지자 나는 순간적으로 지네를 바닥에 내려놓고 벽돌로 찍어서 죽여 버렸다. 나는 끝까지 꿈틀거리는 지네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에 살생을 한다고 하더니 내가 그런 꼴이다.

 

"여보, 빨리 버리지 않고 뭘 해요?"

 

그 때서야 나는 죽은 지네를 다시 집게로 물어 개울에 던졌다. 그런 일이 있은 후로 자꾸 죽은 지네가 생각이 났다. 그러다가 어제 밤에는 그 지네가 나타나는 꿈까지 꾸게 된 것이다.

 

 

사실 지네는 가만히 생각해 보면 대단한 녀석이다. 백 개나 되는 다리를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기어 다니니 말이다. 언젠가 읽었던 법정스님의 지네와 여우에 대한 우화가 생각이 났다. 지네와 여우에 얽힌 나온 이야기이다.

 

 

 

한 마리 지네가 백 개나 되는 다리로 걸어가고 있었다. 백 개나 되는 다리로 걸어가는 것은 하나의 기적이다. 두개의 다리를 조절하는 것도 어려운 일인데 백 개나 되는 수많은 다리를 조절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지네는 언제 어디서나 잘 조절해왔다.

 

이런 지네를 지켜보던 한 마리 여우가 의문에 사로잡힌다. 여우라는 짐승은 항상 호기심에 사로잡혀 있다. 우화 속에 등장하는 여우는 물론 일종의 상징이다. 지식과 분석과 논리의 상징. 여우는 보고 관찰하고 분석한다. 그런 다음 자기가 터득한 지식을 전파한다.

 

여우는 지네가 백 개의 다리를 가지고도 아무 탈 없이 잘 걷는다는 사실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 그래서 지네에게 다가가서 묻는다.

 

"얘, 잠깐. 의문 나는 점이 있다. 너는 어떻게 그 많은 발들을 조절하니? 백 개의 발이라니, 그 많은 발을 가지고도 너는 아주 유연하게 걷고 있으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과연 어떻게 이런 조화가 일어날 수 있니?"

 

지네가 대답한다.

 

"나는 평생을 두고 이렇게 그저 걸어 다닐 뿐이야. 그러나 한 번도 네가 묻는 그 점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않았어. 내게 시간을 주어. 한번 그 점에 대해서 차분히 생각해 보겠다."

 

지네는 눈을 감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래서 지네는 처음으로 분리되었다. 관찰자로서의 마음과 관찰되는 자로서의 그 자신으로 나누어진 것이다. 지금까지 지네는 태어날 때부터 자신이 지닌 능력에 따라 언제나 살고, 걷고, 또 그렇게 되풀이해 왔다. 다리를 움직이는 자신과 다리가 둘이 아니었다. 그의 삶은 전체로서 하나였다.

 

그런데 여우의 말을 듣고 생각에 잠기자 주체와 객체로 분리되고 만 것이다. 그리하여 지네는 다시는 자연스럽게 걸을 수가 없었다. 이때 여우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면 그렇지. 네가 걷는 것이 무척 어려울 것이라고 나는 생각해 왔어. 나는 그것을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단 말이야."

 

지네는 눈물을 머금은 채 말했다.

 

"전에는 결코 어렵지 않았어. 그런데 여우 네가 문제를 일으킨 거야. 이제 나는 다시 그전처럼 걸을 수가 없게 되었어."

 

 

지네와 여우 이야기는 미국의 사상가인 랄프 W.트라인이 쓴 '나에게서 구하라, 내 안의 무한한 지혜와 생명을 찾아서'에 나온 이야기이다.

 

지식이란 이와 같이 위험한 것이라고 우화는 넌지시 일깨워주고 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여우와 같이 의심이 많고 분별이 많으며 따지기 좋아하는 인물을 조심하라는 경고를 던져주고 있다.

 

우리네 인생도 지네처럼 백 개의 다리를 가지고도, 즉 세상의 온갖 어려운 일을 하면서도 거기에 구애 받지 않고, 그저 무심히 한결같은 마음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을 묵묵히 살아가면 큰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여우와 같은 달콤한 꿰임에 빠져 인생을 망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궁리끝에 악심만 나오낟고 하지않는가?

 

하여간 그런데 지네가 하필이면 내가 참개구리를 관찰하는 그 시각에 나타날게 뭐람. 지네가 네 눈에 띠지 않았더라면 죽임을 면했을 터인데 말이다. 여우의 꿰임에 빠져 그전처럼 다시 걷지 못하는 지네와 내 눈에 띠어 죽음을 당한 지네는 둘 다 참으로 불행하다는 생각이 든다.

 

백 개의 다리를 가지고도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교훈을 우리에게 주는 지네인데... 다시는 지네가 나에게 해를 끼치지않는 한 죽이지 말자고 다짐을 해 본다. 죽은 지네를 위해서 염불이라도 해주어야 하지 않을까? 나무아미타불!